박용규, 신학지남 제80권 제4집 (2013.12): 165-190

초기 한국선교와 대부흥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신학지남 제80권 제4집 (2013.12): 165-190
 
목차
들어가면서
Ⅰ. 한국교회의 씨앗이 된 여인들
Ⅱ. 대부흥운동의 발흥에서 여성의 역할
Ⅲ. 여성: 대부흥운동의 최대 수혜자
맺는 말
 
들어가면서
 
한국교회사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면밀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복음전파 과정에서 여인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했는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기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희생과 헌신과 사랑으로 이 땅의 교회를 섬기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다.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발단과 확산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 놀라운 부흥운동의 발흥과 전개 그리고 결실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했다. 여성들은 처음부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동참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흥의 시발점(始發點)을 제공했고, 직접 부흥을 경험했으며, 그러면서도 대부흥의 결실을 가장 많이 향유한 당사자들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여인들은 대부흥의 주역(主役)이었고 그 대부흥의 최대의 수혜자(受惠者)였다.
실제로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의 여성들이 하나님 앞에 남녀가 평등하다는 기독교 이상이 비로소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대부흥을 통해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결혼관계가 정착되고, 조혼이 사라졌으며, 일부다처제가 폐지되기 시작했으며, 여성들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영적각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뜬 여성들이 신앙교육을 통해 자녀교육과 가정혁명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유교와 우상에 깊이 물들어 있던 한국 남성들과 사회적 제약과 속박 속에 소망 없이 살아가던 여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본 연구는 초기 한국선교와 부흥운동에 있어 여성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조명한 작품들이 거의 없어 초창기 이와 관련된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와 편지 각종 저널에 실린 1차 자료들을 통해 조명하였다. 한국교회 대부훙운동 기간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했지만 역사적 흐름과 인과 관계를 고려하여 초기 한국교회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인들 중 토마스 선교사의 아내 캐롤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 스크랜톤 여사(Mat Scranton), 로제타 셔우드 홀(Rossetta Sherwood Hall), 그리고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 박 에스더(Esther Kim Park)으로 알려진 김정동을 먼저 기술하였다.
 
I. 한국교회의 씨앗이 된 여인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라면 이 세상의 여인은 그 역사의 주역이었다. 그것은 복음이 전래된 초기부터 현대 한국교회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한국교회 성장의 신화의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특히 한국의 경우 역사서술이, 한국기독교회사도 예외가 아니지만 남성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우리 모두는 한국교회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토마스라고 배웠고 기술했고 가르쳐 왔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토마스보다 2년 6개월 앞서 1864년 3월 24일 세상을 떠난 토마스의 아내이다. 남편을 따라 중국에 도착해 낮선 환경과 싸우다 임신 중에 세상을 떠난 토마스의 아내 캐롤라인 가프리(Caroline Godfrey Thomas)는 이 땅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의 아내는 1866년 9월 토마스가 순교할 수 있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 용기를 제공해준 힘이었고, 원동력이었다.
돌이켜 볼 때 한국교회의 엄청난 선교의 성공 이면에는 여인들의 희생과 헌신과 섬김이 그 저변에 있었다. 한국선교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최초의 개신교 의료 선교사 가운데 한명인 윌리엄 벤톤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 역시 그의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2-1909)은 1855년 스크랜톤(W. T. Scranton)과 결혼해 이듬해 아들 윌리엄 벤톤을 출생한다. 윌리엄이 16살 때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만 40세였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말했던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불혹의 나이에 갑자기 남편을 잃은 슬픔은 참으로 대단했을 것이다. 잠시 고통 속에 있었지만 곧 극복하고 아들 윌리엄을 훌륭히 키워 예일대학교에 진학시킨다. 신앙인의 저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1878년 예일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들 윌리엄은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해 4년 후 1882년 졸업하고 1884년까지 2년 동안 오하이오 주에서 의사로 개업한다. 그러던 중 한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이 아들 윌리엄에게 조선의 의료선교사로 갈 것을 독려했고 윌리엄은 용기를 내 한국선교를 지망했다. 메리 스크랜톤은 이미 53세의 나이이만 아들과 함께 한국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선교본부에 간청해 아들 내외와 함께 이 땅을 밟았다.1) 아들 윌리엄 스크랜톤이 알렌이 경영하는 제중원의 의사로 한국선교를 착수하다 얼마 후 정동병원을 개원하여 가난한 민중들을 치료하는 일에 전념하는 동안2) 메리 스크랜톤은 여인들을 모아 놓고 1886년 5월 31일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데 바로 이 학교가 이화학당이었다.
이화학당은 화려하게 시작하지 않았다. 버림받은 소녀들, 고관의 첩,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는 여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시작했다. 누구도 이 학교가 오늘날과 같은 큰 학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53세에 한국에 도착해 14년 동안 자신의 남은 생애를 불태웠던 한 여인의 결실이었다. 메리 스크랜톤, 그녀는 불혹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도 굴하지 않고 아들을 명문 예일대학과 뉴욕의과대학에 진학시켜 의사로 만든 다음, 아들 스크랜톤을 은둔의 조선 선교사로 가도록 독려하고 그 자신도 함께 조선에 입국했다. 입국 후 그녀는 버림받은 여인들을 모아놓고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이화학당을 통해 장차 한 남편의 아내이자 자신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여 그들을 통해 사회와 민족을 변혁시킬 수많은 신앙의 어머니들과 여성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면에서 메리 스크랜톤은 확실히 이 세상의 어머니의 표상이었다.
여성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최초로 개설한 것도 스크랜톤 여사였다.3) 1888년 1월에는 이화학당에서 12명의 처녀와 3명의 부인이 모인 가운데 주일학교가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그 해 2월에는 스크랜톤 부인이 주일 밤마다 여자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해 그 해 가을에는 성경반의 학생수가 35명으로 늘어났다.4) 흥미 있는 사실은 초기 여성과 남성의 교회 구성비는 큰 차이가 없었다. 예를 들어 1907년부터 1914년까지 새문안교회 교인 구성비를 살펴보면 총 366명 가운데 남자 교인과 여자 교인의 비율이 비슷했다.5)
1909년 한국교회 대부흥이 꽃을 피우고 결실로 이어지던 그 때 메리 스크랜톤은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보통 세상을 떠날 때는 남편 곁에 묻히고 싶은 것이 여인의 심정이지만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바친 조선에 잠들고 싶어 했다. 헐버트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여기 조선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고백했지만 메리 스크랜톤 여사의 마음도 동일했을 것이다. 그녀는 한 여인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 땅의 복음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된 또 한명의 여인은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이다. 그녀는 1889년 미국 펜실바니아 여자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안정된 병원 의사직을 뒤로 하고 24살의 나이에 뉴욕 스럼가에 뛰어들어 버림받은 민중들과 함께 의료 봉사를 시작한다. 그러다 조선선교에 뜻을 두고 1890년 10월 13일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동의 보구여관에서 하워드의 후임으로 진료를 시작했다.6) 일 년 후 1891년 12월 약혼자 제임스 홀(James Hall)이 내한하고 다시 6개월 후인 1892년 6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기생과 환락의 도시, 선교사들 사이에서 소돔과 고모라로 불리던 평양으로 향했다.7) 당시 여인이, 더구나 그것도 피부가 다른 외국 여인이 그곳에 간다는 것은 곧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날 때 부상병을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남편 제임스 홀이 세상을 떠났다.
29살, 결혼 한지 2년 5개월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앞에 슬픔을 가눌길 없던 로제타는 2살 난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녀의 배 속에는 유복자가 자라고 있었다. 3년 후 1897년 11월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남편이 죽기까지 사랑한 나라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8년 평양에 다시 올라간 그녀는 그곳에 광혜여원을 설립하고 평생 치료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온갖 부인병으로 시달리던 여인들과 아동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착수했다. 그러면서 한국 최초로 맹인교육을 실시하여 평양맹아학교를 설립했다. 평양에서 20년을 사역한 로제타는 1917년 서울로 옮겨 서울에서 1920년 여자의학반을 설립하여 여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1928년 한국 최초의 여자의학교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발전했다. 이 학교가 바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1935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는 그해 70세의 나이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6.25전쟁이 나던 그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의 한국선교 사역은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에 의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8)
한국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선교를 위해 배후에서 조용히 그러나 큰일을 이룬 한 여인이 있다. 에스더 박으로 널리 알려진 김점동(金點童)이라는 여인이다. 우리가 이 여인을 주목한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한국인 최초의 여자의학박사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과 희생의 리더십은 초기 이 땅의 여인들의 소중한 롤 모델이 되었다. 1877년 출생한 김점동은 1891년 14살 때 올링거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 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로제타 셔우드의 조수가 되어 동역하다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여자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영어 실력이 대단하고 로제타의 조사가 될 만큼 탁월했지만 거의 무학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았다.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가 서로를 연결한 것이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지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 남자와 결혼하고 얼마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김정동은 언어의 장벽, 문화적 갭, 동양인이라는 질시와 편견의 벽을 뚫고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다. 남성들도 해내기 힘든 그 어려운 과정을 여성으로서 이룩했다는 것은 당시 미국에 태어난 여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9) 남편 박씨는 아내가 유학하는 동안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장에서 일하며 혼신을 다해 아내를 뒷바라지를 하다 1900년 그만 이국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점동은 1900년 11월 미감리교 선교사의 자격으로 귀국해서 정동시약소, 동대문시약소, 평양홀병원에서 치료와 전도사업에 헌신하다 1911년 4월 13일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그 시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여 변함없이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했으며, 남편 박씨는 여인을 남자의 부속물로 여기던 그 시대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며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쳐 외조를 한 것이다. 자존심과 사회적 편견도 뒤로 하고 한 여인을 위해 생명을 다하기까지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희생을 한 김정동의 남편 박씨야 말로 여성의 잠재력을 깊이 인식하고 그녀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그런 면에서 이들 부부는 여성이 남편의 부속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남자와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된 여인들은 어디 이 사람들뿐인가. 여기 언급한 4명의 여인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 한국교회사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연구한 이들이라면 한국교회의 놀라운 발전 그 과정에서 전도부인들(Bible Women)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 한국교회 여인들은 한국교회사의 주역이었고, 주님은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 땅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기적은 가능했던 것이다.
 
II. 대부흥운동의 발흥에서 여성의 역할
 
여인들은 한국교회 태동과 성장 과정에만 아니라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발흥과 확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대부흥운동의 발흥에서 여성의 위치는 지대했다. 최초 한국교회 대부흥의 불을 지핀 사람, 그 부흥에 참여한 사람도, 그리고 최대의 수혜자도 여성이었다.
 
1. 대부흥운동의 발단의 주역 화이트와 매컬리
 
주지하듯이 1903년 8월 원산에서 놀라운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할 때 그 출발점을 제공한 사람은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매컬리(Louise Hoard McCully) 2명의 여자 선교사들이었다.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일련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 귀착하고 그 원산부흥운동은 2명의 여자선교사들의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원산에서 활동하는 캐나다 장로교 매컬리와 중국에서 활동하다 1900년 의화단(義化團) 사건으로10) 내한한 남감리교 화이트 여선교사는 “자신들과 함께 사역하는 선교사들 가운데 성령이 풍성하게 임하도록 함께 모여 기도하곤 했다.”11) 이들이 시작한 기도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2명의 여자 선교사들은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하디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3편의 강의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1903년 여름12) 캐롤(A. Carroll), 노울즈(Mary Knowles), 하운셀(Josephine C. Hounshell),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의 매컬리 등 원산의 여선교사들은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의 제의로 그해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 동안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으로 성경공부 겸 기도회를 가지며 주의 은혜를 간구했다.13) 성령충만한 하디가 외친 요한복음 14장 12절과 14절, 15장 7절, 6장 23절에 근거한 3편의 강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Faith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섬”(Abiding in Christ), “오순절의 경험”은 그 현장에 참석한 원산주재 여자 선교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주었다. 비록 불과 7명의 여자 선교사들이었지만 하디의 메시지를 통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이들은 하디와 함께 원산부흥운동을 원산이라는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일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 하디가 증언한 대로 이 기도회는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곧 그 불은 하디를 통해 원산을 넘어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03년 하디는 이렇게 보고했다:
 
“1903년 8월에 원산의 카나다 장로교 선교회와 남감리교 선교회는 한 주간 연합사경회와 기도회를 시작했다. 원산 지역 선교회 소속 선교사 외에 중국의 화이트 선교사와 하운셀 선교사가 우리와 함께 했다. 하나님께서 죄의 확신과 성결의 권능 가운데 임재 하셨으며, 이 기도회의 직접적인 결과로 몇 주후에 부흥이 시작되어 수년 동안 한국전역을 휩쓸었다.”14)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1931년 한국선교 50주년이 임박한 그 때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알려진 하디는 감리교 신학지 <神學世界> 사설에서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시발은 2명의 여자선교사들의 기도에서 시작되었다며 이렇게 증언한다.
 
“...아는 사실에 의하면 一九0三년 조선교회 부흥의 불길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두 여선교사가 연합하야 기도하는 중에서 시작되엿다.”15)
 
모든 사람들이 하디를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지목하고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 하디가 원산부흥의 시발이 2명의 여자 선교사의 기도에서 시작되었다는 고백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다. 이 같은 고백은 하디의 겸손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2. 대부흥운동의 동참자, 한국 여성들
 
여인은 대부흥운동의 발단에서만 아니라 대부흥운동의 진행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인들이 자신의 죄악을 토로하고 회개하며 부흥의 불을 지폈다. 여인들이 대부흥운동에 직접 동참함으로써 대부흥의 주역으로 쓰임받은 것이다. 여인들은 남성들과 동등하게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다. 마치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리고 오순절운동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처럼 한국교회 역시 대부흥운동 진행 과정에서 여성들이 부흥을 경험한 것이다. 한국교회 대부흥운동 과정에서 여성들이 큰 은혜를 경험한 구체적인 기록들은 참으로 많다. 그중의 하나가 1904년 4월 하디가 인도한 집회다. 하디는 전국으로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는데 그 때마다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수반되었다. 하디가 여러 여자학교에 가서도 집회를 인도했을 때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임했다. 다음은 한 집회에서 여성들 가운데 일어난 성령의 역사이다:
 
말씀은 예리하고 능력이 충만하여 심령을 쪼개었으며, 그리고 놀라운 방법으로 확신을 주었다. 그래서 교사가 표현한 대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여학생들이 회심했고, 과거 그리스도인들이었던 이들이 영적으로 깨어났으며 몇 사람은 성령을 받았음을 고백했다.두 명의 교사들이 회심하고 후에 교회를 다녔다. 여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이 또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의 사환들과 조사들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부흥회가 끝난 후 우리가 학교를 개강했을 때 여학생들은 ‘이것은 새로워진 학교다’라고 말했으며, 그리고 실제로 학교가 새로운 학교가 된 것 같았다.16)
 
여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하운셀 선교사는 하디로 인해 자기가 시무하는 여학교에 임한 성령의 역사야 말로 “올해 우리와 우리 학교에 베푸신 하나님의 모든 선물 가운데 최고의 선물”이라고 증언했다.17)
한국인 여성들이 성령의 은혜를 직접 체험하면서 영적인 눈을 뜨기 시작했고, 한국에 파송된 여자 선교사들은 왜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이유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04년 10월 하디가 인도하는 집회에 있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보고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성령의 능력이 놀랍게 나타났다. ... 전도부인, 성경반 지도자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이 각성을 하고 한 차원 높은 기독교 삶으로 인도되었다. 배재학당에 다니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새 삶을 시작했다.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의 삶에 있어서의 변화는 그들의 심령에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를 증명해 준다.부흥회 결과 학생들은 한국인 교사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그의 예배(섬김, service)에 대한 새로운 헌신으로 새해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우리 한국인들의 심령에 이와 같은 결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연합하여 간절히 기도한 결과라고 확신하며, 그리고 우리는 한국 친구들이 아직 더 큰 “소나기 같은 축복”을 위해 함께 기도하기를 희망한다.18)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이들 가운데 “성서부인”이라 불리던 전도부인을 성경반 지도자들, 주일학교 교사들과 나란히 언급하고 있고, 이화학당 여학생들은 배재학당 학생들과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이화학당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활동했던 페이니(Josephine Ophelia Payne)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정동교회에서 하디 박사가 인도한 일련의 집회 동안 여학생들 가운데 성령의 은혜로운 부으심(a gracious outpouring of the Spirit)”19)의 역사가 나타났다. 로이드 존스 말대로 부흥은 성령의 주권적인 부으심인데 대부흥동 기간 동안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성령체험을 한 것이다.20) 그 현장에 있던 선교사들은 한국인 남성들과 여성들이 동일한 회개의 역사를 체험했음을 주목하고 있다. 다음 케이블의 보고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말씀 선포에는 성령의 대단한 능력과 증거가 나타났으며, 무시무시한 죄성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의 능력이 나타났다. 설교가 계속되면서 죄의 통회가 너무도 강해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일어나는 바람에 심지어 하디 박사의 집회 인도가 방해받았다. 나는 결코 전에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 하나 둘씩 일어나 그가 혹은 그녀가 행한 모든 죄악된 것들을 낱낱이 열거하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착했던 한 여인이 일어나 그녀가 계속해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한 남자와 거의 1년이 넘도록 함께 동거했다고 고백했다. 그 남자 또한 이 여인과 함께 동거했음을 고백하였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부흥회가 끝나고 그 둘이 결혼했다.21)
 
우리는 “그가 혹은 그녀가 행한 모든 죄”라고 언급한 부분을 주목한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성령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셨음을 보여준다.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은 성령의 주권적인 임재 앞에 남녀가 동등한 회개를 체험할 때 가능한 것이다. 여인이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 곧 사회로부터 매장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 시대 여인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 여인의 죄의 고백을 교단의 기관지에 기록한 것은 여성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 회개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흥과 관련하여 남녀를 평등하게 언급한 것이 선교사들의 보고와 서신에게 자주 나타난다. 1904년에 개최된 “평양에서의 특별전도 집회”22)를 기술하면서 그 현장에 있던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Samuel A. Moffett)은 “여성들을 위한 오후 예배와 남성들을 위한 밤 예배”를 들렸고 엄청난 수확이 있었다고 증언한다.23)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어쩌면 더욱 민감하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여인들 스스로가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 같은 모습을 보면서 남자들의 시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자들의 부속물로 여자들을 생각하던 그 시대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여성들에 대한 호칭의 변화다. 당시 감리교 기관지 신학월보는 여성들을 남성들과 나란히 그것도 “형제자매”라는 용어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정동 감리교회에서 9일 동안 하디가 “회개하난 문제를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증거해 “여러 형졔 자매들이 성신의 책망하심을 밧아 일쳬 회개하고 죄를 자복한 후 사유하심을 밧앗스며 한 주일 동안에 난 성신의 책망하심을 가지고 열심히 젼도하매 죄 사유함을 엇은 모든 형졔 자매들이 성신의 츙만하심을”24) 얻었다고 보고한다. 필자가 알기로는 “형제자매”라는 말이 처음으로 한국교회 안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남성이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처음 이 용어를 필자가 발견했을 때 깜짝 놀랐다. 여성들이 부흥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등한 인격자라는 인식을 한국 남성들이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남녀를 동등하게 만들어 준 것처럼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이 이 땅의 여성들을 남성들과 동등한 존귀한 존재로 인정받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3. 1907년 평양대부흥에서 여성의 역할
 
대부흥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한 마디로 결정적이었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평양장대현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이 발흥했을 때 그 현장에는 남성들만 있었다. 장소가 협소하여 별도의 장소에서 집회를 갖고 있던 여인들은 깊은 도전과 자극을 받았고25) 이어 가진 집회에서 그녀들도 동일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다. 1월 17일 목요일 저녁부터 1월 19일 토요일 저녁까지 삼일에 걸쳐 진행된 기간 중 특별히 19일 토요일 저녁 여인들이 죄에 대한 탄식과 통회와 비탄에 젖어 울부짖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26)
집회를 인도하였던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경험한 바 있는 그 똑같은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가 남성들에 이어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감격과 기쁨을 금치 못했다.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여기에 동참하려는 한국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악들을 토로하게 하셔서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이 이들을 사용하시기 위해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시켜 주셨던 것이다.
선교사들 모두에게 큰 걱정과 슬픔을 안겨 준 한 젊은 여인이 드디어 토요일 저녁 마치 심장이 터질 듯하여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고꾸라져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울부짖었다. 성령께서는 백의민족 한국인들을 자신들이 좋아하는 색깔처럼 순수하고 진정한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사용하시기 위해 거기에 걸맞게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를 숨김없이 토로하도록 강권적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27) 그토록 민족이 신음하고 있던 그 때 강한 영적 각성이 나타난 것이다. 너무도 판에 박힌 것 같은 통회와 자복과 눈물과 회개의 역사는 평양 대각성운동의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유일한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28) 은혜를 받은 이들이 다시 시내로 흩어져 불신자들을 저녁 전도 집회로 인도했고, 그들 가운데 “수백 명이 그리스도를 믿었다.”29) 그 결과 평양은 교회마다 모여드는 이들로 넘쳐났다.
평양대부흥은 결혼한 여성들에게만 아니라 여학생들 가운데서도 강하게 임했다. 1월 15일 평양숭덕학교를 비롯한 남학교 학생들 가운데서도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는데 그 다음날 여학생들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한 것이다. 1월 16일 수요일 아침, 평양숭의여학교(Advanced School for Girls and Women)에서도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30) 1월 14일과 15일 저녁 장대현교회 사경회 저녁 집회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여학생들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은 은혜가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했고, 그들의 기도는 그대로 응답되었다.
1월 16일 수요일 아침 아이오와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파송되어 선교 활동하고 있던 스눅(Velma L. Snook) 여선교사는 평상시처럼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숭의여학교에 출근했다.31) 1889년부터 1900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다 1900년 1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에 거점을 마련하고 1903년부터 숭의여학교 교장을 맡은 스눅 양은 여학생들의 경건훈련과 영적 각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왔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첫 수업이 있은 후 10시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나 그날 아침 예배는 여느 날과 달리 어떤 일정한 순서로 진행된 예배가 아니었다. 간단한 설교와 기도가 있은 후 몇몇 소녀들이 통회하자 곧 그곳의 모든 여자들이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수요 집회는 기도와 눈물과 참회만이 그 온 실내를 가득 메운 가운데 12시 이후까지 계속되었다.32) 이날 오전 내내 여학생들은 수업은 안중에 없었고 오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 조지 매큔은 아더 브라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스눅 양은 바로 오늘 아침 성경을 읽은 후 기도를 시작하자 한 젊은 여학생이 일어나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어 나머지 다른 여학생들도 일어나 똑같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오전 전체를 기도와 죄의 고백으로 보냈습니다. 스눅 양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것을 약속하면서, 점심때가 되어 오후 1시에 모임을 마쳐야 했다.33)
 
한 선교사는 1907년 1월 16일 여학생들 가운데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보고하면서 이렇게 기술한다. “약 80명의 여학생이 등록한 여학교 또한 대단한 축복을 받았다. 여기서는 3일 동안 아침 10시에 열리는 아침 기도회 후 수업은 생략하고 기도와 죄의 고백에 전념했다. 이 여학생 집회는 신실한 회개로 특징지어진 집회였다. 그들은 때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런 후 교실을 가로질러 자신들이 범한 몇몇 사람들의 손을 잡고 용서해 줄 것을 요청했다.”34)
다음날 1월 17일 목요일 아침, 성령의 역사가 여학교에서 계속되었다. 선교사 가운데 몇 사람이 그 학교 교실에 가까이 갔을 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선교사들은 그곳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임재 하였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베스트가 즉시 그들을 돌보기 위해 내려갔고, 이 학교에 무엇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번하이셀 여사가 여학교로 달려갔다. 이미 열기가 달아오른 터에 번하이셀 여사가 여학생들에게 간단하게 말씀을 전하자마자 그들은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다.35) 이렇게 해서 1907년 1월 사경회에 참석한 여성들 그리고 평양 시내 여학교에 재학하는 소녀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다.
1906년 가을부터 곡산 지역과 그레함 리의 정화 지역을 중심으로 두 번에 걸쳐 긴 전도여행을 다녀온 매큔은 1907년 4월 코리아 미션 필드에 “이 여행에서 나는 지방 사경회 동안 평양에서 있었던 놀라운 축복이 이곳까지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36)며 이렇게 보고했다:
 
나는 59명을 세례 문답했는데 그들 각 사람은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 죄인이었다. 이들 남녀들은 주일예배 동안 일어나 깊이 통회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고, 그중의 몇은 심하게 통곡했다. 이들 남녀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들을 향한 그의 희생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 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이 상상할 수 없는 것-생짜 불신자가 몇 주 교회에 참석한 후 죄의 고백으로 통회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을 목도하고 있다.37)
 
위 기록에서 보듯이 대부흥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남자와 여자,” “남녀”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III. 여성: 대부흥운동의 최대 수혜자
 
여성들이 대부흥운동의 주역이면서 동시에 대부흥운동의 최대의 수혜자였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이 단순히 개인의 영적각성에 그치지 않고 사회각성과 사회개혁으로 이어지면서 여타 사회 문화적 변혁과 더불어 여성들의 지위가 놀랍게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비약인지 모르지만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의 여성들이 비로소 한 인격자로 존중받기 시작했다. 한국 여성은 동방의 여느 나라처럼 자신들의 권리를 상실한 채 마치 남성의 부속물처럼 살아가고 있었다.38)
대부흥운동 당시 한국의 파송된 여자 선교사는 당시 남자들 95%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고 여성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해 “모든 여성들이 읽고 쓸 줄 몰랐다”고 증언한다. 심지어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소(牛)정도 가르치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여성들의 지위는 인도의 여성처럼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여성들을 위한 학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극심해 여자 아이 출생은 저주였고, 남자 아이 출생은 축복으로 생각하였다. 여자는 남편의 종으로 남편을 기다리고 그의 아들을 출생하는 존재며 만일 그 일에 실패한다면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일반이었다. 남편될 사람의 사진을 미리 보고 결혼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는 것은 결혼 후 첫날밤을 지나면서였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녀에게는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불신의 가정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에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여성 혁명의 시대를 맞았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은 즐거움과 잔치가 벌어진다. ... 그러나 여자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것은 저주였다! 그녀의 출생은 태어난 아이가 단지 남자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의 가엽은 어머니는 능욕을 당해야 했다. 태어난 딸에게는 이름을 지어줄 가치조차 없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첫째” “둘째” 아니면 “얼룩 강아지”라고 불렸다. 여인들에게는 밝은 가정생활도, 교육도, 공손한 대접도, 새로운 가정이 들어 올 때도 환영도 없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결혼하는 날 처음으로 본다. 그녀는 단지 그를 기다리고 그의 아들을 낳아주는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그의 종에 불과하다. 만일 그 일에 실패하면 경멸 가운데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녀에게는 결코 저항의 말이나 배상(위자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 것도 알거나 생각하거나 말하지 못하고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 같은 방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이 수세기의 옛 습관을 허물어뜨리고 한국인들에게 선하고, 달콤하고, 이타적인 기독교 가정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기적이다. 아니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그렇게 하신 주체와 완성자는 바로 거룩한 그분이지 않는가?39)
 
기독교 신앙은 한국 교회에 남녀평등 사상을 저변 확대시켜 여성 교육의 필요성과 정상적인 결혼관을 강화시켜 주었다.40) 선교사들은 지방 순회를 하면서 한국인들이 영적 각성운동을 거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정상적인 결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첩을 거느리거나 조혼을 금했고, 부모에 의한 정략결혼도 금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결혼 적령기의 젊은 남녀가 자신의 배우자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41)
한국인들은 보통 자신의 자녀를 위해 자녀가 12세 가량 되었을 때 자녀의 배우자를 미리 선택하였다가 후에 결혼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지만 부흥운동은 젊은이들에게 결혼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평양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20세 된 한 젊은 학생은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모는 한국의 관습에 따라 그가 12세 때 그를 위해 한 아내를 택하지 않아, 그에게는 결혼 상대가 없었다. 이 젊은이는 평양신학교에 다니는 한 신학생 조사가 소위 결혼할 “약혼자”를 정하지 않은 18세의 훌륭한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형님과 함께 그를 찾아가 그의 딸과 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드디어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한 그는 청혼의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리고 여자의 의사를 타진했다.
당시 일반적인 사회적 풍토는 보통 부모가 동의하면 그것으로 결혼은 약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녀의 충분한 동의를 얻은 후 결혼 여부를 확정지으려고 했던 것이다. 드디어 그녀의 “승낙을 받아낸 그는 어느 토요일 오후 그녀의 아버지 집을 방문해 그곳에서 주일에 그녀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고 곧 있을 행복한 사건에 관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42)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것은 그 당시로서는 보통 사회에서 행하던 결혼풍습을 넘어서는 대단한 변화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당시로서는 드문 현상이었지만, 여자를 남자의 부속물 정도로 생각하던 그 시대에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동반자로 자리 매김하는 출발점을 제공해 주었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교육의 기회와 복음의 기회를 제공했고, 한국 여성들도 자신들에게 그와 같은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기를 열망했다.43)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사모하는 분위기는 부흥운동을 지나면서 더욱 증대되었다. 북감리교 선교사 스위러가 맡고 있던 공주에서만 6,000명의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44) 로빈스 여선교사가 운영하는 평양의 여학교에만 300명 이상이 등록하였다는 사실이 당시 여성의 변화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1907년 6월 북감리교 연회에 노블이 보고한 대로, 당시 한국의 “부모들이 자기 딸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혁명이었다.”45) 이와 같은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복음 앞에서 남녀가 결코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교육에 있어서도 남녀의 차별이 존재할 수 없다는 분명한 확신이 처음부터 선교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져 온 결과였다. “오직 남ᄌᆞ만 텬당에 가ᄂᆞᆫ 거시 아니오 녀인도 ᄀᆞᆺ치 가ᄂᆞᆫ 거시니 대개 남녀 업시 다 텬부님의 ᄌᆞ녀”46)이기 때문에“ 남ᄌᆞ를 힘써셔 ᄀᆞᄅᆞ치ᄂᆞᆫ 것과 ᄀᆞᆺ치 녀교인도 교육ᄒᆞᄂᆞᆫ 거시 긴요”47)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인천에서 사역하던 감리교의 케이블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한국 녀인은 글ᄌᆞ를 아ᄂᆞᆫ 이가 일천 명 즁에 불과 두 사ᄅᆞᆷ”48)에 불과할 정도로 여인들의 문맹률이 높았다. 당시 여인들의 교육을 천시하는 풍토는 가히 “셰계에 듬은 니야기”49)였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녀아로 ᄒᆞ여곰 글을 배호지 못하게”하는 것이 성경의 원칙과도 어긋난 이 나라의 “한 악ᄒᆞᆫ 습관”이라며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먼저 “녀아회ᄅᆞᆯ 맛당히 몬져 갈아칠” 것을 촉구했다.50)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우처 목사는 부흥운동이 한창 한국을 휩쓸고 있던 1907년 6월 18일부터 열린 감리교 연회에서 여자들도 학교에 보내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51)
여인들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동등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며, 교회에서의 그들의 역할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기독교 정신은 전통적인 동양사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종의 혁명이었다.52) 수백 년 전부터 여성이 왕위에 올라 한 나라를 다스리던 영국이나 다른 유럽과 구미의 여성의 위치에 비추어 볼 때 당시 한국 여성들의 위치는 그야말로 남자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고, 일종의 종이나 마찬가지였다.53)
1898년 게일이 <코리안 스케치>에서 말한 것처럼, “아내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까지 가족의 한 가계(家系)를 도와주는 생명 없는 존재에 불과하였다.”54) 1908년 6월 코리아 미션 필드에는 당시 여성들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는 “한국의 소녀와 여성”이라는 글이 실렸다:
 
아내는 며느리에게 그 단조로운 일의 얼마를 넘겨 줄 수 있을 때까지 단지 단조롭고 판에 박힌 일을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30세에 그녀는 50세처럼 보이고 50세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조로(早老)하여 일찍 늙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 일, 일이다!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고, 그녀의 삶이다. 삶은 이들 여인들에게 힘들고, 문명화되지 않은 도구들과 원시적인 일의 방식 때문에 더 힘들다. 한국에는 공장도 없고, 제분 혹은 곡식을 빻는 방앗간도 없어 여인들의 노동을 덜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녀들은 논밭의 곡식을 취해 곡물의 겉껍질을 벗기고 무거운 도리개로 타작한다. 그런 후 특별한 경우 매일 양식이 아닌 떡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가 필요하면, 타작한 것을 또 맷돌로 갈거나 묵직한 나무 절구통 혹은 돌절구에다 가루로 빻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아내의 일이다. 반면 그녀의 주인인 남편은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그의 바지와 저고리는 흠 하나 없이 하얀데, 그렇게 되기 위해 아내가 쉬지 않고 수고를 해야 한다. 남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 외에는 자기를 낮추어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55)
 
외국인의 눈에 비친 위와 같은 한국 여인들의 모습은 어느 특정한 여인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여인들이 갖고 있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56) 한국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덕분이다. 그리고 부흥운동은 이와 같은 변화를 촉진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1906년 봄, 강화를 방문한 케이블 부인은 “이전보다 여학교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으며, 심지어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딸의 교육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57)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여성의 위치를 주제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보통 힘든 상황이 아니었지만, 선교사들은 사경회 기간을 이용하여 교회의 집회를 이용해 이와 같은 주제를 토론의 주제로 삼기도 했던 것이다.
1906년 봄, 케이블 부인은 지역 남녀 신앙인들의 월례회(the District League) 때 경건회가 끝난 후 남녀가 남성들이 “가정의 평화와 관련하여 여성들과 상의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풀어 보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 찬성자들이나 반대자나 남녀 모두 이 토론에 열심히 참여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모두 다 여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한국의 여권(the womanhood)을 한 걸음 더 신장시킨 것이다.”58)
이것은 당시 기독교 남성들이 여타 비기독교인 남성들보다 여성에 대해 더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남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기독교 정신이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한층 더 높여 주었다. 이 같은 여권신장은 복음이 닿는 곳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한국에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었다.59) 따라서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기독교 신앙은 그들이 여전히 가정과 사회에서 남자와 같은 대우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남자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심어 주었던 것이다.
특히 부흥운동은 여성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공주 지역을 맡고 있던 스위러 선교사는 자신이 맡은 지역에서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육열이 대단히 높아진 것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에게 신앙과 도덕 교육을 시켜 줄 것과 자신들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우리는 이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훈련된 교사들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 이 일과 관련하여 한 가지 고무적인 특징은 한국인 스스로 학교 운영비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자금을 모금할 수 있든 없든 그들은 학교 설립을 원하고 있다. 지금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우리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이다.60)
 
선교사들과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자녀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교육이야말로 “능히 나라와 ᄇᆡᆨ셩을 이롭고 편ᄒᆞ게”61) 하고, 나라의 “부강의 긔초”가 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켜 주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볼 때 자녀 교육은 이 민족을 향한 시대적인 사명이었다. 그들은 자녀 교육의 필요성을 권면하여 듣지 않으면, 외국처럼 부모들에게 벌금을 물리게 해서라도 자녀들을 교육시키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부모들에게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임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62) “ᄌᆞ녀를 교육ᄒᆞᄂᆞᆫ 거슨 부모의 ᄎᆡᆨ임이라. 그러나 부친은 ᄒᆞᆼ샹 ᄉᆞ무를 인ᄒᆞ야 죵일토록 밧게 잇고 모친도 ᄯᅩᄒᆞᆫ 집안 일에 분쥬ᄒᆞ야 교육을 온젼히 힘쓰기가 어려운 고로 교ᄉᆞᄂᆞᆫ 그 부모 ᄃᆡ신에 그 의무를 ᄒᆞᆼᄒᆞ는 자라.”63)
교육에서 있어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녀가 균등하게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청소년들이라면 소년 소녀 모두 교육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64) 부흥운동을 통해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의식이 증대되면서 각종 학교의 설립 움직임이 자연히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65)
그 결과 여성들도 교육의 기회를 갖기 시작했다. 특별히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사모하는 분위기는 부흥운동을 지나면서 더욱 증대되었다. 북감리교 선교사 스위러가 맡고 있던 공주에서만 6,000명의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66)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교회의 태동과 정착 과정에서만 아니라 대부흥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메리 스크랜톤이나 로제타 셔우드 홀 같은 여자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대변하듯 여성들의 희생과 헌신은 한국교회를 태동시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대부흥의 발단과 전개 과정에서도 여인들이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최대의 결실을 향유한 주인공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 대부흥운동 과정에서 여성들은 처음부터 주역이었고 또한 그들은 대부흥운동의 최대의 수혜자들이었다.
2명의 여자 선교사 화이트와 매컬리가 시작한 기도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하디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배화학당, 이화학당 등 많은 여학생들과 여성들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평양대부흥운동 기간 동안에 여성들과 평양의 여학교 재학생들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부흥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여성들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남성들과 동등하게 경험하면서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두르러진 것은 남성중심의 사건 기술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나란히 등장하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녀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상징하는 “형제자매”라는 표현이 이미 지금부터 100년이 더 넘는 1904년 경의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미 대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여성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여성들의 지위가 놀랍게 향상되었다. 전통적인 결혼관이 무너지고 여성의 입장을 존중하는 결혼관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1부 1처제가 정착되면서 정상적인 결혼관이 새로운 사회관습으로 형성되기 시작하고, 여자들도 아들과 똑 같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받기 시작한다. 이미 전도부인을 통해 여성들의 역할을 증대되다 대부흥운동으로 교회에 여선교회가 조직되면서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리더쉽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여학교, 여자의학교, 간호학교에서 배출된 여성들이 사회에서 뚜렷한 직업을 갖고 사회의 한 몫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도 대부흥을 거치면서였다. 지금까지 이름 갖지 못하고 천대받던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 볼 때 한국교회 대부흥이 개인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각성과 사회개혁으로 이어져 놀라운 사회개혁이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기시작하면서 여성의 지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은 대부흥운동의 주역이자 또한 최대의 수혜자였다.(*)
 
 
[후주]
1) Charles August Sauer, Methodists in Korea 1930-1960 (Seoul: CLS, 1973), 13; George Heber Jones, 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New York: Cincinnati: Jennings and Graham, 1907), 68-70.
2) 아들 윌리엄 스크랜톤이 개원한 정동병원은 시병원으로 개명하여 큰 발전을 이루었고 1887년에는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 보구여관을 설립했다. 오늘날 이화대학 부속병원의 전신이다. 스크랜톤은 정동시병원을 구리개(상동)로 이전하고 1892년 상동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3) M. F. Scranton, “Woman’s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Jan., 1896), 5.
4) Ibid., 5, 6.
5) 윤경로, “1900년대 초기 장로교회의 치리와 초창기 교인의 사회 경제적 성향”, 한국기독교와 역사(1991. 7), 101.
6) Samuel Hugh Moffett, The Christians of Korea(New York: Friendship Press, 1962), 159. 1887년에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의한” 의료 사역이 감리교 선교부의 여성분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해 12월에는 현재의 아현동에 시약소를 개설하여 3년 동안 환자들에게 약을 공급했다. 1886년 가을 감리교 여선교사 하워드가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 보구여관(保救旅館)을 개설하고, 셔우드(Rosetta Sherwood)와 함께 3년간 약 5,500명의 가난한 여인들을 치료해 주었다.
7) E. M. Cable, “Beginning of Methodism in Korea,”in Within the Gate, ed. Charles A. Sauer (Seoul: The Korea Methodist News Service, 1934), 15; Jones, 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83. 5개월 된 셔우드 홀을 안고 평양에 도착한 로제타 셔우드 홀은 평양 도착 첫 날 1,500여 명의 평양 사람들이 외국 여인과 아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바람에 곤혹을 치러야 했다. 이들은 항간에 떠도는 것처럼 서양 여인과 아이가 정말 귀신같이 생겼는지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8) 로제타 셔우드의 아들 셔우드 홀도 토론토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인 아내와 함께 황해도 해주에 결핵요양원 구세병원을 설립하여 결핵퇴치에 일생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실을 만들어 한명이라도 더 치료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9)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첫 한국인 의사가 된 박에스더는 1900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19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Rosetta Sherwood Hall과 함께 한국의 의료 발전에 큰 공헌을 이룩했다. George Heber Jones, 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New York: Cincinnati: Jennings and Graham, 1907), 72-73.
10) 의화단 사건(Baxer Outbreak)은 독일이 1897년 12월에 일어난 두 명의 천주교 신부 살해사건을 빌미로 칭타우(靑島)를 손에 넣고 엄청난 배상을 요구며 산동성 내륙의 상업적 조차지(租借地) 설치를 강요하자 이에 대항하여 중국의 비밀결사조직 의화단이 들고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135명의 선교사와 53명의 자녀, 35명의 천주교 신부와 9명의 신부가 살해당했다. Canadian Presbyterian Mission, A Quarter Century in North Honan 1889-1913(Shanghai: Printed at The Presbyterian Mission Press, n.d.), 3-4; John Ross, Mission Methods in Manchuria(Edinburgh and London: Oliphant Anderson & Ferrier, 1908), 252-274.
11) R. A. Hardie, “God’s Touch in the Great Revival,” KMFX: 1 (January, 1914), 22-25.
12) Ibid., 22-25.
13) Official Minutes and Reports of the Annual Session of Korea Mission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3, 26, 53, 57.
14) Ibid.
15) 하리영, “사설,” 신학세계 (1931년 1월), 3.
16) Ibid.
17) Ibid.
18) “Revival Meeting in Seoul,” KMI : 1 (Nov., 1904), 8. 같은 내용이 다음 문헌에도 나타난다. L. E. Frey, “Ewa Haktang-Seoul,” The Annual Report of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5, 5; “Revival at Ewa,” KMFII: 7 (May 1906), 133.
19) “Miss Payne,” KMFⅥ:1 (Jan., 1910), 15.
20) E. M. Cable, “Another Wonderful Revival,” KMⅠ: 2 (Dec., 1904), 11.
21) Ibid., 12.
22) Quarto Centennial Papers Read Before the Korean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at Annual Meeting(Pyung Yang, Korea: Korea Mission of PCUSA, 1909), 21.
23) Ibid.
24) “졍동회당에셔 부흥회로 모힘,” 신학월보, 1904년 11월, 427.
25) George McCune, Letter to Dr. Brown, Jan., 15, 1907.
26)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36.
27) Annual Report, PCUSA (1907), 28-29.
28) Ibid., 28.
29) Ibid., 30.
30) Ibid.
31) Graham Lee, Letter to Dr. Brown, Jan., 17, 1907.
32) Ibid.
33) George McCune, Letter to Dr. Brown, Jan., 15, 1907.
34) W. L. Swallen, Letter to Dr. Brown, Jan., 18, 1907.
35) Graham Lee, Letter to Dr. Brown, Jan., 17, 1907.
36) G. S. McCune, “Ever Extending Blessings,” KMFⅢ: 4 (Apr., 1907), 54.
37) Ibid., 53-56.
38) Homer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New York: Doubleday, Page & Co., 1906), 349-371.
39) Jennie Fowler-Willing & George Heber Jones, The Lure of Korea(Boston: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Methodist Episcopal Church, n. d.), 12-13.
40) James Dale Van Buskirk, Korea: Land of the Dawn(New York: Missionary Education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31), 155-161.
41) Daniel L. Gifford, Every-Day Life in Korea(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898), 70-75.
42) Moore, “The Great Revival Year,” 120.
43) 1910년 현재 평양 숭실여학교에는 162명의 여학생이 재학하고 있었고, 그중 46명이 감리교인이었다. Sauer, ed., Within The Gate, 84-95, 특히 93.
44) Minutes of Korea Mission,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7, 63.
45) Ibid., 54.
46) “녀인의 교육,” 신학월보, 1907년 1월, 8.
47) Ibid.
48) 케불, “셰계에 듬은 니야기,” 그리스도 신문, 1906년 6월 14일, 557.
49) Ibid.
50) 사설, “녀아회ᄅᆞᆯ 맛당히 몬져 갈아칠 일,” 신학월보, 1904년 7월, 285.
51) “유명ᄒᆞᆫ ᄆᆡ년회,” 신학월보, 1907년 제 2호, 90.
52) Moose가 적절하게 관찰한 것처럼 당시 한국인들 가운데는 남성 우월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J. Robert Moose, “The Present Situation,” KR(November 1905), 402.
53) 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rs(New York: Fleming H. Revell Co., 1897), 338-343.
54) James S. Gale, Korean Sketches(New York: Fleming H. Revell Co., 1898), 175.
55) “Girls and Women in Korea,” KMFⅣ: 6 (Jun., 1908), 82.
56) Gifford, Every-Day Life in Korea, 46-70.
57) Mrs. E. M. Cabel, “More Progress Than We Had Ever Hoped,” KMFII: 7 (May 1906), 138. cf. James Dale Van Buskirk, Korea: Land of the Dawn(New York: Missionary Education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31), 184-185.
58) Ibid.
59) 이와 같은 여성의 권익 신장은 기독교 전파에 여성들이 중요한 기여를 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Bible Women,” KR(March, 1906), 140-147.
60) Minutes of Korea Mission,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7, 60.
61) “쇼학교육의 요지,” 예수교 신보, 1908년 11월 15일, 198.
62) Ibid.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가정의 부모들에게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 소학교 교육이 나라와 백성을 이롭고 편하게 하고 문명의 기초가 되는데도 “자녀를 공부시킬 줄 알지 못하는” 어떤 이들이 있다며 “자녀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63) Ibid.
64) Minutes of Korea Mission,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7, 54.
65) H. D. Appenzeller, “Fifty Years of Educational Work,” Charles A. Sauer, ed., Within The Gate(Seoul: The Methodist News Service, 1934), 84-95, 특히 92-93을 보라. cf. Horace Horton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New York: International Press, 1926), 46, 39-110, 149-188. 위 책은 1913년부터 1923년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1903년부터 1910년 사이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과 학교설립이 증가했음을 보여 준다.
66) Minutes of Korea Mission,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7, 63.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7.12.14 12:41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