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교회사학 제6권 제1집 (2007): 83-138

웨일즈 대 부흥운동(The Welsh Revival) 1904-1905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회사학 제6권 제1집 (2007): 83-138
 
목차
1. 웨일즈 대부흥운동의 발흥
2. 웨일즈 대부흥의 확산
3. 웨일즈 대부흥의 특징과 성격
4. 웨일즈 대부흥의 영향
맺는말
 
1904년과 1905년에 발흥한 웨일즈 부흥운동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가장 강력한 성령의 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17세기부터 영적각성운동을 여러 차례 경험한 웨일즈 교회가 20세기에 막 접어들면서 또 다시 강력한 부흥을 경험한 것이다.
웨일즈 부흥운동은 당시 영미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사실,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사회개혁이 수반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모든 것보다 현대 영적각성운동의 역사에서 웨일즈 부흥운동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그 부흥운동이 인도와 한국의 부흥운동을 필두로 아프리카, 호주, 미국, 중국에 이르기까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부흥운동의 진원(震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웨일즈 대부흥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본고에서는 앞으로 좀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을 희망하면서 웨일즈 대부흥운동의 발흥 배경, 발흥, 확산, 성격, 그리고 영향을 중심으로 웨일즈 대부흥운동을 역사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1. 웨일즈 대 부흥운동의 발흥
 
1) 웨일즈 부흥운동의 영적 토대
 
1740년대부터 조지 휘필드, 하웰 해리스, 다니엘 로랜드 등 칼빈주의 감리교도들의 활동으로 강력한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난 웨일즈 지역은 1859년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고, 다시 1904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1859년 부흥의 열기가 시들면서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이 발흥하기 직전의 웨일즈의 영적상황은 참으로 비참했다. 1871년 남부 웨일즈 지방, 1887년 서부와 북부 카마던(Camarthern), 1890년 글래스모건셔의 상류 가어샐렘(Caercalem), 그리고 Richard Owen을 통해 북 웨일즈에 나타난 영적각성이 말해주듯 1859년 이후에도 간헐적인 때로는 강도 높은 부흥의 조짐이 나타났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신학적, 종교적, 사회적 변천은 웨일즈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 다윈의 진화론, 고등비평, 심리학의 출현은 웨일즈 지방의 신학교와 신학생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로랜드 윌리엄스는 1860년에 시작된 Essays and Reviews 잡지를 주도하면서 고등비평을 웨일즈 지성인들에게 확산시켜 나갔다. 그가 웨일즈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Lampeter College 히브리어 교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한층 강했다. 그 뒤를 이어 자유주의 신학을 선도한 애버딘 대학의 W. Robertson Smith, 진화론과 고등비평을 융합시킨 찰스 고어(Charles Core) 모두 웨일즈의 신학적 변천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37년부터 1852년까지 Bala Theological College 교장을 지낸 루이스 에드워즈(Lewis Edwards), 진화론을 신학에 도입하여 진화론의 원리를 영적가치 기준으로 주창한 웨일즈 출신 David Adams는 웨일즈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 보여주듯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심리학은 종교를 주로 생물학적 반응으로, 회심을 본질적으로 “통상적이고 미숙한 현상”으로 치부해 버렸다.1)
이 같은 현상은 웨일즈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교회를 살려야 할 신학이 교회로부터 생명력을 앗아갔다. 신학적 변천이 웨일즈 교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당시만큼 웨일즈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시대도 드물었다. 신자라고 해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을 깊이 우려한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퀸딜란 존스(J. Cynddylan Jones)는 1902년 총회에서 “교단신학”이라는 설교를 통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깊이 우려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초자연적 존재로 믿으며, ... 성경을 초자연적 계시로 믿으며, ...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분으로 믿는다”2)고 역설했다. 그로부터 2년 전 1900년 6월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에반 필립스 역시 웨일즈의 신학적 변천을 깊이 우려하면서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교회의 신앙이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려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경향에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을 무신론의 방향으로 끌어 들이려는 간과할 수 없는 오류가 분명히 존재한다. 헤겔의 철학과 진화론의 원리가 극단적 형태로 신앙의 영역에 범람하고 필시 가장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고 ... 오류의 영이 공중에 가득하게 되어 소리 없이 인간 지성의 잠재의식에 파고 든 영향은 사람들에게서 살아 계신 하나님,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빼앗고 있다”3)
 
회의적이고 심지어 무신론적인 책들이 신성해야 할 신학계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적지 않은 도회지의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성령의 인격을 부정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계를 정복하고,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이 신학계를 장악하고, 심리학이 인간의 회심을 생물학적 반응으로 치부하고, 문학이 회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사상을 확산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신학적 변천은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급감시켰고,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교회는 더욱 병들어 갔고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성경의 권위를 상실한 설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1890년대부터 웨일즈 교세는 급감하기 시작 1900년까지 불과 10년 동안 12,844명이 감소했다.4) 이것은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비공식적인 통계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치는 더욱 증가했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한 이들은 부흥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에반 필립스는 “부흥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고 강조했고, 1902년 11월호 웨일즈 장로교 월간지 <보고>는 “하늘에서 내리는 성령의 임재만이 그 가라지를 뿌리 뽑고 웨일즈 땅이 무신론과 불신에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5)고 강조했다. 웨일즈의 종교상태를 정확히 읽고 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종교만이 지금 웨일즈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영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이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1902년 12월 <교회의 벗>에서 한 지도자는 만약 “내가 마지막으로 웨일즈 전역에 있는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 나의 조국과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통한 영적 부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6)
바로 이런 상황에서 1904년 성령의 불길이 웨일즈 전역을 휩쓸었던 것이다. 곧 교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전 10시부터 밤늦게 까지 쉴 사이 없이 교회에 모임이 계속되었으며, 교회마다 주일 하루 동안 세 차례 예배를 드렸다. 놀라운 영적부흥이 발흥한 것이다.
모든 부흥운동이 그렇듯이 1904년의 웨일즈 부흥운동 역시 하루아침에 태동된 것이 아니었다.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영적 각성운동의 토양을 제공해준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첫째 케직 사경회이다. 19세기 말 시카고의 무디 성경학교와 영국에서 해마다 케직(Keswick) 사경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하고 돌아온 13명의 웨일즈 인들이 웨일즈에서도 그와 같은 사경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1903년 웨일즈 클랜드린도드 웰스(Llandrindod Wells: Welsh에서 Llan은 ‘클랜’으로 발음하며 ‘교회’를 뜻함)에서 첫 케직사경회가 열리면서 드디어 그들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케직사경회 기간 동안 몇몇 웨일즈 목회자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회개, 변상과 화해, 예수님의 주권, 성화, 성령께 순종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외쳤다.7)
둘째 젊은이들의 기도이다. 1903년에 접어들면서 네 명의 웨일즈 청년들이 매일 밤 웨일즈의 부흥을 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 소식은 전광석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모임에 합류하면서 기도의 열기가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6개월간 매일 밤 기도회를 가졌으며, 매주 주일 저녁에는 특별집회를 열고 웨일즈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주일 저녁 특별집회 때 주께서 응답하셨다. 그 현장에서 모임을 이끌었던 침례교 목사 존스(R. B. Jones)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증언했다.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 집회를 장악하셨으며 위에서부터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압도하셨다. ... 나는 거의 말을 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났다.”8) 특별집회가 열리는 주일 저녁에 성령의 임재는 여러 주간 계속되었고 그 현장에 있던 증인의 고백대로 “그 후 많은 영혼들이 매일 구원받았다. 우리 교회는 오순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 이제 우리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남녀 교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9) 저녁 특별기도회에 참석한 수많은 영혼들이 영적인 재충전을 받거나 회심을 경험했다. 기도회에서 시작된 웨일즈의 부흥의 불길은 “성경과 역사 기록은 기도 없는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루이스 킹(Louis L. King)의 말을 새롭게 환기시켜준다.10)
그 후 부흥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수 주일 동안 존스가 인도한 웨일즈의 앵글시(Anglesey) 섬 집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존스가 이사야 6장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빛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 제단으로부터 정결케 하시는 숯불을 가져다 그들의 더러운 삶에 대실 수 있는지를 설교하자 온 회중이 깊은 죄의식을 느끼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각 개인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성령께서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죄악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존스가 증언한대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찌나 강하게 임하던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그 자신도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그가 서있던 강단이 온통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 차는 바람에 설교자인 자신도 뒤로 물러서서 목사실로 퇴장해야 했다.11)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회중들 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곧 이와 같은 집회는 웨일즈의 여러 곳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그로 인해 웨일즈 남부 및 중부 지방의 여러 교회들 가운데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웨일즈에서는 비록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 강력한 성령운동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특히 청년들이 부흥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12)
셋째 플로리 에반스(Florrie Evans)라는 한 소녀의 간증이다. 1904년 2월 3일 주일 아침 웨일즈 남서쪽 해안휴양지, 카디건셔 뉴키(Cardiganshire, New Quay)에 있는 조셉 젠킨스(Joseph Jenkins)가 시무하는 예배당에서 젊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 모임이 있었다. 기도 모임을 인도하면서 젠킨스는 영적체험을 경험한 자가 있으면 간중하라고 참석자들에게 요청하자 최근 회심한 한 소녀, 플로리 에반스가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구주 예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13) 저널리스트 스테드(W. T. Stead)가 말한 것처럼 그 소녀의 간증은 “마치 그곳에 모인 회중들에게 전기 충격과 같이 역사했다. 하나 둘씩 연이어 일어나 완전히 굴복했고 그 소식은 요원의 불길처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심령들이 주께로 돌아왔다.”14)
이런 가운데 1904년 8월, 두 번째 “웨일즈 케직 사경회”가 열린 것이다. 케직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은 웨일즈의 부흥을 놓고 간절히 기도했고, 웨일즈의 여러 교회들이 부흥의 역시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6개월 간 매일 기도회를 가졌던 웨일즈의 한 교회에서 그해 말 120명이 회심했다. 그해 11월 20일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고 밤마다 기도회를 가진 교회도 있었고, 10주 동안 밤 기도회를 가지며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고 150명이 회심한 교회도 있었다.
넷째 이 과정에서 몇몇 영적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카디건셔 뉴키에서 칼빈주의 감리교회를 담임한 조셉 젠킨스는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것들을 체험”하고 나서 웨일즈의 도덕적 사회적 타락에 동화되어 잠자는 영혼들을 깨우는 일에 전념했다. 조셉 젠킨스보다 웨일즈 부흥의 발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셋 조수아(Seth Joshua)였다. 1891년부터 전진운동에 동참하여 활동해온 셋 조수아는 1904년에 접어들어 초교파 복음전도자로 웨일즈 북부와 남부 지방을 순회하면서 순회전도에 전념하며 웨일즈의 영적각성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웨일즈에 영성보다 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깊은 말씀 연구와 기도생활이 뒷받침 된 그의 순회전도로 웨일즈에 영적 서광이 비추이기 시작했다. 그가 인도한 카디건셔 뉴키 지역의 집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권능이 임했다. 1904년 9월 20일 조수아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부흥의 불길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12시까지 심지어 새벽 1시가 되어서도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수차례 예배를 폐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배가 시작되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틀 후인 9월 22일 목요일 그 강도는 더욱 강했다.
 
“오늘밤 우리는 또 한번 잊을 수 없는 집회를 열었다.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완전히 확신하기를 갈구하면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설교단으로 몰려왔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한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기도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불의 혀가 각 사람에게 내려왔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시간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15)
 
조수아가 인도한 집회에 성령이 얼마나 강도 높게 임했는가를 말해준다. 이어 그가 부흥의 불을 가지고 간 것은 존 필립스가 교장으로 있는 뉴캐슬 에믈린 예비학교였다. 25일 월요일에 시작된 이 집회는 처음 냉랭하다 27일 화요일 저녁부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날 조수아가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대로 “오늘 저녁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 몇몇 학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자신의 구원을 고백했다. 주님께서 이곳을 감동시키실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속에 그런 갈망이 있었다.”16) 그 다음날 그 강도는 더욱 강했다. “내가 설교하기보다 성령께서 이끄는 대로 말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도록 그들을 권면했다. 이것에 앞서 성령의 불이 그들 모두를 크게 감동시켰다. 그들의 영혼이 녹아 내렸으며 많은 사람이 소리 높여 구원을 간구했다. 이 예배로 말미암아 주님께 찬양하리로다.”17)
 
2) 에반 로버츠의 회심
 
이와 같은 영적각성의 움직임 속에서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 에반 로버츠가 등장한 것이다. 1904년 후반 성령충만을 경험한 26세의 젊은 청년 에반 로버츠가 혜성처럼 등장한 후 부흥의 불길이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웨일즈 전역에 솟아올랐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모리아 칼빈주의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광부이자 대장공 일을 하던 에반 로버츠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영혼의 간절한 열망,” “하나님의 백성의 부르짖음” 그리고 “성령의 역속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18)을 깊이 확신한 후 칼빈주의 감리교회 목사가 되기 위해 목사 후보생으로 신학수업을 막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복음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뉴키(New Quay)에 인접한 뉴캐슬 에믈린(Newcastle Emlyn)에서 신학예비수업을 하고 있던 로버츠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당시 본격적인 신학수업은 18세기 하웰 해리스의 부흥운동으로 유명한 탈가쓰(Talgath)의 트레베카(Trefecca) 칼리지에서 행해졌으며 그 이전에 뉴캐슬 에믈린에서 예비수업이 이뤄졌다.
로버츠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신앙의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찬송을 암송하고 성경 읽기를 좋아했으며,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인근 마을의 어린이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거나 설교도 했고 주중 5일간 밤에 교회에 갈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12살 어린 나이에 탄광에서 일할 때 저녁에 집에 돌아와 피곤한 가운데서도 몇 시간씩 성경을 얽었고 때로는 식사하는 것도 잊고 기도에 전념했다. 에반 로버츠는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11년 혹은 12년 전인 1891년부터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왔을 정도로 영적각성을 사모했다. “나는 부흥운동에 관해 읽거나 이야기하다 온 밤을 지새우곤 했다. 부흥운동에 관해 생각하도록 나를 움직이신 분은 성령님이셨다.”19)
1904년 봄에 로버츠는 일련의 비상한 영적 체험을 경험했는데, 그는 <리뷰 오브 리뷰스>(Review of Reviews)의 영국인 편집장 스테드(W. T. Stead)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아주 오래 동안 나는 기독교의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나의 영혼과 심령이 상당히 괴로웠다. 그러나 내가 이 문제로 대단히 깊은 기도를 드린 후 어느 날 밤 나는 깊이 잠들었다. 그런데 새벽 1시에 갑자기 나는 장에서 깨어났고 전능하신 하나님 바로 면전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경외에 찬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마치 한 사람이 그의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는 특권을 가졌다. 5시에, 나는 마치 내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새벽만 아니라 3개월 혹은 4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아침 그 같은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본성을 바꾼 듯했고 나는 다른 빚 속에서 사물들을 보았으며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이 나라 웨일즈,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역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20)
 
로버츠는 마치 1735년 6월 18일 하웰 해리스가 “불 앞에 놓아 둔 양초처럼 내 심장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녹아 내리는 느낌”을 경험했던 것처럼, 또한 1859년 웨일즈 부흥의 주역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이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 가운데 특히 기억력을 놀랍게 조명해” 주시는 “어떤 기이하고 신비로운 변화”를 경험하였던 것처럼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21)
이런 일련의 경험을 가지면서 로버츠는 주의 사역에 대한 비전을 품고 웨일즈 남서부에 위치한 뉴캐슬 에믈린(Newcastle Emlyn)의 예비신학교로 왔던 것이다. 1904년 9월 29일 목요일 로버츠는 뉴캐슬 에믈린에서 20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칼빈주의 감리교 전진운동(the Calvinistic Methodist Forward Movement)의 루이스(W. W. Lewis)와 셋 죠수아(Seth Joshua)가 근처 브래나너크(Blaenannerch)에 개최한 집회에 참석했다. 그날 루이스가 인도하는 개회예배가 아침 7시에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식사를 위해 잠시 모임을 중단하기 전 죠수아가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하면서 그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일들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다. 그중의 하나가 ”우리를 굴복시키소서(Bend Us)”22)라는 것이었다. 로버츠는 특별히 이로 인해 감동을 받았다. 그의 고백을 직접 인용한다면 “바로 이것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밖으로 나가면서 ‘오 주님 나를 굴복시키소서’라고 기도했다.”23)
오전 9시에 모임이 시작되었을 때 로버츠는 자신의 영혼 상태에 대해 상당한 비탄에 빠졌다. 몇 사람이 차례로 기도했고 그런 후 로버츠가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약 2분 동안 무시무시했다. 나는 “나를 굴복시키소서! 나를 굴복시키소서! 나를 굴복시키소서!”라고 소리쳤다. ... 그것은 나를 굴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명령, 곧 그의 사랑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명령하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내 자신이 굴복한 후에야 평화의 파고가 나의 가슴에 흘러 넘쳤다. 그런 후 심판날의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내 마음에 찾아왔고, 나는 흐느껴 울었다. 그 후 영혼의 구원이 엄숙하게 나를 압도했다. 나는 웨일즈 전역을 다니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열망으로 불타올랐으며 그리고 내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꺼이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24)
 
로버츠의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했다. 에반 로버츠가 13년 동안 기도해 왔던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임한 것이다. 에반 로버츠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그때 내 가슴은 웨일즈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돌아다니며 구세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25) 에반 로버츠는 그 경험 후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26) 로버츠에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가 기도하던 방이 성령으로 충만했으며, 로버츠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성령께서 어찌나 강하게 임하시던지 나는 하나님께 그만 손을 거두시라고 간청해야 했다!”27) 아마도 이 사건 이후에도 로버츠는 또 다시 하나님과 4시간의 교제를 위해 매일 새벽 1시에 깨어난 것으로 보인다.
로버츠는 이 기간 동안에 여러 번의 환상을 보았다. 그 중의 한 환상은 활활 타고 있는 지옥 불의 모습이었다. 그 지옥은 문 하나만 남기고 벽으로 둘러 쌓여있었으며, 지평선 너머로부터 무수한 영혼들이 지옥 불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또 그가 본 다른 환상에서는 사탄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을 얕잡아 보듯이 막 웃어대고 있었는데 이 때 백옥처럼 흰 옷을 입으신 주님이 이글거리는 긴 검을 높이 들고 계시다가 사탄을 내리치자 사탄이 즉시 사라졌다.28) 또 한 경우, 그는 전에 보다 훨씬 더 밝게 광채 나는 달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에이비온 존스(Eifion Jones)는 이렇게 기술했다:
 
짧은 순간에 달이 거룩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곳에는 무엇인가를 주장하며 세계를 향해서 뻗어 있는 팔이 나타났다. 또 다른 때에는 그 팔과 손이 희미했으나 그 팔과 손은 거기에 100,000의 숫자가 기록된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 후 그가 기도할 때마다 그는 그 숫자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까지는 평안이 없었다.29)
 
로버츠는 10만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라는 비전을 학교에서 다른사람들과 나누었다. 이때 그를 잘 알고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인 신학교의 교장 에반 필립스(Evan Phillips)는 “로버츠가 우리의 심령에 한편의 라디움과 같았다“30)고 말했다. 10월 10일 로버츠는 고향인 러퍼(Loughor) 집에서 친동생 단 로버츠(Dan Roberts)와 이 비전을 나누며 하나님께 맡기기로 다짐했다.31)
10월이 지나면서 로버츠는 점점 더 러퍼(Loughor)에 있는 그의 모교회(Moriah Chapel), 특별히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불타올랐다. 드디어 10월 30일 주일 뉴캐슬 에믈린 저녁집회에 앉아 있을 때 그의 마음은 온통 집으로 돌아가는 문제로 가득 찼다. 기자 스테드(W. T. Stead)와의 인터뷰에서 로버츠가 밝힌 것처럼 그는 예배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배 시간 내내 눈앞에는 하나의 환상, 곧 그가 알고 있는 러퍼의 학교 교실이 보여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실에는 옛 친구들과 청년들이 보였다. 그날 그 환상 속에서 로버츠는 그의 친구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로버츠의 말을 빌린다면 환상이 보이자 “나는 참을 수 없어 내 머리를 흔들었고 이 환상을 떨쳐버리려고 했으나 그 환상은 곧 다시 되돌아왔다. ... 그런 후 드디어는 더 이상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어 나는 말했다. ‘주님, 만약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자 곧 그 환상은 사라졌고, 전 예배당이 찬란한 빛으로 가득찼고, 너무 빛나 나는 강단의 목사가 희미하게 보였으며, 그와 나 사이에 하늘의 태양 빛처럼 영광이 나타났다.”32)
로버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일주일간 청년들과 집회를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이 다니고 있는 신학교 교장, 에반 필립스(Evan Phillips)에게 요청을 했다. 다음날 아침 로버츠는 뉴 키(New Quay)에 있는 플로리 에반스(Florrie Evans)에게 편지를 보내 러퍼에서 집회를 개최하기 위해 돌아갈 것이며 이를 위해 친구들에게 기도를 요청했다.33) “저는 한 주간 청년들과 지내기 위해 오늘 아침 돌아갈 생각이 다. 이것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 집회는 일주일간 매일 밤 열릴 것이다.”34)) 로버츠는 기자 스테드(W. T. Stead)에게 지난 저녁예배 동안에 체험한 일, 자신의 스승 필립스와 상의한 일, 그가 집으로 가도록 격려하였음도 알려주었다.35) 1904년 10월 31일 월요일 스승 필립스로부터 허락을 받은 로버츠는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그가 왜 집으로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로버츠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웨일즈의 영적 필요를 생각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부흥과 영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때는 기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금치 못했다. 가족들은 달라진 로버츠의 모습을 보고는 혹시 정신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3) 로버츠의 첫 활동, 모리아 채플
 
그의 고향 러퍼(Loughor)의 모리아 예배당에서는 매주 월요일에 정기적인 기도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1904년 10월 31일 월요일 저녁, 로버츠는 기도회가 끝난 다음 기도회에 참석한 자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로버츠는 그곳에 남아 있던 한 어린이를 포함한 17명의 청년들에게 뉴키와 뉴캐슬 에믈린 지역에서 어떻게 성령께서 자신 가운데 역사하셨는지 이야기하며 웨일즈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각 개인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할 것을 촉구했다. 집회는 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로버츠는 그 후 진행된 사건들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함께 모일 것을 요청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 왔고 나는 서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집회는 뉴 캐슬 에믈린의 교회에서 내가 보았던 환상 그대로였다. ... 처음에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으나 나는 계속 했고, 드디어 성령의 권능이 임했다.36)
 
마침내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 17명 모두가 주님을 영접했다. 그 가운데 로버츠 형제들와 세 자매, 전체가 그 밤에 주께로 돌아왔다.37)
다음날 11 월 1일 화요일 저녁 로버츠는 모리아(Moriah)의 지교회 예배당, 피스가(Pisgah)에서 더 많은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여기서 전날 주님을 영접한 몇 명이 자신들의 새로운 기쁨의 체험을 간증했다. 그 집회는 3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신앙고백, 기도, 그리고 개인간증으로 특징되었다.38) 이때 여섯 명의 청년들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했고 몇 사람은 전날 밤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구주이심을 체험했는지에 대해 간증했다. 로버츠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지난밤 집회는 전적으로 성령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을 회고할 때 나는 성령이 순종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39)
인근 골세이논(Gorseinon)의 리바누스 예배당에서 열린 다음날 수요저녁 집회에는 더 많은 청중들이 로버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모리아 예배당에서도 집회가 열렸고 그 열기는 동일했다. 로버츠는 앞으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해주실 것과 약 10만 명이 주께로 돌아설 것을 약속해 주셨음을 알려주었다. 로버츠가 자신의 환상을 자세히 제시하고 긴박하고 폭넓게 전개될 부흥운동에 대해 성령께서 주시는 비전을 들려주자 참석자들은 큰 관심을 기울였다. 여덟 시간이나 계속된 이 집회에서 20명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필립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날 로버츠는 다음 세 가지 사실, “1. 집회에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들, 2. 교단들 간에 이루어진 연합정신, 3. 성령 세례”40)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츠는 그곳에 모인 이들 에게 다음 4가지 사실을 촉구했다.
 
1. 만약 지금까지 고백하지 않은 과거의 죄 혹은 죄들이 있다면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없다. ... 2. 만약 우리의 삶에 어떤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 3. 성령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 4.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이 있어야 한다.41)
 
11월 3일 목요일 아침에 로버츠는 불타는 촛불의 환상을 보았다. 촛불 뒤에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모습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게 비추어진 촛불의 빛은 그때에 있었던 부흥운동을 대변하였고 한편 떠오르는 태양은 부흥이 아직 도래할 것임을 상징하였다. 그날 저녁 로버츠는 마태복음 7장 7절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만약 사역이 성공하려면 이것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원하시며 응답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42)고 말했다. 금요일 저녁까지 그의 활동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회중들은 이전보다 더 많았다. 로버츠는 “우리는 온 밤을 새우곤 했다. ... 나는 머지않아 축복된 부흥운동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43)
 
2. 웨일즈 대부흥의 확산
 
1) 특별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
 
1904년 11월 5일 토요일 밤에 로버츠는 다섯 시간이나 지속된 집회에서 골세이논(Gorseinon) 지역의 리바누스(Libanus) 예배당에 운집한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비록 그것은 젊은이를 위한 집회로 알려졌지만 참석한 많은 부모들은 젊은이들의 급진적인 변화에 놀랐다. 다음날 주일 저녁 로버츠는 에베소서 5장 18절,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술취하는 것이 죄라고 경고하며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외쳤다. 사람들에게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플로리 에반스가 그날의 역사를 이렇게 증언했다. “마지막 중에는 성령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밤에 세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 아! 그것은 굉장한 집회였다. 이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 그것은 계속 이어진 기도였는데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동참했다. 아!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44) 11월 6일 주일날 그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자정 쯤 되자 온 회중이 다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 그런 다음 사람들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바닥으로 내려앉더니 서로 가까이 다가앉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 우리는 성령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믿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어쩌면 오실 거라고 생각하거나 성령께서 오시기를 바란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오신다고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읽어주고 그 약속들이 얼마나 확실한 약속인지를 지적해 주었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 아래 한 것인 만큼 찬양 또한 성령께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성령께서 모든 사람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죄를 자백하거나 찬양하거나 자신이 체험한 것을 간증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믿고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제 성령을 보내주소서.’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았다. 내가 그 기도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기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기도하더니 젊은 청년 남녀들도 기도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간구하는 사람, 큰 소리로 간구하는 사람, 감정 없이 냉랭하게 구하는 사람, 감정이 풍부하게 구하는 사람, 의례적으로 딱딱하게 기도하는 사람,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는 사람, 강한 목소리, 부드러운 목소리,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기도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이처럼 큰 효과를 거두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곳이 가득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도가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 반 정도에까지 미치자 어떤 형제들이 ‘오, 주님! 주님! 어찌해야 좋으리까! 어찌해야 좋으리까! 오, 주님! 오, 주님!’ 하며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가 계속되자 그 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예배당이 점점 더 성령의 임재로 가득차게 되었다.”45)
 
이 주일 저녁집회는 하나의 전환점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곳에서는 각자 성령이 “더욱 강력하게” 임하게 해달라고 두 차례 돌아가면서 차례로 기도하였다. 두 여인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자신들을 주체할 수 없어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비록 경외함으로 압도되었지만 60명가량이 안위함으로 미소를 머금은 로버츠 주변에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참으로 수 없나이다 주 예수님, 아니면 내가 죽겠나이다!”라고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마루에 엎드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울부짖고, 노래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로버츠의 증언을 직접 빌린다면 “나는 몇몇 형제가 흐느끼는 것을 들었다. ... 기도가 계속되면서 영향력이 더 강해져 그 장소가 점점 더 회개의 영으로 가득 찼다.”46)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임한 것이다. 역사가 에이비온 에반스(Eifion Evans)에 따르면 죄의 탄식으로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거나 부복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이것은 “전에는 찾을 수 없었던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47)
이 특별한 경험은 그 도시에서 화제가 되었고, 모리아 예배당은 11월 7일 월요일 저녁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로버츠가 설교하기로 한 장소에는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점점 더 운집했고, 미처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집회에 참석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자기 영혼을 위해 비탄에 젖어 기도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에반 로버츠는 참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참석한 온 회중들이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도에 집중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일어나 그 기도를 반복하라고 말했다. 그는 성령께서 불가항력적으로 사람들에게 임하실 때까지 기도의 사슬을 두세 번을 반복하게 했다. 사람들은 곧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고, 중간 중간에 간간히 찬양을 불렀다. 그날 집회는 권능에 넘쳐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브린텍(Bryn-teg)에서 온 회중교회 대표들이 로버츠에게 오는 수요일에 자신들의 집회에서 설교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기쁨으로 그들의 초청을 수락했다.
 
2) 확산되는 부흥의 불길
 
1904년 11월 8일 화요일에 가서는 부흥의 영이 더 이상 에반 로버츠의 집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로버츠가 며칠 전 말씀을 전했던 골세이논(Gorseinon)에 있는 리바너스(Libanus) 교회 담임목사 토마스 프란시스(Thomas Francis)는 자신의 집회를 이렇게 기술했다:
 
심각한 침묵 속에 참석한 각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교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해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모든 연령층의 자녀들에게 임하셨다. 우리는 결코 전에는 그러한 울부짖음, 찬송, 그리고 기도를 목도한 적이 없었다.48)
 
1904년 11월 8일 존스(R. B. Jones)는 북 웨일즈 Rhos(Rhosllanerchrugog)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일련의 집회를 인도했다. 마지막 집회 끝말 클라이막스 때 회중들이 기쁨, 찬양, 기도, 그리고 간증을 하면서 집회가 12시간이나 지속되었다.49)
런던에서 출간되는 케직 사경회 운동의 주간지 더 라이프 오브 훼이스(The Life of Faith) 11월 9일자에는 “한 사람의 손과 같은 구름”이 부흥운동을 전조하는 바, 웨일즈 전역에 일어났음을 목도한 제시 펜-루이스(Jessie Penn-Lewis) 여사의 기고한 글이 게재되었다. 같은 날 로버츠는 대단한 기쁨 가운데 8시간이나 계속된 브린텍 회중교회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집회 열흘째인 11월 9일에는 더 큰 빌딩으로 옮겨서 집회를 가졌으며, 이날 광부들은 늦게 가면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탄광에서 나오기 무섭게 작업복을 입은 채 집회 장소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이 경이적인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신문기자들까지 참석하였다. 다음날 카디프(Cardiff)의 영자 신문 <웨스턴 메일>(The Western Mail)은 로버츠 집회에 대한 소식을 받고 이렇게 보고하였다:
 
놀라운 종교적 부흥운동이 지금 러퍼에서 일어나고 있다. 놀라운 흥분이 압도하여 교회가 위치한 거리에는 끝에서 끝까지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 상점원들이 예배당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일찍 가게 문을 닫았고, 함석과 철 노동자들이 노동복장을 한 채 그 장소에 모여들었다.50)
 
신문에는 연일 웨일즈부흥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들이 실렸다. 부흥의 소식은 웨일즈 지방을 넘어 다른 많은 지역에까지 알려졌다. 사람들이 11월 10일 목요일 집회에 참석하기위해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했다. 웨스턴 메일(The Werstern Mail)의 한 저널리스트가 기록한 대로 예배드리는 동안 모든 것들이 매 순간 자원하는 순전한 마음에 의해 진행되었고, 로버츠는 “좌석 사이의 통로를 걷거나 앉아 성경을 손에 펴고는 한번은 권고하고, 다른 한번은 격려하고, 그리고 3분의 1은 은혜의 보좌로부터의 축복을 간청하며 무릎을 꿇었다.”51) 이날 아주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통회하는 이들, 기절하듯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들,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악명 높은 죄인들과 술주정꾼들, 그동안 서로 원수처럼 지내다 성령 안에서 화해한 사람들, 그날 회중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너무도 강하게 임했다. 그 역사적 현장에서 모든 사실을 목도한 에반 로버츠는 이렇게 증언했다:
 
한 젊은 여인이 일어나 찬양을 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진지함으로 드려진 찬송이었다. 찬양이 드려지는 동안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용서해달라고 소리쳐 간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새벽 4시 25분경에 모인 이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자신들의 집으로 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제 자신들의 삶에서 참된 주제가 무엇인지를 아직도 길에서 논하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클라네클리(Llanelly)로 돌아와야 했다.52)
 
이때에 로버츠는 자신이 학교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에 자신의 여동생 메리(Mary)와 결혼했으며 인도의 선교사로 사역한 그의 절친한 친구 시드니 에반스(Sidney Evans)에게 자신의 소지품들을 부탁하고 신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펀지로 밝혔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나는 완전히 만족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맡겨진 충만한 사역으로 인해 더 없이 행복하다.”53)
1904년 11월 11일 금요일 밤 집회에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4시간 동안 계속된 이날의 집회는 회중교인, 침례교인, 칼빈주의자, 감리교인이 할 것 없이 한데 섞여 예배를 드렸다. 이날 에반 로버츠는 회중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를 반복해서 간구할 것을 요청했다. 로버츠는 첫째 줄부터 그렇게 하도록 했고 모인 회중들은 여기에 따라 순종하였다. 그러자 한층 강력한 회개가 나타났고, 많은 사람들이 죄의 회상으로 압도되어 무릎을 꿇고,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고, 이어 한 목회자는 장시간을 간절히 기도했으며, 로버츠 역시 그곳에 참석한 이들과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영혼의 힘을 다해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이날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임했다. “그들 중 얼마는 퇴적 더미에 쓰러졌고 다른 사람들은 자비를 갈망하며 처절하면서도 소리 높여 울부짖었다.”54) 로버츠의 몇 마디의 권면, 짧은 기도가 사람들의 가슴에 부흥의 불을 지핀 것이다. 이날 해외선교를 위한 헌금 시간에는 참석자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돈을 모두 바쳤다. 에이비온 에반스(Eifion Evans)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든 일상사를 잊어버렸고, 음식에 대한 요구도 잊었으며, 자신들의 매일 사역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친 것처럼 보였다.”55)
토요일에 두 젊은 여인들이 골세이논(Gorseinon)에서 많은 군중들을 매혹시킨 노천집회를 열었다. 집시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주께로 인도한 사람도 있었고, 소녀들은 술집 밖에서 옥외 집회를 가졌다. 술꾼들이 밖으로 나오다 성령에 사로잡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부흥의 불길은 더욱 더 놀랍게 확산되어 나갔다. 모여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배 공간이 모자라 이들을 분산시키기 위해 같은 시간 두 교회에서 동시에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날 킨스브릿지 콤먼(Kinsbridge Common)에서 열린 노천야영집회에서도 많은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그날 하루 동안 많은 각 가정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에반스(Eifion Evans)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임재 및 성결의식이 가정, 사역의 현장, 상점,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모든 인간경험의 영역을 지배했다. 영원은 피할 수없이 가까이 그리고 실재로 임한 것처럼 보였다.”56)
그날 밤, 모리아(Moriah) 채플과 피스가(Pisgah) 채플 두 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한 곳에서는 에반 로버츠가 말씀을 전했고, 다른 한 곳에서는 뉴캐슬 에믈린(Newcastle, Emlyn)에서 막 돌아온 시드니 에반스(Sidney Evans)가 말씀을 전했다. 그곳에 참석했다 성령의 은혜에 압도된 한 유명 가수는 발코니에서 “은혜로 구원 받았네”를 감격에 겨워 불렀고 회중들은 그 노래를 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예배가 시작되기 수 시간 전부터 집회 장소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두 교회의 집회는 주일날 새벽 2시까지도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약 새벽 5시에야 끝났다.57) 에반스(Eifion Evans)가 지적한대로 성령의 역사가 회중들 기운데 강력하게 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즉 가정이나 일터나 상점이나 선술집 어느 곳이든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의식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영원이 이주 가까이 실제적으로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주말에는 부흥사 에반 로버츠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성령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역사하신 것이 분명했으며 에반 로버츠의 희망 사항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 중요했던 그런 기간이었다.58)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토록 강하게 부흥운동의 역사가 웨일즈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흥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놀랍게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미 은혜를 받은 많은 청년들과 복음전도자들이 여러 곳에서 집회를 열었고, 그리고 집회가 열린 곳마다 성령의 붙이 임했다. 카마던(Carmarthen)에서는 “축복의 수문”이 열렸고, 윌터 스트리트 교회(Walter Street Chapel)에서는 강력한 통회 역사가 나타났다.59) 아만포드(Amanford)에서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고, “온 회중이 거의 다 흐느껴 우는” 역사가 나타났다. 그 현장의 주인공 셋 여호수아가 증언한대로 오랫동안 사모했던 그 부흥의 날, 곧 “내 일생 중 가장 진기한 날 중 하루”60)가 찾아왔던 것이다.
로버츠는 다음날, 11월 12일 <웨스턴 메 일>(The Western Mail)에 실린 그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애버데일(Aberdale)의 회중으로부터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전보로 그 초청을 수락하고 다음날 아침 아주 최근 회심한 몇 명의 젊은 여인들과 함께 트레키논(Trecynon) 가까이에 있는 애버데일의 브라이언 시온(Bryn Seion)으로 향했다. 아더 긋리치(Arthur Goodrich)는 그들의 도착을 이렇게 기술했다:
 
주일아침 예배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경쾌한 발자국에다 무거운 엄숙함이라고는 완전히 결여된 한 젊은이가 다섯 명의 젊은 여인들을 대동하고 들어와 놀랍게도 맨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회중은 오랫동안 지루하게 격동적으로 소리 내 찬송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동안 그는 다소 관습적이지만 자세를 곧게 만들고 시선을 앞으로 집중시켜서 참석자들의 심령을 사로잡아 그 열정적인 심령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혹은 한 소절조차 잃지 않도록 만드는 그런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회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로버츠와 함께 온 여인 몇 명이 찬양을 부르자 회중들이 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모인이들 모두가 웨일즈 소리, 웨일즈 열정으로 찬양을 부르자 싸늘했던 사람들의 감정이 반쯤 녹아내렸다.61)
에반스(Eifion Evans)에 따르면 로버츠와 그 일행에 대한 영접은 처음에는 쌀쌀했다. 그런데도 에반 로버츠와 골세이논에서 그와 함께 온 다섯 명의 여인들이 잘 참았고, 그리고 드디어 그들의 믿음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로거[Moriah, Pisgah, 그리고 Libanus 채플]에서 목도된 그러한 성령의 임재의 장면들이 재현되었고, 사람들에게 1859년 부흥운동의 현상들을 상기시켰다.62) 데이빗 매튜스(David Matthews)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곳에 모인 회중 기운데 가장 교만했던 사람 중 한명이 무릎을 꿇고,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자 곧 각성운동이 폭발했다. ... 다른 사람들이 곧 그 뒤를 이어 통회했으며 그것은 그곳에 모인이들을 당황케 할 만큼 자발적이었다. ...
이렇게 해서 시작된 그 집회는 온 종일 한번도 중단되는 일 없이 계속되었다! 그곳에서는 저녁시간도 심지어 주일학교도 없었다. 분명히 예배자 전원은 모든 신체적 불편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 저녁이 되자 다른 교회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부흥”이 일어나는 비교적 작은 한 건물로 어떻게 해든 들어가려고 이웃사람들이 이 한 곳에 모여 드는 것처럼 보였다.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63)
 
여기로부터 로버츠는 그의 고향까지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가르(Garw) 탄광계곡에 있는 폰키머(Poncymmer)로 향했다. 로버츠는 그 지역의 연합종교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멀고 광범위 한 곳에서부터 왔으며, 몇몇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찾아왔다. 사람들은 이미 로버츠를 “웨일즈의 요한 웨슬리”64)라고 불렀다. 다음날 새벽 다섯 시 로버츠는 밑에서 올라오는 광부들의 야간 교대 조를 기다리며 탄광 입구에 멈춰 섰다. 그들이 나타나자 로버츠는 그들 모두와 일일이 악수를 하며 너무 피곤하지 않다면 아직 진행 중인 기도회에 참석해 달라고 청했다. 이들 광부 대부분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그곳에서도 성령께서 놀랍게 응답하셨다. “거친 외관의 힘 있는 남자들이 거의 히스테리적으로 흐느껴 울면서 변칙적인 발음으로 떨면서 간증하는 고무적인 장면들이 목도되었다”65)
11월 6일 수요일에 로버츠는 에벤에셀 회중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트레키논(Trecynon)으로 돌아갔다. 데이빗 매튜스(David Matthews)는 그곳의 집회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내 앞과 내 주변에 확실히 이 세상에서 난 것이 아닌 거룩한 광채를 띤 불타는 얼굴을 가진 군중들이 있었다. ... 그 건물의 다른 쪽에는 같은 시간에 약속된 기도회가 진행되었고, 몇몇은 마치 죽음의 고통 가운데 처한 사람처럼 사지를 떨며 몸부림쳤으며, 반면 “축복”을 받은 그 밖에 사람들은 새로 발견한 경험 가운데 환희에 차 있었다.66)
 
매튜스(Matthews)는 로버츠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가장 깊숙한 영혼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았다”67)고 기록했다. 그런 후 그 집회는 “질문이 하나 있소”라고 크게 소리치는 한 회의론자(a skeptic)에 의해 중단되었다. 로버츠는 심지어 그 소리가 나는 방향도 바라보지 않은 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 후 도전적인 톤으로 회의론자는 다시 되풀이 해 외쳤다. “나 질문 하나 하고 싶소.” 로버츠는 조용히 기도를 시작했고 곧 누군가가 부흥운동 동안에 널리 불려진 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후 찬송을 넘어 다시 한번 도전적인 외침이 들렸다: “만약 당신이 내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회중에게 질문을 던지겠소.” 누구 하나 회의론자의 그 방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자 그 사람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튜스(Matthews)에 따르면:
 
다메섹 도상의 다소의 사울의 경우처럼 성령께서 이 사람을 놀랍게 압도해 - 사람들이 그를 붙들지 않았다면 그는 계단에서 엎어졌을 것이다 - 그를 강권하셔서 그로 하여금 자비와 용서를 위해 울부짖게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이 잇따랐겠는가! 사람들이 일어난 일의 전 취지를 깨달았을 때 한 외침이 나타났다. “그가 구원 받았다! 그가 구원 받았다!”68)
 
부흥운동이 점점 더 확산되면서 사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성령 안에서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찬양과 어우러진 기도회는 여덟 시간이나 지속된 경우도 있었다.69)
1904년 11월 13일부터 3월 1일까지 로버츠는 런던에 가서 여러 곳의 웨일즈인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었다. 이때 골세이논 교회 다섯 명의 여자 청년들이 전도대원으로 그를 따라왔으며, 독창, 중창, 기도와 간증으로 로버츠의 집회를 도왔다. 에반 로버츠는 보통 한 곳에서 3일 정도 머물면서 집회를 인도했으나 어떤 때는 하루만 머물고 떠날 때도 있었다. 로버츠가 일찍 떠날 경우 로버츠의 동생 단 로버츠(Dan Roberts), 그의 친구 시드니 에반스(Sydney Evans), 그리고 여가수 애니 데이비스(Annie Davies)가 뒤에 남아 더 집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로버츠의 집회는 보통 오전 7시 30분 기도회, 오전 10시 예배, 오후 2시 예배 그리고 오후 7시 집회 네 번 열렸으며 마지막 집회는 보통 한밤중에서 다음날 이른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런던의 전역에서 로버츠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참석자들 중에는 팔려고 가지고 온 샘플 물건도 잊어버리고 버려둔 채 로버츠의 집회에 참석한 자들도 있었다. 보통 열리는 네 번의 집회 중에서 오후집회와 저녁집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렸으며 이들 집회의 경우 예배당이 꽉 차서 미처 들어가지 못한 수백 명이 밖에 서 있을 때도 있었다. 한 교회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다른 교회로 가서 동시에 예배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버츠가 인도한 집회에는 매번 8명에서 22명이 일어나 주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계속되었고, 그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후에도 그가 인도했던 그곳에 부흥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임해 그곳에는 그 후 밤마다 사람들로 가득차기도 했다. 사람들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3) 웨일즈 전역으로 확산되는 부흥의 불길
 
1904년 11월에 접어들어 웨일즈 부흥운동은 카마던 마을, 야만포드, 론다의 토니팬디, 런던, 웨일즈 북부지방, 베세즈다, 낸틀레이 벨리, 할레흐 인근의 에그린, 로슬래너흐뤼고그를 비롯하여 수많은 지역으로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웨슬리 듀웰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이 마치 담요처럼 북 웨일즈와 남 웨일즈 전역을 뒤엎었다.”70)
다양한 사람들이 도구로 쓰임받았다. 에반 로버츠가 가는 곳마다 예외 없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지만 에반 로버츠 혼자 웨일즈에서 부흥운동을 확산시킨 것은 아니었다. 론다(Rhondda) 계곡에 있는 매디(Maerdy)에서 로버츠가 인도한 세 번의 집회에 참석했던 스테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71)
 
부흥운동의 역사에서 이번 부흥운동보다 더 자발적이었던 부흥운동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조직, 흑은 지시 없이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전역에서 부흥이 발흥했다. 그러므로 만약 에반 로버츠가 웨일즈 부흥운동의 중심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결코 조직하거나 통제하지 않은 운동에서 몇몇 눈에 띠는 인물 가운데 하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72)
 
남웨일즈에서 에반 로버츠가 부흥운동의 도구로 쓰임 받는 동안 북웨일즈에서는 20세 된 교사 로이드 존스(Evans Lloyd Jones), 뉴키의 남쪽 도시에서 온 조셉 젠킨스(Joseph Jenkins), 중년의 농부 부인 메리 존스(Mary Jones)가 이 지역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쓰임 받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가 웨일즈 북부의 해안을 다니며 능력 있는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놀라운 반응이 있었고, 공 예배에서 기도하다 성령의 강한 은혜를 체험한 메리 존스 여사가 북 웨일즈의 각 지역 가정들을 심방하며 복음을 전할 때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1904년 10월 9일 경 북부 웨일즈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한 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영적인 부흥이 북 웨일즈 전역에 신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정말로 마을마다 집회가 열리고 있으며 어느 곳에 가든 열정과 열심이 팽배해 있다. 심지어 화강암 채석장에서 일하는 일꾼들마저 매일 점심시간에 기도회를 갖는데 그 기도회는 아주 감동적이다.”73)
 
셋 여호수아(Seth Joshua)가 11월 20일 아만포드(Ammaford)에서 인도한 한 집회에서 사람들이 대단히 거룩한 임재를 경험했다.74) 이날 그의 일기에 기록된 대로 그의 생애에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오늘은 내 일생에 가장 놀라운 날이었다. 오전에만 수많은 사람이 인도를 받아 주님을 영접했다. 오후에는 그러한 회심의 축복이 수십 명의 청년에게 일어났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7시 경, 물밀 듯 몰려 온 청중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득 채웠으나 아직까지 입구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성령께서 참으로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많은 이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는데 그 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75)
이 날 한 안수 받은 목사, 낸틀라이스 윌리엄스(Nantlais Williams)가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했다.76) 윌리엄스 그 자신의 표현을 직접 빌린다면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 아! 얼마나 위대한 구원인가! 이 얼마나 큰 평안인가!” 북부 웨일즈에서 특별히 오후 기도회 동안 11월 20일에 가장 놀라운 집회가 열렸던 로스(Rhos)에서 부흥의 불길은 계속해서 밝게 불타올랐는데, 그 때 “수십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회에 참석했고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압도되었으며 전 회중이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77)
4개월간 집회가 지속된 로스(Rhos)에서는 집회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악명 높은 13명으로 구성된 잔인한 갱단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탄광에서는 기도회가 열렸고, 가정불화가 해결되었으며, 금주운동이 한층 강화되었고, 회심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나누기 위해 행렬을 이루어 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행렬 가운데는 어린아이도 포함되었다. 복음은 연령을 초월하여 남녀노소 전 계층의 사람들에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4개월 간 계속된 로스(Rhos)집회를 통해 2,267명이나 주께로 돌아왔다.
1904년 12월에 접어들어 사랑 가운데 성령께서 강한 빛으로 그의 본성 전체를 마구 흔들어 놓았던 “거스를 수 없는 은혜” “참으로 변함없는 약속”을 날마다 경험한 조셉 젠킨스의 설교를 통해 수많은 목회자들이 은혜를 경험했다. 능력의 설교, 모드 데이비스와 플로리 에반스를 동반한 그의 집회에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해서 임했다. 에이비온 에반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젠킨스의 설교가 미친 효과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효과에 비견되었다.”78) 젠킨스가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쓰임받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메리 존스를 통해 할레흐 인근 에그린이라는 마을에서 놀라운 부흥이 확산되고 있었다. 한 목격자는 그녀의 사역이 “에반 로버츠의 사역과 같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중요한 몫을 감당했으며, 에반 로버츠와 더불어 “웨일즈 복음전도 현장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이라고 예찬했다.79)
웨일즈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목도한 로버츠를 비롯한 부흥운동의 지도자들과 웨일즈 인들은 하나님께서 부흥의 불길을 웨일즈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남 웨일즈에서의 부흥운동 소식을 접한 다른 도시나 지역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그 소식을 접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청년들이 기도회를 가졌고 이로 인해 부흥이 시작되었다. 개인 혹은 교회 지도자나 당회가 기도회를 시작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기도회는 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남 웨일즈의 부흥의 불길은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남 웨일즈에서 놀라운 도구로 쓰임 받은 에반 로버츠는 런던과 북 웨일즈로 달려가 2개월 간 사역하였다. 로버츠는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Cardiff)에서 수천 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는 바람에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무대 뒤로 감추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했다. 북 웨일즈 탄광 근처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는 탄광을 방문하여 밤교대를 마치고 탄광을 떠나는 광부들에게 일일이 악수하며 집회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고, 실제로 많은 광부들이 참석하여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성령께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자 건장한 남자들이 흐느껴 울었고, 변화를 받은 광부들이 다른 교인들과 어울려 찬양하고 기도하였다. 부흥운동이 한창 탄광 지역에 몰아칠 때 갱도 63m 떨어진 곳에서 80명의 광부들이 랜턴을 켜고 마태복음 6장을 읽고 있었다. 성경 읽기를 끝내자 찬송을 부르고 아멘을 외쳤다. 탄광이 있는 골짜기마다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부흥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어떤 때는 에반 로버츠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 200명, 300명, 혹은 500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비록 그는 성령께서 자유를 허락하시도록 가능한 한 주제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거대한 군중들이 계속해서 로버츠 집회에 몰려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정책이 그의 집회의 놀라운 성공의 비밀 가운데 하나라고 느꼈다. “놀라운 자석 같은 힘을 닮은 저항할 수 없는 매력(attraction)이 우리를 교회 안으로 이끌었다.”80)
 
3. 웨일즈 대 부흥의 특징과 성격
 
1) 부흥의 불길을 강하게 만든 찬양
 
찬양은 특별히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은 찬양을 불렀고 간중과 기도 후에 다시 찬양을 불렀다. 사람들이 회심할 때마다 그 사실을 광고로 알렸고 이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렸다. 사람들이 은혜에 충만하여 거리를 다니며 밤새 찬양을 부르는 일도 있었다. 마치 웨일즈 전체가 찬양의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필립이 지적한 것처럼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설교가 아니라 찬양이었다.”81) 사람들은 자유롭게 시편을 노래하고 찬송을 불렀으며, 그리고 기쁨과 감격을 주저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영광스럽게 표현했다.82) 마치 회중 전체가 천사들의 찬양대를 결성한 것처럼 아름다운 찬양이 울려 퍼졌다. 아더 굿리치(Arthur Goodrich)는 “그곳에는 내가 듣고 찬양할 훌륭한 좋은 기회를 가져왔던 찬양대도 훈련받은 일단의 전문 성악가들도 없었으나 나는 웨일즈 교회의 거의 어떤 교회에서처럼 로버츠의 집회에서 아름다운 찬양 소리를 들었다”83)고 증언했다.
데이빗 매튜스(David Matthews)가 11월 23일 로버츠가 인도하는 한 집회를 방문했을 때 그는 찬양 중 기름 부으심을 경험했다:
 
상당히 즉흥적인 그러한 놀라운 찬양은 단지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 능력을 창조하신 주제는 거룩하신 성령이시었다. 찬양대도, 지휘자도, 오르간도 없었고 단지 자발적이고 감동적인 영혼의 찬양이 있을 뿐이었다!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그곳에서 2주간을 지내면서 그 현장을 직접 목도한 딕슨(A C. Dixon)이 증언한 것처럼 웨일즈 교인들은 어떤 반주나 지휘 없이 ‘주달려 죽은 십자가’ ‘샘물과 같은 보혈’ 같은 친숙한 찬송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불렀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 것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몸으로 느껴졌다.84) 웨스트민스터 채플 설교자 캠벨 몰간 역시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담임했던 위대한 회중교회 성경교사이자 설교가,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은 [1904] 12월 20일 화요일에 크린대취 베일(Clydach Vale)에서 열린 로버츠 집회에 참석했다. 다음 주일, 크리스마스 저녁에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 중 웨일즈부흥운동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은 후에 인쇄되어 전 세계에 배포되었다.85) 그는 사도행전 2장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오순절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설교하며, “[너무도 분명한 이상 더 이상 논쟁을 중단하고] 이 일에 손을 터는 것이 더 낳을 것이다”고 말했다.86)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웨일즈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그곳에는 설교도. 질서도, 찬송가도, 찬양대도, 오르간도, 헌금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광고도 없었다. ... [과거에는 오르간이 있었지만 침묵이 있었고, 목회자들은 있었지만 사람들 가운데 기쁨과 예언이 없었고, 단지] 그곳에는 찬양대가 정말 없었는가? 그 집회 참석자들 모두가 찬양대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찬양이었다! 나는 서서 그날밤 회중이 찬양집 없이 잇따라 부르는 찬송, 긴 찬송을 부를 때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서서 들었다. ... 광고도 없었다. 그러나 집회 전체 그 자체가 광고였다. ...
만약 당신과 내가 웨일즈에 서서 그 집회 광경을 바라보았다면 당신은 어떤 공모나 사전 예정 없이 여기 저기 저쪽 그리고 그 밖에 어떤 곳에서 폭발하는 불을 목도했을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적 기관 없이 인간이 하나님 자신을 의식할 수 있도록 현시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싶다. 당신들의 교회는 바르고, 당신이 그 안에서 거하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서 생을 끝내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 모두로부터 분리시켜 그것들을 한쪽으로 거의 무자비하게 위치시키는 오순절의 권능과 불이 현시되었다.87)
 
당시 어느 일간지의 기사에 의하면 로버츠가 인도하는 집회의 4분의 3이 찬양시간이었으며, 사람들이 찬송가를 드려다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찬송이 바닥나서 못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이처럼 웨일즈 집회에서는 이전의 어떤 부흥회보다 찬양이 부흥의 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은 웨일즈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기차를 타고 와서 그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차역의 플랫홈에서 그리고 기차 안에서 찬송하며 기도했다. 산을 넘어 자기 마을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가는 길에 기도회를 열었다. 그들의 찬양 소리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는데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과 웨일즈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찬양하고 기도했다. 그런가하면 광부들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탄광을 임시로 닫는 도시들도 많이 생겼다.88)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의 입에서는 찬양과 기도가 넘쳐났다. 그렇다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웨일즈 집회에서 간과된 것은 아니었다. 딕슨이 증언한 것처럼 “웨일즈 지방의 부흥에서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보혈을 통한 구속이었다.”89)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거나 구속의 은혜를 간증하는 일이 집회마다 늘 있었다. 그래서 찬양과 기도와 간증은 웨일즈 집회에서 늘 따라다녔던 세 가지 두드러진 요소들이었다. 찬양, 성경읽기, 기도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의 간증 순으로 집회가 진행되었으며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한 사람 한 사람씩 일어나서 간단한 권면이나 훈계의 말씀을 전했다.
 
2) 성령께 순종
 
성령을 보내달라는 것은 로버츠 집회의 특징이었다. 부흥이 강하게 일어나 전역으로 확산되던 1904년 11월 집회를 끝난 후 은혜를 체험한 이들을 따로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 2.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강하게 보내주소서. 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더욱 강하게 보내주소서. 4.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훨씬 더 강하게 보내주소서.”90) 성령의 감동을 따라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던지 아니면 개별적으로 기도하던지 기도문을 반복해서 조용히 기도하라고 주문했다.
“성령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에반 로버츠가 내건 슬로건이었다. 로버츠는 계속해서 “성령께 순종하라”고 촉구했고 성령께서는 그 집회를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인도하셨다. 1000에서 2000명의 참석자들이 참석했지만 모두 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런던에서 온 기자도 로버츠 집회에 참석하고 인간 지도자나 인간적인 지시가 거의 없는 가운데 집회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로버츠는 어떤 권위를 내세우거나 의도적으로 청중을 압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겼고 청중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성령께 의탁했다.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특별한 부흥의 비결은 없다. 실제로 에반 로버츠는 부흥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가 한 대답은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구하시오 그러면 받을 것이오”였다. 로버츠는 자신이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주역이라거나 자신의 힘으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흥의 불이 한창 불타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새로운 부흥을 일으킨다는 것은 내 능력 밖에 일이다. 왜냐하면 부흥은 그 모든 조건이 구비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91) 웨일즈인들은 부흥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다. 로버츠는 매 집회마다 첫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 둘째 기도할 것, 그리고 셋째 하나님께 모두 순종할 것을 촉구했다.
런던에서도 로버츠는 자신이 예배를 주도하지 않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그에게 전적으로 위탁했다. 대신 로버츠는 “우리가 성령께 순종해야만 합니다.”92)라며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강조하였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평신도가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찬송을 불렀으며, 때로는 목회자가 기도회를 인도할 때도 있었다. 스테드는 인간 리더쉽의 이같은 결핍은 이들 집회의 가장 특별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고 느꼈다:
 
내가 참석한 집회에 관한 가장 비범한 일은 그 집회가 절대적으로 어떤 인간의 지식 흑은 리더쉽 없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성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에반 로버츠의 슬로건이었고, 그리고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 중 가장 겸손한 자처럼 순종적이었다. ... 당신은 회오리바람이 연못의 수면에 불어치는 것처럼 운집한 회중들 가운데 작용하는 성령의 능력이 영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93)
 
성령께서 모임을 주도하신 것이다. 이것은 로버츠의 집회가 설득력을 지닌 중요한 이유였다. 게다가 로버츠의 뚜렷한 회심과 변화는 웨일즈 부흥운동의 저변확대에 중요한 몫을 했다. 모든 부흥운동이 그렇듯이 부흥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그의 인격이 변화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웨일즈 대부흥운동 역시 로버츠의 변화는 부흥운동의 저변확대에 큰 몫을 했다. 로버츠는 하나님께서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자신을 부르셨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영적 교만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청중들과 격리시키거나 존귀한 위치에 자신을 두기를 원치 않았다. 아더 굿리치(Arthur Goodrich) 또한 로버츠의 겸손에 감탄했다:
 
그는 길을 따라 활보하다 멈추어 서서 그런 후 길 중간에 걸어 내려가는 많은 그룹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 모든 언덕바지 길 위로 그들이 올라왔고, 로버츠는 마치 그들 자신들과 다르거나 더 위대한 것처럼 그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놓지 않았다. 나는 젠체하지 않는 단순성, 소년같은 솔직성, 위풍당당한 성실성을 느꼈고 그리고 그가 얼마나 사람들과 하나 되어 여기의 사람들의 손을 잡고, 진심 어린 열린 우정으로 팔이나 어깨를 잡아주며, 그들의 심령에 그의 열정, 그의 자신감, 그의 압도적인 기운찬 정신을 고취시켜주는가를 목도했다.94)
 
에반 로버츠는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쓰임 받고 있었지만 군중위에 군림하거나 서있지 않고 군중들 가운데, 군중들 속으로 다가갔다.
 
3) 웨일즈대부흥에 대한 비평적 평가
 
제도적이고 질서가 잘 잡힌 기성교회에서 볼 때 웨일즈 부흥운동은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았다. 골세이논 지역에서는 이미 신앙을 가지고 교회 생활에 충실한 자 중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은혜를 경험한 이들 가운데 그 부흥회 전에는 전혀 중생하지 않았다고 간증하는 바람에 동리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이들은 독립전도회관(Independent Mission Hall)을 따로 설립하여 독립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905년 1월 31일 한 회중교회 목회자, 피터 프라이스(Peter Price)는 <더 웨스턴 메일>(The Western Mail)의 서신 칼럼에 그의 서신들을 출판하여 에반 로버츠를 혹독하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영광스럽고 진실된 부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 영감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인데 반해 에반 로버츠의 부흥은 인위적이고 육체적인 “거짓된 부흥운동”95) 라는 것이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통제 아래 있다는 로버츠의 주장은 기독교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잘못된 가르침과 주장이라고 평가하고, 그 점에서 볼 때 로버츠의 부흥이 “순전한 속임수”며 “참된 부흥운동의 모방이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왜곡된 부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96) 프라이스에 따르면 도우라이스(Dowlais)에 있는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참된 부흥운동인 반면 로버츠의 부흥운동은 “부끄럽고 ... 가짜이며, 참된 부흥운동의 신성모독적인 졸렬한 모조품”97)이었다. 그 결과 비록 로버츠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길고 뜨거운 공개적인 논쟁이 일어났다.98)
프라이스의 비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로버츠는 리버풀의 도널드슨 스트리트 교회에서 열린 집회 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오래 전에 제게 이 계시를 주셨지만 오늘 밤에서야 밝히게 되는 군요. 그 계시는 웨일즈 독립교회와 관련된 것입니다. ... 이것은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가 반석 위에 있지 않다. 교회의 기초가 반석 위에 있지 않다.’”99) 에반 로버츠는 주관적인 계시를 주저하지 않고 피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로버츠의 집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현상이다. 에이비온 에반스가 지적한 것처럼 에반 로버츠의 사역은 말씀 사역보다는 은사 사역에 더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쉽게도 로버츠가 영적 은사의 사용을 적절히 규제하기 위해 성경적 안전장치를 항상 준수한 것은 아니었다. 종종 말씀 사역을 소홀히 한 결과, 로버츠는 회중에게 믿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근본 가르침을 베풀지 못했다. 이것은 다소 과도한 감상주의를 초래했으며, 회심한 사람의 체험이 개인적 특성과 당시 심리학적 유행에 따라 평가받게 만들었다. 이후에 나타난 반발은 훨씬 더 심각했는데 그것은 많은 성도의 영적 통찰력과 열정을 급속히 감퇴시켜 지적 토대가 부실한 그들의 사랑이 비참할 만큼 냉담한 상태로 빠지게 만들었다.”100)
 
로버츠의 일생을 놓고 평가할 때도 그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이라기보다 은사의 사역이었다.101) 그의 부흥에는 건실한 설교가 부재했다. 회심후 사람들의 신앙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교육하고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못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비록 교회로 영입한 후 5-6내에 20%가 교회를 떠났다는 것은 적은 수치가 아니다. 로버츠의 모토, “교회를 굴복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라”는 표어 자체가 신학적이기 보다 다분히 체험적인 측면이 강하다. 바로 이것이 1904년 웨일즈 부흥을 기존 다른 부흥운동과 구별해 주는 특징이며, 여타 부흥운동과 달리 부흥운동이 교회의 영적 건강을 낳기보다 웨일즈 교회 부흥과 발전에 위기를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102) 에이비온 에반스는 1859년 웨일즈부흥과 1904년 웨일즈 부흥을 비교하면서 이런 평가를 내렸다.
 
1904년 부흥운동은 기도와 간증과 찬송에 표현된 인간 감정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각세대의 신학적 경향에 따른 것이지만 1904년 부흥운동의 특징은 교회의 신앙고백이나 기독교의 성격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다. 1859년 부흥은 1904년 부흥운동보다 성도의 체험을 평가하는 일에 더 신중했다. 1904년 부흥운동의 경우 신앙고백을 타당하다고 인정한 기준은 엄중하지 못했고, 다소 피상적이었으며 전적으로 주관적이었다. 한 개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라든지 기독교 소망에 대한 인식이나 진리와 오류를 어떻게 식별하고 있는지 거의 살펴보지 않았다. 뉘우침, 죄의 고백, 회심의 외적 체험, 용서의 기쁨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경험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현상의 출저에 대한 신빙성이나 성도의 견인에 나타난 특성 그리고 성화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의 필요성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처럼 성경적 기준이 심각히 결여된 현상에 대한 비난은 분명히 건전한 교리와 성경에 기초한 설교 사역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웨일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절실히 요청된 것은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대리자의 사역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흥의 열기가 식을 수밖에 없었던 화근은 유감스럽게도 부흥운동이 한창인 시기에 싹텄다. 영적 결실을 채 거두기도 전에 성도의 수가 감소하고 교회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사회가 세속화되고 복음이 변질된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서 말씀이 가지는 절대적 권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다. 그것은 여느 때보다 부흥이라는 은혜의 시기에 더 큰 타당성과 중요성을 지닌다.103)
 
비록 프라이스가 로버츠의 부흥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거짓 부흥으로 폄하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가 피력한 로버츠에 대한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로버츠에 대해 공개적인 동정이 있었지만 이 비판은 거의 중단되지 않고 몇 달 동안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로버츠는 니스(Neath)에서 1905년 2월 22일부터 7일 동안 휴식과 갱신을 위해 공적 사역에서 잠시 물러났다.104) 이 침묵의 시간은 전 세계에 충격이었으나 로버츠는 계속 정진해 나갔다.105) 하지만 외부적인 도전과 영적 도전이 계속되면서 1905년 가을 쯤 에반 로버츠의 사역과 영향력은 현저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1906 년 4월에 제시-펜-루이스(Jessie-Penn-Lewis) 여사와 그녀의 남편은 곤경에 처한 전도자, 로버츠를 설득 레이스터셔(Leicestershire)에 있는 그레이트 글렌(Great Glen), 자신의 집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게 했다.106) 회복을 향한 길은 길고 어려운 것임이 입증되었다. 비록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펜 루이스 부부는 이주 지혜롭게 거의 모든 요구들을 거절했다. 이때로부터 로버츠는 공개적인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1907년부터 로버츠는 오직 기도에 전념했다.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그런 기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말씀을 전하거나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사역 대신 은밀하게 많은 이들의 구원을 놓고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비록 1906년 그가 더 이상 공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해 후, 1932년 10월 로버츠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역은 기도에 전념하는 일이었다. 말씀을 전하므로 나는 제한된 소수에게 접근할 수 있었으나 기도에 의해 그리고 기도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위해 전 인류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이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과 그것이 내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렵다.107)
 
1907년 이후 지난 25년 동안 로버츠는 오직 기도에만 전념해 오던 로버츠는 1930년 남부 웨일즈 카디프(Cardiff)로 이사했고 1951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채 일생을 오직 주님의 순결한 신부처럼 주님을 위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아직 펜-루이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동안 그는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의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연구인 성도들에 대한 전쟁(War on the Saints)라는 제목의 책을 제시 펜-루이스 여사와 공동으로 저술했다.108) 그들은 이렇게 기술했다. “부흥운동 후 어떤 신자 안에 있는 완강하고 고집 센 강퍅함은 인간 그 자신의 원천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을 속이고 그의 영혼을 사로잡아 그를 완고하고 비합리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령들로부터 온 것이다.109)
이 책은 웨일즈부흥운동이 초기 단계 이후 여러 타입의 광신(狂信)에 의해 훼손되었음을 암시해준다. 그것은 부흥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려는 사단의 권세에 대항하여 일련의 영적 전투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의 교본(a manual)으로 쓰인 것이다.
 
4. 웨일즈 대부흥의 영향
 
1) 놀라운 교회성장, 도덕적 향상, 사회개혁
 
웨일즈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주님께로 돌아오는 숫자가 급증했다. 불과 5주 만에 2만명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다.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칼빈주의 감리교회에 2만 4천명이 새로 영입되었고, 웨슬리 교회에는 4천명이 증가했으며, 회중교회에는 2만 6천 5백명의 교인이 증가했다.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1년 동안 증가한 총 교인의 수는 83,936명이었다. 웨일즈 대 부흥이 가져다 준 영향력은 단순히 숫적 증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평양대부흥운동이나 이전의 부흥운동과 달리 “에반 로버츠는 도박이라든가 부정직, 술취함, 불의 또는 부도덕에 대해 설교하지 않고, 구세주 되신 그리스도만 지적해 주었는데 도덕적 개혁과 사회개혁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웨일즈 부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어찌나 컸던지 한 동안 많은 죄인들이 웨일즈에서 거의 다 사라지다시피 할 정도였다.”110) 대부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 술주정뱅이와 도박사들이 그 악습에서 벗어났고, 가정불화가 치유되었으며 술집이 텅텅 비었다. 앵글시의 클랜페어(Llanfair)에서는 한 곳을 제외하고 모든 술집이 문을 닫았고, 글래스 모건에서 음주와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사람이 1903년 10,528명이었으나 1906년에는 5,490명으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빚을 갚았고 원수와 원수 사이, 형제와 형제 사이, 자매와 자매 사이의 거친 장벽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심지어 성령 안에서 교단의 장벽도 무너졌다. 무엇보다도 매일 밤 사람들로 가득차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났다.
가장 놀라운 사건의 얼마가 남부 웨일즈 광산촌에서 발생했다. 11월 말까지 부흥은 글래몰간(Glamorgan) 광산촌 대부분을 “파도처럼 휩쓸고 있었다.” 예를 들어 포스(Porth)에서 로버츠가 처음 방문하기 전 1주일 존스(R. B. Jones)가 광부들 가운데 대단한 축복과 기도를 목도했다.111)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사업의 질이 상당히 증진되었다고 보고했다. “쓰레기는 줄었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한 새 심령을 가지고 일상 업무에 들어갔다.”112) 그곳에는 음주, 게으름, 도박이 훨씬 더 줄어들었다. 가정마다 기쁨과 노래로 가득했으며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간증들이 집회마다 들려왔다. 책방마다 성경책이 품절되었고, 불신앙으로 가득하던 탄광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소로 변했으며 죄인들이 새사람으로 변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담임했던 위대한 회중교회 성경교사이자 설교가,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은 심지어 은혜 받고 달라진 변화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말들이 대단히 당황하게 되었다. 한 관리인이 내게 말했다. “운송업자들 가운데 얼마는 아주 하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을 심하게 걷어차거나 거친 욕지거리로 자신들의 말들을 다뤄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거친 욕이나 걷어차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말들을 일 시키는데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113)
 
무시무시한 죄악들이 고백되었고, 묵은 빚을 청산했으며, 극장이 문을 닫아야 했고, 광부는 물론 무신론자들이 회심했으며, 술주정뱅이, 도둑, 사기꾼들이 구원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었다. 개인의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개인의 삶의 변화로 이어졌고, 다시 개인의 삶의 변화는 사회개혁운동을 낳은 것이다. 웨일즈 부흥운동이 개인의 인격적 변화와 사회개혁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보여준다. 웨일즈부흥운동의 후속적인 결과를 기술하면서 존스(J. B. Jones)는 1930년에 웨일즈 부흥운동의 그 “분위기”는 아직도 웨일즈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했다.
 
2)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의식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의식은 웨일즈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중요한 결실 가운데 하나였다. 희한한 일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장소로 변했으며 오락이나 술잔치가 벌어지는 곳은 특히 텅텅 비었다. 어느 곳에서나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고, 사람들은 영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부흥운동이 발흥하면서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 현장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느꼈다. 마치 1857년 정오기도회로 인해 촉발된 미국의 부흥운동 당시 일어난 하나님의 강한 임재의식이 웨일즈 부흥운동 동안에도 나타났다. 물론 부흥회 장소에서 종종 그런 의식을 느끼는 것은 널리 알려졌지만 부흥회 장소가 아닌 일반 장소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의식은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가정이나 거리, 탄광이나 공장, 학교 심지어는 극장이나 술집에서 조차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술집에 들어가 술을 주문한 다음에는 그 술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카운터에 그대로 두고 발길을 돌려 나왔다. 여호와의 임재 의식이 어찌나 실재적이던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팔이 마비될 정도였다. 풋볼팀이라든가 그와 유사한 운동팀들도 해산되었다. 그 팀에 소속되어 있던 선수들은 경기를 하는 것보다 주님의 은혜의 체험을 간증하러 다니는 일을 더 즐거워했다. 탄광의 지하 통로나 바닥도 찬양과 기도의 장소로 바뀌었다. 광부들은 각자 일할 갱으로 뿔뿔이 흩어져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곳에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했다. 주간 학교 어린이들조차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어느 곳에서 함께 모여 아주 인상적인 모습으로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더라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곤 했다.“114)
 
부흥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전하면서 성령의 임재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성령께서도 개인, 가정, 교회, 심지어 사회마저 지배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3) 전 세계 부흥운동을 촉발시킨 원동력
 
1905년에 접어들면서 이반 로버츠는 널리 알려졌고, 그가 방문하는 곳마다 취재진들이 따라다녔다. 웨일즈 부흥운동의 소식은 곧 프랑스, 이탈리아, 포루투칼에까지 알려져 그곳 신문들이 웨일즈 부흥을 주요기사로 다루었다. 론다 벨리에서 열린 집회에는 프랑스, 러시아, 미국, 앵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1905년 2월에는 3명의 독일 여성과 6명의 프랑스 남성, 중국에서 찾아온 2명의 선교사, 수십명의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즈 북부 지역 목사와 설교자 그리고 일반성도들이 글래스모건셔의 낸티 모엘에 열리는 로버츠 집회에 참석했다. 이 가운데는 마이어(F. B. Meyer), G. Campbell Morgan, Gipsy Smith, 브리스톨의 페리어 흄(Ferrier Hulme), 에딘버러의 휴 블랙(Hugh Black), 런던의 올 소울스 교회(The Church of All Souls) 담임 웹스터(F. S. Webster), 스펄전 대학 학장 맥케이그(A. MaCaig), 아르메니아 인 베허스밀런(K. Behersmilan), 프랑스에서 온 카도 드 쇼네(Caddo de Chauney) 등이 포함되었다. 1904년 11월 29일 위대한 전도자 루벤 토레이(Reuben A. Torrey)가 로버츠에게 편지를 보내 조만간 그를 만나기를 희망하다고 피력했다.115)
 
하나님이 웨일즈 여러 지역에서 당신을 권능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하나님이 세계 각처에서 택한 사람을 친히 일으키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놀랍도록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너무도 절실히 요구되는 일입니다.
웨일즈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힘차게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순전하게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사람이 부르는 대로 가지 않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당신을 지키고 겸손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권능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 우리는 우쭐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물리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겸손히 만들고 더욱 큰 권능으로 당신을 채우시길 바랍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116)
 
웨일즈의 부흥운동 소식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포르투칼 같은 천주교 국가에서 상세히 보도되었고, 불란서 독일 미국 영국 전역으로부터 그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목도하기 위해 사람들이 웨일즈로 몰려들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영국, 노르웨이,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기도를 요청하는 편지가 답지했다.117) 로버츠는 이들 편지의 기도들이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을 선도하는 쪽으로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저명한 저널리스트, 종교지도자들, 호기심어린 구도자들, 그리고 기타 사람들이 목격자들과 지역 저널리스트들이 보고했던 것을 친히 목도하기 위해 웨일즈를 방문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그들의 기대는 결코 실망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웨일즈 부흥의 소식이 전해지는 곳마다 부흥의 불이 지펴졌다. 웨일즈부흥은 웨일즈와 콘윌 지역 전반에 강한 영향을 미쳤고 컴버랜드, 더함, 글로체스터셔, 햄프셔, 미들섹스, 노멈버랜드, 워윅셔, 웨스트모런드, 그리고 요크셔에도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아일랜드, 마다가스카르와 인도, 파카고니아, 유럽, 아프리카, 호주, 미국, 한국, 그리고 중국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마다가스카르와 인도에서는 “웨일즈 부흥운동을 거의 본뜬 것과 같은 형태로 부흥이 재현”118)되었다.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아삼(Assam)은 60년간 웨일즈 장로교선교사들이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소식이 이곳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웨일즈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그곳에서도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지금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소서. 웨일즈에 사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저희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특히 모플랑 지역 파리옹에서 개최된 3일간 집회 동안 그 같은 염원은 더욱 간절했고, 주님은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1905년 6월에 접어들면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인도 선교 현장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1906년 미국에서 발흥한 아주사가 오순절 부흥도 웨일즈 부흥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주인공 조셉 시무어(Joseph Seymour)는 웨일즈 부흥운동 소식을 접하고 그 같은 역사가 캘리포니아에도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성령께서 1906년 4월 9일 초대교회에 임한 것과 같이 강력히 임하셨다. 웨일즈 부흥과 오순절운동 사이에는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 성령의 은사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든가 성령세례를 부흥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는 것에서도 둘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 로버츠는 이렇게 주장한다. “성령세례는 부흥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부흥은 성령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되며 성령세례는 성령이 부흥의 권능으로 역사하도록 그분과 동역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흥을 위한 일차적 조건은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성령세례를 아는 것이다.”119) 성령 체험과 성령의 은사적 측면의 중시현상은 웨일즈 부흥과 미국 오순절운동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연속성이다. 이런 면에서 웨일즈 부흥운동은 미국 오순절 운동의 발흥과 저변확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일즈 부흥의 소식은 1906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을 통해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웨일즈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목도한 존스톤은 인도 방문 때 웨일즈 선교사들을 통해 인도에서도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 그는 1906년 9월 한국을 입국 서울선교사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웨일즈 부흥운동과 인도 카시아 부흥운동 소식을 한국에 전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강한 도전과 자극을 받았다. 이미 하디를 통해 부흥운동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소식은 같은 선교지인 한국에서 부흥운동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대단한 도전과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로버츠가 평소에 기도해온 대로 웨일즈에서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인도 카시아와 미국, 한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발흥한 1905년 인도부흥, 아프리카 부흥, 1906년 미국 아주사가 부흥, 1907년 평양대부흥, 1908년 만주 및 중국 부흥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부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웨일즈 부흥의 영향을 받았다.
 
맺는말
 
웨일즈 부흥은 확실히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주지하듯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놀라운 영적부흥운동의 발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인도, 아시아 미국, 아프리카 전역에 일어난 놀라운 부흥은 웨일즈 부흥운동의 소식에 적지 않은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우리는 다음 몇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웨일즈 부흥운동의 발흥과 저변확대에서 에반 로버츠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셋 조수아, 조셉 젠킨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활동을 무시할 수 없다.
둘째, 웨일즈 부흥운동은 칼빈주의 감리교, 장로교 배경 속에서 발흥했다. 부흥운동의 주요 지도자들로 쓰임받은 사람들이 모두 이 같은 배경 출신이었다. 칼빈주의 감리교운동이 웨일즈의 개신교를 주도하였고, 에반 로버츠의 활동무대를 제공해준 것도 장로교와 칼빈주의 감리교운동이었다.120)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은 이전의 부흥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말씀보다 찬양이 부흥에서 주를 이룬 것이다.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에서는 이전의 어떤 부흥운동에서보다 찬양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듣고 찬양하고 간증을 나누고 찬양하는 일들이 계속될 만큼, 전 집회의 4분의 3이 찬양일 만큼 찬양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이반 로버츠의 집회에는 찬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비록 그의 집회가 말씀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말씀 공부, 말씀 묵상, 말씀의 실천을 강조했던 이전의 부흥운동과 비교할 때 말씀보다 찬양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말씀보다 찬양과 주관적 체험이 강조되었다.
넷째, 자연히 웨일즈 부흥에서는 지나친 주관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이 이전의 웨일즈 부흥운동과 달리 감정적이고 신비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록 로버츠 개인의 체험에 의한 것이지만 웨일즈 부흥운동에서는 이전에 없었던 환상에 대한 체험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바로 이점이 말씀 중심의 사경회를 배경으로 한 한국의 부흥운동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의 경우 그 영향력이 지속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흥을 주도한 로버츠나 다른 이들의 신학적 훈련 부족과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버츠는 장로교나 칼빈주의 감리교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성령의 이해에 있어서 전통적인 가르침과는 달랐다. 이것은 신학적 부족이 낳은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찰스 피니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다섯째, 거의 모든 부흥운동에서 강조된 것은 철저한 죄의 회개였다. 웨일즈 부흥운동에서는 1859년 웨일즈 부흥이나 이전의 복음주의 영적각성운동처럼 죄에 대한 각성이 강하게 나타났고, 개인의 영적 각성이 사회변혁으로 이어졌지만 이전의 부흥운동에 비해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놀라운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발흥과 저변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사실이다. 웨일즈 부흥의 소식은 선교지 한국에 큰 자극을 주었고, 더욱 더 부흥을 사모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웨일즈와 달리 1890년부터 채택된 말씀 중심의 사경회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어 사경회를 통해 철저한 회개가 이어졌고, 개인의 영적각성이 사회각성과 사회개혁으로 이어져 역사 속에 존재한 어떤 부흥운동보다 건강한 부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후주]
l) Eifion Evans, The Welsh Rivival of 1904(Midgrma: Evangelical Press, 1969), 39.
2) Ibid., 39.
3) Ibid.,43.
4) Ibid., 45.
5) Ibid., 44.
6) Ibid., 47.
7) 에이비온 에반스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웨일즈 부흥이 케직사경회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그 발흥 단계에서 케직사경회는 웨일즈 부흥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Eifion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168-173.
8) R. B. Jones, Rent Heavens(Lοndon: Stanley Martin & Co., Ltd., 1930), 36. Wesley L.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1), 211에서 재인용.
9) Wesley L.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11.
10) Stephen F. Olford, Heart Cry for Revival,「부흥케하소서」, 이재범 역 (서울: 도서출판 나단, 1993), 35.
11) R. B. Jones, Rent Heavens,45.
12) Wesley L.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12.
13) W. T Stead, “The Story of the Awakening,”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New York: Fleming H. Revell, 1905), 59-60.
14) Ibid., 60.
15) Eifion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59.
16) Ibid., 61.
17) Ibid.
18) Eifion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66.
19) Ibid., 64.
20) W. T Stead, “Mr. Evan Roberts,”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 55-56.
21) Eifion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 64.
22) Ibid., 69. Wesley Duewell은 이 사건이 10월 28일의 사건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Wesley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18.
23) Ibid.
24) Ibid., 70.
25) Wesley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19.
26) David Matthews, I Saw the Welsh Revival(Chicago: Moody Press, 1951), 19.
27) Eifion Evans, Revival Comes to Wales,74.
28) Wesley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19-220.
29)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79.
30) Ibid.
31) Ibid., 72. “복음 마차의 바퀴가 머지않아 날쌔게 돌아갈 것이고, 그 일에 손을 제공하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 당신은 성령의 처분에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32) Stead, ”Mr. Evan Roberts,”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56-57.
33)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74.
34) Ibid.
35) Orr, Flaming Tongue, 6 7
36) Ibid.
37)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82.
38) Ibid., 83.
39) Ibid., 84.
40) D. M. Phillips, Evan Roberts(London: Marshall Brothers, Keswick House, Patermoster Row, 1923), 239-240.
41)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84.
42) Orr, Flaming Tongue, 8.
43)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87.
44) Ibid., 88.
45) D. M. Phillips, Evan Roberts,227-228.
46)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89.
47) Ibid., 90.
48) Ibid., 91.
49) Ibid., 117.
50) Western Mail,Cardiff, November 10, 1904, Orr, Flaming Tongue, 10.
51)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93.
52) Ibid., 93-94.
53) Ibid., 96.
54) Ibid., 94.
55) Ibid.
56) Ibid., 95.
57) Orr, Flaming Tongue,11;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95.
58) Evans, Revival Comes to Wales,95
59) Ibid., 102.
60) Ibid., 104.
61) Arthur Goodrich,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25.
62)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124.
63) Matthews, I Saw the Welsh Revival,29-30.
64)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124.
65)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124-25.
66) Matthews, I Saw the Welsh Revival,32-33.
67) Ibid., 35.
68) Ibid,, 37.
69) Wesley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15.
70) Wesley L. Duewe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34.
71)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127.
72) Stead, ”Mr. Evan Roberts,”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54.
73) Evans, Revival Comes to Wales, 113.
74) Orr, Flaming Tongue,12, and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104-5.
75) Eifion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 105.
76) Ibid., 106-107.
77)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107.
78) Ibid., 111.
79) Ibid., 115.
80) Matthews, I Saw the Welsh Revival, 61-62.
81) Phillips, Evan Roberts, 302.
82) 이런 결실에도 불구하고 북 웨일즈에서의 로버츠 사역은 남 웨일즈에서만큼 영향력이 크지 못했다. 그것은 북웨일즈에서 에반 로이드 존스와 메리 존스가 부흥운동의 발흥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3) Goodrich,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28.
84) Olford, 「부흥케 하옵소서」, 156-8.
85) G. Campbell Morgan, Lessons of the Welsh Revival(New York: Fleming H. Revell, 1905).
86) Ibid., 3.
87) Ibid., 7, 8, 11, 13, 14.
88) Wesley Duewel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30.
89) Olford, 「부흥케하옵소서」, 156.
90) Eifion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 99.
91) Ibid., 171-173.
92) Phillips, Evan Roberts, 303.
93) Stead, ”The Story of the Awakening,”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64-65.
94) Goodrich,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20-21.
95) Eifion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 131-132.
96) Ibid., 132.
97) Ibid.
98) Ibid., 131.
99) Ibid., 141.
100) Ibid., 163-164.
101) Ibid., 182-183.
102) Ibid., 164-165.
103) Ibid., 176-177.
104) Ibid., 135.
105) Matthews, I Saw the Welsh Revival, 75.
106) Ibid., 112.
107) Charles Clarke, Pioneers of Revival(London: Fountain Trust, 1971), 30.
108) Jessie Penn-Lewis and Evan Roberts, War on the Saints, 9th ed. (New York: Thomas E. Lowe, Ltd., 1973).
109) Ibid., 283-84.
110) Wesley L. Duewel,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36.
111) Ibid., 126.
112) Stead, “The Story of the Awakening,” in The Story of the Revival, 62.
113) G. Campbell Morgan, ”The Lesson of the Revival,” in The Story of the Welsh Revival,46.
114) R. B. Jones, Rent Heavens,43-44. 웨슬리 듀웰, 「세계를 뒤바꾼 부흥의 불길」, 215-216에서 재인용.
115) Evans, The Welsh Revival of 1904, 121.
116) Ibid., 120-121.
117) Ibid., 121 –122.
118) Ibid., 148-149.
119) Ibid., 191.
120) Ibid., 9.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7.12.18 18:38
  • 수정 2020.12.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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