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과 20세기 후반 미국부흥운동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을 도와주는 성령뿐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도와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더 늦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바로 오늘 당장 그리스도께 올 것을 간청합니다. 이번이 여러분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2005, 마지막 설교, Billy Graham
 
확실히 20세기 중엽 미국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영적갱신이 요구되었다. 그때만큼 미국이 강도 높은 위기를 만난 적도 드물다. 2차 세계대전 후 도덕적 쇠퇴가 절정에 달했고, 이혼율이 급증했다. 4가정 중 1가정이 이혼했고, 그 수치는 점점 더 높아졌으며, 알코올 중독자들이 600만 명이나 되었다. 자유주의가 대부분의 신학교들을 포함하여 고등교육 기관들을 점령했다.
확실히 미국은 이전과 달랐다. 전후 베이비붐이 보여주듯 낙관주의적인 사고가 사람들을 지배했고, 사람들은 번영의 길목에서 점점 더 영적 가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20세기 중엽의 부흥운동은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전통적인 신앙적 가치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중엽 부흥운동은 어떤 면에서 신학적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20세기 중엽 10년 동안에 두 개의 분명한 영적 갱신의 흐름이 발흥했다. 하나는 빌리 그래함의 사역과 크리스천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잡지가 보여주듯이 보수주의, 복음주의 기독교의 발흥이었다. 두 번째는 오랄 로버츠와 다른 이들의 사역으로 특징되는 은사주의 부흥운동이다.
종교적 도덕적 위기 속에서 1945년 이후 미국은 몇 차례 부흥을 경험했다.1) 역설적이지만 에드윈 올슨(Edward Elson)이 지적한 것처럼 미국에서 세계 2차 대전 이후 시대는 종교적 활동을 확장하는 시기였다. 1959년 제럴드 긴리치(Gerald Tra Ginrich)는 그의 시대 기독교의 부흥의 한 가운데 있다고 믿었다.2) 빌리 그래함도 1954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 역사에서 비교할 수 없는 종교적 부흥이 요원의 불길처럼 영어권 세계를 휩쓸고 있다. 수백만 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각성운동이 임했다. ··· 나는 미국, 영국, 유럽대륙,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수백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왔다. 모든 곳에서 나는 영적 토대를 찾고 있는 생생한 증거들을 목도해왔다.3)
 

1950년 7월 14일 한국의 전쟁위기에 트루만 대통령이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백악관 뜰에서 그의 동료들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

1949년 37%였던 주일 출석률이 1950년에는 39%로, 1955년에는 49%로 증가했다. 1954년 국회는 국기에 대한 충성 서약에 “하나님 앞에서”(under God)라는 단어를 추가하였다. 1953년 수도에 기도실이 세워졌고, 종교서적들이 매진되었다. 1949년 7백만이던 남침례교 교세는 1960년 9백 50만으로 성장했다. 1951년 남침례교 연맹은 남부 밖에서 선교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내지선교회와 남침례교 소속이 아닌 다른 선교기관들이 동역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게다가 이 시대만큼 문명의 이기가 종교적 확산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았던 시기는 없었다. 1857-59년 기도부흥운동이 전보를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면 1950년대 이후의 부흥운동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이 시대 부흥운동의 저변확대를 가져다 준 배경을 보면 확실히 당시의 부흥운동은 문화적 도구를 통해 널리 소개되고 확산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가도, 문화적 도구가 달라도 공통된 것은 기도와 말씀이 부흥운동의 발흥과 확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한번에 3만 명이나 되는 지금까지 가장 큰 군중들이 아이오와에서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흥미롭게도 빌리 그래함,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제리 파웰(Jerry Falwell), 지미 스와가르트(Jimmy Swaggart), 베이톤 루지(Baton Rouge), 그리고 팻 로버슨(Pat Robertson)에 이르기까지 세계 2차 대전 후 미국 부흥운동을 주도한 유명 인사들은 모두 남부 출신자들이었다.4) 이들 남부 출신 부흥운동 지도자들은 남부 밖에서 예기치 못한 놀라운 영혼구원의 황금수확을 거두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부흥을 대변하는 인물은 역시 빌리 그래함이었다. 그는 20세기 후반 미국의 영적각성운동의 발흥과 저변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대 전통적인 부흥과는 성격이 다른 은사주의운동이 미국 한편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지저스운동, 은사주의부흥운동, TV 복음전도자들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지저스 운동(the Jesus movement)은 1960년대 많은 사회적 탈락자들이 교회와 접촉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고, 교파적 은사주의자들은 주요 교단들로 하여금 성령의 사역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었다. 제리 파웰(Jerry Falwell)과 같은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들과 윌리엄 브란함과 오랄 로버츠와 같은 신유 복음전도자들은 많은 신자들에게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도전을 주었으며, 복음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었다.
 
1. 빌리 그래함과 근대 복음주의 부흥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갱신의 메시지요,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해왔다. 그는 1978년까지 250개 전도집회에서 무디를 넘어 역사상 그 어떤 설교자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985년까지 그는 자신의 전도집회와 다른 집회에서 1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거의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신앙상담을 받았다.5)
 
빌리 그래함 성장 및 교육 배경
빌리 그래함은 1918년 11월 7일 노스캐롤라이나 샤롯의 낙농장에서 태어났다.6) 아침저녁으로 소젖을 짜는 일은 그에게 맡겨진 힘든 허드레 일 가운데 하나였다. 어머니가 감리교 부흥운동 지도자 밥 존스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기는 했지만 가족들 모두는 개혁장로교회를 출석했다.7)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모디카이 함(Mordecai F. Ham, 1877-1961)이었다. 함은 켄터키에서 태어나 침례교 부흥사가 되기 전 1900년까지 농사를 지으며 사업을 하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전도자가 된 인물로 현대주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을 때 금연금주를 강조하고 자유주의와 진화론에 용기 있게 맞섰다.8) 함의 전도사역을 통해 3만 명 이상이 주께 돌아왔다. 함이 1934년 9월부터 11월까지 샤롯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래함이 그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을 경험했다. 그 때 그래함은 의류상인 프리배트(J. D. Prevatte)의 신앙 상담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 1936년 그래함은 밥 존스 대학에 진학했다가 한 학기만 마치고 지금은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이 된 플로리다 템파에 있는 프로리다성경학교로 적을 옮겼다. 그래함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 학교 재학 중에 학감 존 마인더(John Minder)의 강력한 요청으로 프로리다 팔락카(Palatka) 가까이에 위치한 한 침례교에서 설교를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그의 배려로 템파 가스풀 교회(Tempa Gospel Tabernacle)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그러던 1938년 3월 그래함은 강력한 부르심을 체험하고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그는 1939년 남침례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듬해 성경학교를 졸업했다.9)
그가 휘튼대학으로 적을 옮긴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빌리 그래함은 휘튼대학교 학장 레이몬드 에드먼(Raymond Edman)의 어머니, 그의 형제 엘너(Elner), 그리고 폴 피셔(Paul Fisher)가 1940년 프로리다 성경학교 근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칠 때 캐디로 섬긴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피셔가 그래함에게 만약 휘튼대학에 간다면 기숙사 비용을, 엘너가 1년 학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940년 9월 휘튼대학에 진학한 그래함은 얼마 후 캠퍼스에서 중국 의료 선교사 넬슨 벨(L. Nelson Bell)의 딸 루스 벨(Ruth Bell)을 만나 3년 후에 결혼했다.10) 평양외국인 학교를 졸업한 루스는 훗날 빌리 그래함이 한국과 지속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을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했다.
그래함은 이미 성경학교에서 성경관련 과목을 많이 이수했기 때문에 장차 복음전도자로서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인류학을 택했다. 마침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많았던 알렉산더 그리고리아(Alexader Grigolia) 교수가 새로운 인류학과 학과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인류학은 그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11)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휘튼대학은 그의 생애의 영적 지적 전환점이었다. 휘튼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면서 작은 운송 사업을 운영하였다. 그런 중에도 1941년 7월부터 과거 에드먼(Edman) 박사가 목회하던 가스풀교회(Gospel Tabernacle) 담임을 맡았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로버트 밴캄펜(Robert VanKampen)의 권유로 일리노이 웨스턴 스프링스 제일침례교회를 담임했다.
YFC 토레이 존슨과 그의 동료들
그 기간 그래함은 스피닝 휠(Spinning Wheel) 레스토랑에서 남자들을 위한 저녁집회를 시작했는데 3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참석해서 그의 설교를 들었다. 1943년 10월부터는 토레이 존슨(Torrey Johnson)으로부터 솔리스트 조지 비버리 쉬(George Beverly Shea)와 함께 “한 밤의 찬양”(Songs in the Nights) 프로그램을 맡았다. 1944년 5월 20일 토레이 존슨의 부탁을 받고 그가 인도한 시카고 오케스트라 홀 YFC 집회 때는 참석한 2,800명 중 42명이 초청에 응했다.
그래함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기간 유행성 이하선염(mumps)으로 군복무를 면제 받은 후에는 토레이 존슨의 부탁을 받고 2년 동안 YFC를 위한 풀타임 계획자 및 복음전도자로 섬겼다. 1945년에는 20만 마일을 여행하며 47개 주에서 집회를 가졌고, 그 기간 동안에 가진 디트로이트 집회에서는 16,000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에게 설교했다. 클립 바로우(Cliff Barrows)가 이 때 찬양 리더로 그래함과 합류했다.12)
1946년 초 토레이 존슨의 요청으로 스트라톤 셔펠트(Stratton Shufelt)와 찰스 템플톤(Charles Templeton)과 함께 영국에 건너간 그래함은 웨일즈에서 열린 집회 때 스테반 올포드(Stephen Olford)의 도움을 받고 성령충만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훗날 빌리 그래함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토레이 존슨과 빌리 그래함 일행은 1946년 10월과 1947년 3월 사이 두 번째 영국 전도여행 기간에 영국의 27개 도시에서 360회 집회를 가졌다. 영국에서 돌아온 그래함은 윌리엄 라일리(William B. Riley)로부터 700명이 넘는 노스웨스턴 학교 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1947년부터 1952년까지 5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다.13) 교장직을 맡으면서도 그래함은 복음전도자로 계속 섬겼다.
 
강력한 회심과 놀라운 성령의 역사
1947년 6월 24일에 헐리우드의 제일장로교회 기독교교육 책임자 헨리타 미어스(Henrietta Mears)가 가까운 산에 있는 훠리스 홈(Forest Home)에서 열린 교사와 지도자 컨퍼런스에서 설교했을 때 성령이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했다. 새로 회심한 빌 브라이트 (후에 CCC 설립자)를 포함한 일단의 젊은 리더들이 헨리타 미어스와 함께 밤늦게 모여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대학캠퍼스 팀 사역의 비전을 주셨다. 그런 후 1949년 연례대학브리핑 컨퍼런스가 훠리스트 홈에서 열렸을 때 그래함과 에드윈 오가 설교했는데 이 때 그래함이 산에서 혼자 기도하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한 층 더 능력의 전도자가 되었다. 그해 9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8주간의 빌리 그래함의 L. A. 천막집회는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이 후 그는 교파를 초월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14)
Forest Home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빌리 그래함과 빌 브라이트
윌리엄 헐스트(William R. Hearst)의 제안으로 헐스트 신문이 빌리 그래함을 좋게 보도하면서 그래함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의 성공을 위한 4,600개의 기도회가 열렸다. 로스앤젤레스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 중에는 라디오 카우보이 가수 스튜어트 함블렌(Stuart Hamblen), 노름꾼 미키 코헨(Mickey Cohen)과 함께 일하는 전자[악기] 전문가 짐 바우스(Jim Vaus), 그리고 올림픽 경기 우승자 루이스 잠페리니(Louis Zamperini)가 포함되었다. 8주 동안의 집회에 35만 명이 참석했고, 그중 약 3천명이 결신했다.
그가 1950년 1월 보스턴 팍 스트리트 교회에서 가진 전도집회 때는 13,000명의 군중을 다 수용할 수 없어 교회 옆 보스턴가든으로 옮겨야 했다. 105,000명이 참석한 그의 보스턴 집회에서 3천명이 결신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컬럼버스에서 1950년 5월에 가진 빌리 그래함 집회는 윌리스 헤이마커의 제안으로 처음으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crusade”)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여기서 빌리 그래함은 버나드 바루치(Bernard Baruch)를 통해 중국 주재 선교사 아들이자 타임(Times), 라이프(Life), 그리고 포츈(Fortune)을 창간한 헨리 루스(Henry Luce)를 만났다. 루스는 그래함에게 그 후 계속해서 자신의 잡지에 빌리 그래함과 그의 사역에 관한 기사를 내보냈다.
1950년 7월과 8월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열린 그의 전도집회에는 50만 명 이상이 참석해 5,000명이 결신했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담은 첫 영화가 그레이트 컴미션 필름 회사(Great Commission Films)의 딕 로스(Dick Ross)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필름 제목은 20세기 중엽 전도집회(Mid-Century Crusade)였다.15) 존 폴록은 빌리 그래함 방송 선교 사역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전국적인 방송망을 가진 라디오를 운영하라는 요청을 받고 하나님께서 25,000달러를 공급해주시면 그 일을 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확히 그 금액이 들어왔다.”16)
그래함은 1950년 11월 5일에 아틀란타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그의 아내 룻의 제안에 따라 그 프로그램 이름을 “결단의 시간”(The Hour of Decision)이라고 붙였다. 그 방송은 미국에서 750개 방송국에서 송출되었고 1984년부터는 해외에도 송출되어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송을 들었다.
그래함은 1954년 3월 영국에 다시 건너가 런던 해링게이 경기장(Harringay Arena)에서 집회를 가졌고, 대규모 윔블돈 스타디엄에서 가진 그의 마지막 영국 집회 때는 2천명이 결신했다. 이 기간 총 2백만 명 이상이 그의 집회에 참석해 38,000명이 결신했다. 전도집회에 불신 친구들을 데려오는 앤드류 작전(Operation Andrew)이 1955년 스코틀랜드 전도집회 때 처음 도입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총 2,650,000명이 참석해 52,000명이 결신했다.17)
 
1957년 빌리 그래함 뉴욕집회와 전국적인 영향력 확대
1957년 5월 15일부터 9월 1일까지 16주간 동안 뉴욕 메드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전도집회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집회였다.18) 메디슨 스퀘어 가든은 뉴욕 맨하탄 7번 애브뉴와 29번 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둥근 돔형의 스타디움과 그보다도 높고 거대한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메디슨 스퀘어 가든은 맨하탄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입구 한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The World's Famous Arena)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16주간 메드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에는 240만 명이 참석했고 결신자가 61,000명 이상이 나왔다. 그 집회를 통해 빌리 그래함은 미전역을 대변하는 부흥사로 부상했고, 그 집회는 미국, 아니 전 세계의 복음주의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1963년 빌리 그래함 콜리시엄(La Coliseum) 전도대회
1959년 2월부터 5월까지 호주와 뉴질랜드의 주요 도시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에는 325만 명이 참석해 15만 명이 결신했고, 1960년 열린 아프리카 전도집회 때는 약 4만 명이 결신했다. 1967년 빌리 그래함 영국 전도집회 때 처음으로 유선 텔레비전을 채택해 영국 25개 주요 도시에 동시에 방영했고, 3년 후 1970년 4월 도트문드(Dortmund)서 열린 유로 70 전도집회 때는 유럽 10개국 36개 센터를 통해 유선 텔레비전으로 유럽 전역에 방영했다. 1973년 6월 3일 한국의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에서는 하루에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들었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 후 그는 헝가리(1977), 폴랜드(1978), 그리고 소비에트 공화국(러시아, 1982)에서 차례로 대규모 전도집회를 가졌다.19)
1959년 빌리 그래함 호주 전도대회
빌리 그래함은 집회에 앞서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기도 그룹들이 결성되었고 다가오는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위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 줄 것을 호소했다. 수천 명이 참가하는 4천개 이상의 기도회가 열려 그의 전도 집회를 위해 기도했다. 수천 명의 상담사 훈련이 각 전도집회 전에 이루어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집회 기간 중에 갱신 혹은 구원의 확신을 경험했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이 등록하고 연습을 했다. 1958년 이후 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마다 전도학교에 5천명이나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지원했다. 1981년 시작된 전화 상담 센터를 통해 1984년까지 208,000명이 신앙상담을 받고 그 가운데 96,000명이 결신했다.
1952년에 시작된 그의 칼럼 “나의 대답”은 1975년까지 200개 신문에 게재되었다. 선 오일(Sun Oil) 회사의 하워드 퓨(J. Howard Pew)의 재정지원과 그래함의 장인 넬슨 벨(Nelson Bell)을 책임편집인으로 한 크리스천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가 1954년에 창간 준비를 시작하여 칼 헨리(Carl F. H. Henry)를 초대 편집장으로, 1956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다. 신학과 종교 소식을 다룬 그 잡지의 논고들을 통해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유익을 얻었다. 크리스천니티 투데이는 얼마되지 않아 교파를 초월하여 대표적인 기독교 정기 간행물로 자리 잡았다. 셔우드 워트(Sherwood Wirt)를 편집장으로 디시전(Decision)이 1960년에 창간되어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의 소식을 제공하고 갱신과 전도를 촉진하였다. 1984년까지 그 잡지는 2백만 이상의 가정에서 구독했다.
1953년에 출판된 그래함의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는 약 125만부가 판매되었다. 어떻게 중생을 받는가(How to Be Born Again) 초판은 약 80만부가 판매되었는데, 초판으로는 가장 많이 팔린 것이다.20) 계시록 첫 장에 기초한 어프로칭 홉비츠(Approaching Hoofbeats)는 1983년 10월 출판된 이후 50만부 이상이 팔렸다. 예수 세대(The Jesus Generation)는 출판 후 첫 2주 동안에 20만부가 팔렸고, 천사들: 하나님의 비밀 기관들(Angels: God's Secret Agents)은 90일 내에 100만부가 팔렸다.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
 
그리스도에 대한 젊은이 소명 (Calling Youth to Christ, 1947)
미국의 결단의 시간 (America's Hour of Decision, 1951)
나는 전장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보았다 (I Saw Your Sons at War, 1953)
하나님과의 평화 (Peace with God, 1953, 1984)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악에서의 자유 (Freedom from the Seven Deadly Sins, 1955)
행복의 비결(The Secret of Happiness, 1955, 1985)
빌리 그래함의 10대와의 대화 (Billy Graham Talks to Teenagers, 1958)
나의 대답 (My Answer, 1960)
당신 질문에 대한 빌리 그래함 답변(Billy Graham Answers Your Questions, 1960)
세계의 불꽃 (World Aflame, 1965)
도전 (The Challenge, 1969)
예수 세대 (The Jesus Generation, 1971)
천사들: 하나님의 비밀 기관들(Angels: God's Secret Agents, 1975, 1985)
어떻게 중생을 받는가 (How to Be Born Again, 1977)
성령 (The Holy Spirit, 1978)
아마겟돈까지(Till Armageddon, 1981)
어프로칭 홉비츠(Approaching Hoofbeats, 1983)
전도자의 성경적 기준(A Biblical Standard for Evangelists, 1984)
눈을 들어 산을 보라 (Unto the Hills, 1986)
죽음과 사회 생명에 직면하여 (Facing Death and the Life After, 1987)
삶의 문제에 대한 답변 (Answers to Life's Problems, 1988)
고민하는 심령들을 향한 희망 (Hope for the Troubled Heart, 1991)
폭풍 경고 (Storm Warning, 1992)
내 모습 그대로: 빌리 그래함 자서전 (Just As I Am: The Autobiography of Billy Graham, 1997, 2007)
매일의 희망 (Hope for Each Day, 2002)
개인 평화 열쇠 (The Key to Personal Peace, 2003)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뉴욕전도대회 (Living in God's Love: The New York Crusade, 2005)
여행: 불확실한 세계에서 믿음으로 사는 방법 (The Journey: How to Live by Faith in an Uncertain World, 2006)
본향 가까이: 삶, 믿음, 말년의 행복 (Nearing Home: Life, Faith, and Finishing Well, 2011)
하늘 응답 책 (The Heaven Answer Book, 2012)
나의 소망의 근거: 구원 (The Reason for My Hope: Salvation, 2013)
 
휘튼 대학에 있는 빌리 그래함 센터
복음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실천의 대변자로서 그래함은 주의 깊게 일관된 복음주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는 신학적 우파(그래함이 신학적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해왔다고 종종 느끼는 자들)와 신학적 좌파(빌리 그래함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판하는 자들)의 비판에 답하기를 거부했다. 이 같은 정책은 가까운 친구이자 빌리 그래함 협회 이사회의 멤버였던 레이몬드 에드먼(V. Raymond Edman)에 의해 수년 전 제안되었다. 이 정책은 그를 신학적 논쟁에서 빗겨가고 그의 전도집회와 저술들을 통해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폴랜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시작으로 그는 시청각 기술을 활용해 인쇄용지를 공급했다. “숨겨진 장소”(The Hiding Place: The Triumphant True Story of Corrie Ten Boom) 같은 영화는 수백만 명이 시청했고, 그 결과 수천 명이 결신했다. 1984년까지 그의 전 세계 영화기구(Worldwide Films organization)를 통해 약 130개 영화가 제작 배포되었다.
빌리 그래함 조직은 또한 부흥과 전도를 촉진하기 위한 대규모 컨퍼런스를 후원하고 지원하였다. 베를린 세계전도대회(The World Congress on Evangelism)는 1966년 10월 스탠리 문니험(Stanley Mooneyham)의 지도하에 그래함 조직과 크리스천니티 투데이가 후원했다. 약 1,200명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세계전도의 관련성, 긴박성, 본질, 그리고 문제점에 대해 논의했다. 아시아인들이 주도한 유사한 아시아인 컨퍼런스가 1968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1974년 7월에 돈 호크(Don Hoke)와 폴 리틀(Paul Little)이 인도한 로잔대회는 150개국에서 2,400명이 참석했다. 참석자의 3분의 1이 제 3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로잔대회는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인 오류 없는 영감된 성경에 충실할 것을 선언하였다. 또한 로잔대회는 복음전도와 같은 주된 의무뿐만 아니라-사회적 관심과 행위가 복음의 필수 요소라고 선언했다.21)
2005년 6월 두번째 날 메도우스 코로나 팍 집회 광경
2005년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뉴욕 퀸스의 훌러싱 메도우스 콜로나 팍(Flushing Meadows Corona Park)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전도대회 때는 3일 동안 25만 명이 참석했다. 빌리 그래함은 대회 첫날 10만의 청중들을 향해 사랑과 애정 어린 심령으로 수차례 이렇게 반복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뉴욕 메드슨 스퀘어 가든 대회 후 5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메시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빌리 그래함의 오랜 협력자 크립 바로우스의 말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가 개개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빌리 그래함이 일생동안 외친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바로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의 사역을 후원하는 주된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말년 그래함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도하는 알라바마 인권 회복운동 데모 대열에 합류한 많은 목회자들과 함께 셀마에 가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의 신화는 사후에도 여전히 빛날 것이다.
 
[후주]
1) 1949년부터 1960년까지는 미국교회가 효과적으로 복음전도를 수행하는 기간이었다. 비록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시대는 일반적으로 부흥운동 기간으로 기술할 수 있다. 에드윈 오, 역사가 크리포드 올스테드(Clifford Olmstead), 프레드 호프만(Fred Hoofman), 그리고 아더 존슨(Arthur Johnson) 교수는 모두 참된 부흥운동이 그 기간을 특징짓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존슨은 심지어 그 기간을 제 4차대각성운동이라고 불렀다. 반면 에드윈 오는 이 시대 부흥운동을 지칭하면서 “세기중엽 발흥”(the "Mid-Century Resurgence")이라는 좀 더 강도가 낮은 표현을 사용했다. 에드윈 오는 이 시대 부흥이 참된 영적각성이지만 18세기나 19세기에 일어난 앞선 부흥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평했다.
2) 긴리치는 1950년대 미국교회 부흥을 그 앞서 일어난 웨슬리부흥, 1차 대각성운동, 1800년대 부흥, 찰스 피니 부흥, 1957년 평신도기도부흥, 웨일즈부흥운동, 한국평양대부흥, 무디 부흥, 채프먼 부흥, 집시 스미스 부흥, 그리고 빌리 선데이 부흥과 비견했다.
3) Billy Graham, "Our Great Secret Weapon" The American Magazine 158 (November 1954): 19.
4) David Edwin Harrell, Jr., "American Revivalism from Graham to Robertson," Modern Christian Revivals, eds. Edith L. Blimhofer and Randall Balmer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1993), 194. 그래함의 뿌리는 노스캐롤라이나 농장이었고, 로벗슨과 파웰은 버지니아에서 성장했으며, 스와가르트는 오클라호마 오순절운동의 후예였다. 유일하게 남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로버트 슐러였다.
5) E. Earle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Revival Their Leaders from the Great Awakening to the Present (Wheaton: Tyndale House Publishers, 1986), 220-230
6) William G. McLoughlin, Jr. Modern Revivalism: Charles Grandson Finney to Billy Graham(New York: Ronald Press, 1959), 484.
7) Harrell Jr., "American Revivalism from Graham to Robertson," 195, 220.
8)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221.
9) Billy Graham, Just As I Am: The Autobiography of Billy Graham(Grand Rapids: Zondervan, 1997), 59.
10) Graham, Just As I Am: The Autobiography of Billy Graham, 71-70.
11) Graham, Just As I Am: The Autobiography of Billy Graham, 65.
12)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222.
13) McLoughlin, Jr. Modern Revivalism, 488.
14) McLoughlin, Jr. Modern Revivalism, 489.
15)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223.
16) J. Pollock, Billy Graham: The Authorized Biography(London: Hodder & Stoughton, 1966), 116.
17)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224.
18) McLoughlin, Jr. Modern Revivalism, 519.
19)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224.
20)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226.
21) Cairns, An Endless Line of Splendor, 227.
 

2018년 2월 21일, 근대 복음주의 부흥의 주역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 목사가 소천하였습니다. 그를 추모하며 그에 대한 박용규 교수의 글을 싣습니다. 본 글은 박용규, 『세계부흥운동사』, 개정판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6): 937-955에 실린 내용입니다. 주석은 원래 각주로 되어 있으나 본 글에서는 후주로 변경하였습니다.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18.03.0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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