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위대한 별이 지다.

아시아 복음주의 신학의 거성(巨星), 한철하(韓哲河)

한국교회의 위대한 별이 지다.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대표적인 아시아 복음주의 신학자 한철하가 2018년 3월 18일 새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아세아신학협의회(ATA), 한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아세아칼빈학회의 회장, 24년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의 원장과 총장을 지낸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였다. 세계복음주의교회는 빌리 그래함에 이어 또 하나의 큰 별을 잃었다.
 
한철하는 빌리 그래함보다 5년 늦은 1924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여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사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한국근대화와 민주화 발전을 온 몸으로 경험했다. 평양고등보통학교(1942)와 일반산구(山口)고등학교(1942)를 졸업한 한철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종교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Th.M.)와 레이놀즈 선교사가 졸업한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Th.D.)를 졸업하고 돌아와 1960년 이후 조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만큼 많은 신학적 족적을 남긴 한국 학자도 드물 것이다.
 
첫째, 그는 신학자 중의 신학자였다. 그만큼 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평생 신학 연구를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한 길을 걸어간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세아신학협회”(ATA), “한국칼빈주의신학회,” “한국복음주의신학회”(KETS)를 태동시키고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총신대학교, 장신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는 그의 영향이 깊이 남아 있다. 칼빈주의자든 웨슬리주의자이든 한국신학계는 그에게 너무도 큰 빚을 졌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한 <고대기독교사상>은 교부신학연구의 보고(寶庫)가 되었고, 서양신학을 비판한 “성경신앙에 대한 서구 신학의 비평적 평가”(A Critical Evaluation of Western Theology toward a reappraisal the biblical faith)는 서구신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그의 학문적 족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대단하다.
 
둘째, 단순히 학문적 족적을 넘어 후학을 양성하고 한국교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배출하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한철하는 평생 학교의 교목, 교사, 교수, 학장, 총장으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다. 대광고등학교 교사(1950-1954), 연세대학교 교목(1954), 총회신학교(총신대 전신) 교수(1960-1963), 장신대학교 교수 및 대학원장(1964-1973), ACTS(Asian Center for Theological Studies and Mission) 학장, 총장(1974이후 24년 동안)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인재양성을 위해 바쳤다. 그만큼 많은 제자를 양성한 학자도 드물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신학자로, 교회 지도자로, 선교사로 전 세계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셋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립과 1981년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창립을 통해서 한국복음주의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그만큼 복음주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학문적 활동을 해온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진보주의 신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고, 토착화신학운동이 발흥할 때는 토착화신학에 대하여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분명한 답변을 했으며, 1967년 신앙고백 문제가 나왔을 때도 침묵하지 않고 1967년 신앙고백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그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했고, 기독교 2천년의 기독교 신학전통을 존중했으며 그런 자신의 확신을 신학교 강의, 학회활동, 저술을 통해 피력하였다.
 
넷째, 한철하는 교회를 위한 신학자였다. 보통 신학자들의 글이나 강의가 신학적 담론으로 그치는 경우가 참 많다. 하지만 한철하는 평생 동안 일관되게 교회를 위한 신학을 천명하고 실천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제네바의 개혁자 존 칼빈과 너무도 닮았다. 한철하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였지만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처럼 칼빈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삼지 않았다. 세계칼빈학회와 아시아칼빈학회 그리고 한국칼빈학회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그만큼 존 웨슬리 생애와 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웨슬리와 칼빈의 통시적 연구에 천착한 신학자도 드물 것이다. ‘복음’과 ‘회개’가 그의 글에 일관되게 강조되었고, 신학과 교회가 괴리되지 않았다.
 
그의 부르심은 한국복음주의 교회로서는 너무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철하는 탁월한 수많은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겼다. 필자가 볼 때 그가 남긴 족적은 훗날 더 높은 평가, 더 많은 예찬을 받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가 이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미 많은 결실을 맺었지만, 그 결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한철하 그는 한국교회에 거룩한 책무를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교회는 그가 이루지 못한 복음주의 이상을 더욱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18.03.20 22:19
  • 수정 2020.12.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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