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신학지남 제59권 제4집(1992.12): 131-159

찰스피니와 완전주의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신학지남 제59권 제4집(1992.12): 131-159
 
 
목차
 
19세기 미국에서는 영혼 구원의 과정에 대한 논중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구원 교리가 보다 알미니안주의적인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구원에 있어서 자유 의지의 역할과 인간의 반응이 더욱 크게 역설되었다. 즉각적 회심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강조되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부홍 운동의 방법들도 점차 실제적 구원 체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1)
찰스 그랜디슨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는 19세기 미국에서 회심 체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복음 전도자일 것이다. 한 역사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논평하였다. “19세기 미국인들의 회심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유명한 전도자 찰스 그랜디슨 피니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2) 피니의 회심 체험(conversion experience)과 전도자로서의 순탄한 성공은 “새로운 수단들“(new measure)과 자신의 신학 체계, 특히 그의 완전주의(perfectionism) 교리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는, 죄인들의 회심에는 그에 상웅하는 모종의 사회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전 성화’를 가일충 요란하게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피니의 신학에서 죄는 자발적인 행위였으며 이론상으로 피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이었다. 까닭에 성결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었다.”3)
피니와 오벌린(Oberlin)의 완전주의 교리에 대해서 지금까지 몇몇 학자들의 훌륭한 연구가 있었다.4) 본 논문의 목적은 찰스 피니의 완전주의 교리와 오벌린의 완전주의 교리를 19세기 미국 부홍 운동의 맥락에서 탐구하는데 있다. 주 자료는 「조직신학」(Lectures on Systematic Theology),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강론」(Lectures to Professing Christians), 「성화」(Sanctification), 그리고 「회고록」(Memoirs) 등이 될 것이다.
찰스 피니와 오벌린의 완전주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극히 중요한 것은, 이 이슈가 뜨거운 논쟁거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교리가 이 시기 미국 부홍 운동의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변화에 관한 본질적인 정보를 또한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5)
 
피니의 역사적인 배경과 환경은 자연적으로 그의 완전주의 교리 형성과 발전에 상호 영향을 미쳤다.6) 완전주의(Perfectionism)는 1820년대 후기에 서부 뉴욕으로 뚫고 들어갔다. 부흥 집회의 과도한 홍분을 타고 혹자들은 자칭 설교가 혹은 예언자로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종종 모종의 완전주의적 양상을 담은 열광주의적 관념을 가진 집단들을 조직하였다. 추종자들 가운데 다수가 처음에는 감리교도로 출발하였으나 그 후 여러 갈래의 개별적 방향으로 분리되었는데, 혹자들은 중도적인 길로, 혹자들은 급진적인 길로 들어섰다.7) 이러한 시기에 피니는 서부 뉴욕에 도착하여 많은 인물들과 함께 이런 환경에 접하여야 했다. 이윽고 피니는 완전주의적 부홍 운동의 장본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상하였다. 1843년과 1860년 사이에 소위 “부홍운동 중심지”(burned-over district: 뉴욕 근교에 있는 부홍운동 중심지를 가리킴)에 세 개의 완전주의 조직체가 설립되었다. 1843년에 조직된 웨슬리안 메쏘디스트 완전주의자들(Wesleyan Methodist Perfectionists), 1848년의 오네이다 완전주의자들(Oneida Perfectionists), 그리고 1860년의 프리 메쏘디스트 완전주의자들(Free Methodist Perfectionists)이 그것이다.8)
 
찰스 피니(1792-1875)는 1821년 10월 10일에 극적인 회심 체험을 하였다.9) 그리고 그 후 즉시 유능한 부흥 설교가가 되었으며10) 결국은 죠지 휫필드를 제외한다면 최초의 국제적 명성을 떨친 전도자가 되었다. 부흉사로서의 피니의 탁월한 성공은 1826년부터 1831년까지의 어간에 이루어졌다. 그 기간에 피니는 뉴욕 주 상부의 “부홍운동 중심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집회를 여는 곳마다 회심자들을 획득하였다.11) 1820년대 후반과 1830년대 초에 피니는 부홍 집회를 통해 “부홍운동 중심지”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회심과 개인적 의를 역설한 순회 설교가로서의 그의 위대한 성공은 자신의 공식적인 신학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몇 년간 순회 설교가로서 사역을 행한 후 피니는 1832년에 뉴욕시의 캐덤 스트리트 교회(Chathan Street Church)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다. 뉴욕에서 장로교회의 목사로 있는 동안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신앙 부홍 강론」(The Lectures on Revivals of Religion, 1835)을 출간하였다.12) 당시 찰스 피니 자신은 분명 온건한 완전주의를 관조하고 있었다.13)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성화의 문제와 관련하여 나에게 많은 사실들을 보여주고 계셨으며 내가 이런 문제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하도록 인도하고 계셨다.”14) 이 시기에 피니의 주된 관심사는 보다 고상한 형태의 기독교적 삶이었다. 피니는 감리교도들이 수용하고 있는 성화의 견해는 다소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15) 그러나 성경을 연구한 후 피니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전적으로 고상하고 보다 견고한 형태의 기독교적 삶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었다.”16) 이런 과정을 통해 드디어 피니는 브로드웨이 장막교회(Broadway Tabernacle)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관한 두 개의 설교를 전하였다. 피니는 「회고록」에서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 설교들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였으며 금생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애썼다.”17) 피니는 이 초기 시절에 이미 기독교 완전론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나 이 무렵(1833),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문제는, 이 용어의 율법 폐기론적 의미와 관련하여 , 뉴 헤이븐(New Haven), 앨버니(Albany)에서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뉴욕시에서도 다소 논란거리로 부상하고 있었다. 나는 ‘완전주의자’(The Perfectionist)라는 제목의 간행물에서 발표된 이 견해를 검토하였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금생에서의 성화 교리와 죄를 알지 않고(without known sin)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완전 성화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풍부한 수단들이 제공되었음을 또한 확신하게 되었다.18)
 
피니는 1835년 뉴욕을 떠나 갓 설립된 오하이오의 오벌린 대학(Oberlin College)에서 신학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19) 오벌린 대학은 그 후 곧 세계적인 기독교 영향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Robert Fletcher는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찰스 피니가 당긴 불길에 달구어진 학생들과 주민들은 새로운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는 전 세계를 그리스도로 불타오르게 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근처의 이주민 정착지로, 동부로, 먼 서부로, 서인도 제도로, 그리고 아프리카로 나갔다.”20) 나중에 피니는 1851년부터 1866년까지 오벌린 대학의 2대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피니는 오벌린에 정착한 후, 가장 고상한 수준의 기독교적 삶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기독교 원리들을 재천명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전에는 그의 설교의 대부분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설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었으나 이제 피니는 일관성 있는 보다 훌륭한 기독교적 삶을 영위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21) 1865년 가을에 피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강론”(Lectures to Profession Christians)을 시작하였는데 , 이를 서막으로 하여 그는 신자들의 성화교리와 점차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강론」 시리즈에는 “기독교 완전주의”(Christian Perfectionism)에 관한 두 개의 강론이 들어 있다. 피니와 오벌린의 완전주의 교리 발전에 기여한 주된 요인들은 몇 개 있었다. 첫 번째 요인은 서부 뉴욕과 뉴 디비니티(New Divinity)로부터 왔다. “오벌린은 서부 뉴욕이 북부 오하이오의 황야로 확장된 형태에 불과하였다. 오벌린은 서부 뉴욕 계통의 특징들이 자체의 종교 역사에서 되풀이 되고 자체의 정신적 특질에서 재생산하였다.”22) 오벌린 대학의 초기 교수 요원들은 “뉴욕의 완전주의”가 성행하던 계층으로부터 채용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서부 부홍운동의 산물이었다. Warfield가 지적한 것처럼, “오벌린의 완전주의가 그 이전에 광범하게 확산되었던 완전주의 운동과 전혀 무관하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23) 피니 외에도 John Morgan과 Henry Cowles는 서부 뉴욕인들은 아니었으나 둘 다 이 보편적인 세력의 영향을 받았었다. Morgan은 신시내티에서 Lyman Beecher와 접촉을 가졌었으며 Cowles는 예일에서 N. W. Taylor의 가르침을 받았었다. 둘 다 “같은 전통(stamp)을 받았던24) 것이다. 피니와 그의 동료 Mahan은 서부 뉴욕인들이자 “뉴 디비니티”인들이었다.
뉴 디비니티 신학 즉, 기독교인의 완전주의 교리와 도덕적 개혁이 광범하게 병합된 그러한 신학은, 이제 더 이상 칼빈주의가 아니었다.25) 칼빈주의 도그마를 실제적인 알미니안 주의로 변형시킨 Taylor와 Beecher는 오벌린의 완전주의 형성에 간접적인 기여를 하였다. 피니가 ‘완전 성화’라 불렀던 것과 뉴 디비니티의 이 알미니안주의화된 칼빈주의가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는 사실은, 19세기 미국 칼빈주의 사고의 변천사를 가장 잘 조명해 주는 대표적 실례이다.26)
둘째로, 노예 제도 반대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이 찰스 피니와 오벌린의 완전주의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들이다. 피니의 기독교 완전주의 교리는 사회 개혁에 대한 그의 혁명론적 관심과 오벌린 공동체 일반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27) 신학적 사색 및 영적 체험과 혁명 이데올로기 및 정치적 행위의 상호 작용은, 특히 오벌린의 모든 관련 당사자들에게서 선명하게 나타났다. 피니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성화의 교리를 구체적 체험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교회가 국가를 구할 수 없다고 확신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니는 오버린의 초빙을 받았다. 거기에서 일단의 지도자를 육성하여 이들을 통해 미국 사회를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두기 위한 새로운 캠페인의 중심요소로서 그리스도인 성결 사상을 대두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28)
오벌린 대학과 공동체는 그에게 영성과 급진적 사회 활동의 실험실을 제공해 주었으며 여기에서 기독교 완전주의 사상은 이윽고 최고의 위치로 군림하게 되었다.29) 오벌린은 즉시로 기독교 완전주의 사상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835년부터 1840년 사이, 오벌린에서의 첫 5년 동안, 피니와 오벌린의 학장 Mahan은 신학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영적 삶을 앙양시키기 위해 영어 성경을 연구하면서 매우 가까이 지냈다. 오벌린에서의 첫 5년 간 지극히 고상한 개인적 경건과 의의 성취를 향한 깊은 갈망이 그들의 최고 동기였음을, 두 사람은 주저없이 인정하였다. 이윽고 피니와 Mahan은 “부흥 신학에서의 영향력, 새로운 수단들, 완전주의에 대한 점진적인 강조(이 모든 것은 기독교 실천주의라는 긴급한 사항과 연결되어 있었다) 등에 있어서 오벌린을 하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30) 1841년 7월 뉴욕 로체스터에서는 완전 성화 교리에 관심있는 자들을 위해 하나의 집회가 열렸는데, 이때 오벌린의 완전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운동을 주도하였다.31)
그 밖에, 피니와 기타 완전주의자들을 위해 준비 작업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오벌린의 분위기가 결과적으로 오벌린의 완전주의 사상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피니는 부홍 집회의 열기가 가라앉은 후 사람들이 관심을 상실하는 경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타 교수들도 이에 대해 그와 의견을 같이 하였으며 그들은 문제 해결에 착수하였다.32) 그리하여 점차 그들은 오벌린의 완전주의로 알려진 그 교리를 형성시키기 시작했다.33) 이 당시 피니와 Mahan 은 요한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해」(Plain Accounts of Christian Perfection)와 「제임스 브레이너드 테일러의 회고록」(Memoirs of James Brainerd Taylor)을 읽었다.
피니와 그의 동료들은 전술한 내적, 외적 요인들의 도움을 얻어 자신들의 완전주의 교리를 점차 발전시켜 나왔다. 1837년 4월 3일 Noyes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니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성결하고 완전하며 순간적이고 지속적인 성결의 교리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칭의처럼 성화도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34) 1838년 11월에 창간된 「오벌린 전도자」(The Oberlin Evangelist)는 찰스 피니와 기타 오벌린 완전주의자들의 사상적 통로 역할을 하였다.35) 피니는 교수단의 종교적 사회적 개혁 운동의 새 기관지인 「오벌린 전도자」에서 일련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강의」를 발표하였다. 이 신문의 주요 필진은 피니, Mahan, Cowles, Morgan이었다. 피니는 이 시기를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학장 Mahan, Cowles 교수, Morgan 교수, 그리고 나는 성화의 주제에 대해 글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오벌린 전도자’라는 정기 간행물(후에는, ‘오벌린 쿼털리, Oberlin Quarterly')을 발간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실질적인 견해 와 관련하여 대중을 크게 깨우치는 작업을 하였다.36)
 
완전주의에 관한 그들 각자의 표현은 약간 상이하였으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그들의 사상과 개념은 한결같았다. Mahan은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반면, 피니는 종종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37) Cowles는 “성결”(holiness)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Morgan은 “성령세례”라는 표현을 썼다. 한편 Asa Mahan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38) 이 시기 오벌린의 완전주의에서는 Mahan의 사상이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분명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러한 균일성에 지배적 영향을 준 것이 Mahan의 사상이었다는 것은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39) 당시 Mahan의 완전주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웨슬리적이었다. 그는 요한 웨슬리의 “용어들”을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웨슬리의 교리를 그와 공유하였다. Mahan은 그리스도인이 완전에 도달하리라는 합리적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금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적 속죄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완전 체험에 이르는 길이라고, Mahan은 생각했다. 그는 이런 목적을 가진 특별한 믿음의 행위에 의해 완전 성화에 즉각 도달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 즉 칭의만을 얻은 저차원의 그리스도인들과 성화까지 받은 고차원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1836년에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듯이 믿음으로 성화될 수 있다”고 설교하였다.
비록 “칭의”와 “성화”에 대한 두 사상의 견해가 일치한 것은 아니지만 Mahan의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피니의 “성화관”은 동일한 일반적 교리를 가르친 것 었다. 그들은 똑같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이를 가르쳤다. 피니는 모든 죄가 고의적으로 저질러진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히 거룩하든지 전혀 거룩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교리는 John Humphrey Noyes의 그것과 달랐다. Noyes는 사람이 일단 완전에 도달하면 그것을 결코 상실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피니는 완전한 성화의 삶이 지속적인 순종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한 개인이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그 잘못을 회개할 때까지 자신의 완전 성화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피니는 완전 성화된 인간이 범죄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으며 또 않으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1846년에 피니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완전 성화라는 주제를 논하였다.
 
피니는 완전 성화에 대한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의 견해를 모두 거부하였다. 구학파는 영혼과 육체 모두가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금생에서 완전 성화는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반면 신학파는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고 거룩한 외적인 행동들을 소유하고 그것을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완전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니는 양측과 상이한 별개의 입장을 추구하였다.41)
피니는 구학파의 신앙 고백이 자신의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학파 장로교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신을 멀리 떼어놓고자 노력하였다.42) 피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상당히 부끄러이 여겼다.43) 오히려 피니는 초창기에 의도적으로 뉴 헤이븐의 신학(New Haven Theology)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사소한 불일치가 있었지만 사실 피니의 구원 교리는 신학파인 Taylor의 그것에 훨씬 더 가까웠다. 인간들에게 죄를 자각시키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Taylor의 일차적인 목표는 피니의 간절한 열망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44) 구학파 장로교인들은 피니의 새로운 수단들을 “펠라기우스적 뉴 헤이븐 신학”의 실제적 소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45) 프린스톤과 구학파는 “새로운 수단들”과 뉴 헤이븐의 신학을 동일한 하나라고 믿었다.46) 피니가 1837년 신 구학파의 공식적인 분열에 일조를 한 “촉매제 ”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다. 구학파는 신학파보다 더 강력하게 피니를 반대 하였다. 피니가 사용하는 “새로운 수단들”의 현상학적 성공은, 부흥 운동에 호감을 갖고 있던 신학파로 하여금 그와 관계를 끊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에 반해 구학파는 근본적으로 알미니안주의적인 그의 신학을 꼬투리 잡아 그와 그리고 모든 희석된 칼빈주의와 관계를 끊었다.47)
우리가 피니의 완전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적을 두고 있던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George Gale과 그와의 대결을 통해, 구학파와 그의 견해차를 낱낱이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피니는 구프린스턴 출신 Gale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견이 달랐다. 첫째, 피니는 Gale의 신학적 입장 특히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에 동의하지 않았다.48)
Gale은 죄를 인간 본성 속의 필연적 실체로 보는 전적 부패의 교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체질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physically) 부패한 존재였다. “전가라는 신학적 죄관은 인간을 3중적인 영원한 정죄 상태 아래 매어 놓았다: 안전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의 전가(imputation)를 통해 아담의 죄와 연루 된 존재였다; 인간은 전적으로 죄악적인 본성을 상속 받은 존재였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존재였다. 인간의 죄악적인 본성은 인간을 복음의 조건에 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피니는 이상과 같은 부패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피니와 Gale의 두번째 불일치점은 중생의 개념이었다. Gale에게 있어서 중생은 도덕적 변화보디는 물리적인 변화라 할 수 있는 본성의 변화를 의미하였다. 성령의 사역은 영혼의 본질에 대한 어떤 물리적인 역사이어야 했다. 죄인은 성령이 인간 본성 속에 어떤 새로운 원리를 심어주기까지, 중생에 있어서 수동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이식 이전까지는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죄인의 모든 노력은 무익한 것이었다. 셋째, 속죄 교리와 믿음에 관한 교리는, 피니가 그와 견해를 같이 할 수 없는 요소들이었다. Gale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택함받은 자들에게만 국한된 은총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택함받은 자들의 빚을 지불하는 문자 그대로의 거래 행위였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의 죽음의 은총은 똑같이 택함받은 자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와 같은 사상 체계는 택함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또 성령에 의해 인간 본성이 변화되기 전에는 믿음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Gale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제반 조건들은 피니의 구미에 전혀 맞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교리적 불일치 외에도 피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오라고 초청하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신을 회심시키도록 기다리게 만드는(쓸모없는 시도)” Gale의 설교를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49) 피니는 회심의 필요성을 설교하면서도 사람은 성령이 자기를 회심시키도록 기다리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진술로 매번 설교를 끝맺는, 이 구학파인의 견해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피니는 다음과 같이 Gale을 비평한다: “그들이 만일 택함받은 자라면 일정한 때가 되어 성령이 그들을 회심시킬 것이다. 그들이 만일 택함받지 못한 자라면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혹은 그 밖에 누구든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자기 구원에 전혀 무익할 것이다.”50) 피니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죄인들에게, 자기 구원은 자신의 선택여하에 달려 있다고 설교하였다. 결국 피니와 Gale간의 이러한 필연적인 차이는 피니로 하여금 Gale의 신학과 설교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장로교 집단에 대해서도 (피니는 Gale을 그 집단의 대표적 인물로 생각했다) 불만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아가 피니는 Gale과 프린스톤의 견해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였다. 당시 “피니는 장로교 신학 내에서 어떤 일치된 ‘저 교회’(low Church) 운동을 개시함으로써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믿는 극단적 칼빈주의 대표자들의 허를 찌를 계획이었다.”51) 피니가 자연적으로든 혹은 의도적으로든 Taylor의 신학적 입장에 이끌린 것은 당연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뉴 헤이븐 신학 전체는 기풍이 알미니안주의적이었으며, 이것은 19세기 이전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확실히 헤이븐으로부터 어떤 지하의 흐름이 있어서 신학적 사상을 전달해 줌으로써 피니는 이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52) 피니는 의지의 자유를 옹호했었다. 결국 그는 Taylor의 견해 대부분을 아무런 문제 제기없이 수용하였으며 “Taylor의 진정한 후계자”라 불리게 되었다.53) 피니의 신학은 자신의 독자적인 사색에서 나왔으나54) 본질에 있어서는, Foster가 지적한대 로 신학파의 그것과 동질성을 띠게 되었으며 또한 그와 관련된 불가피한 논쟁에서도 피니는 신학파의 편이 될 수 밖에 없었다.55) 피니와 Taylor의 신학이 유사한 이유는 두 사람이 모두 부흥사들이었으며 둘의 수정된 칼빈주의 사상이 그들의 부흥 운동으로부터 생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말해 왔다.56) 어쨌든 1830년 이후 어느 땐가 피니는 아마 뉴 헤이븐을 방문하여 Taylor와 신학을 논하였을 것이다. 1828년까지는 이미 피니가 Taylor의 견해에 접하고 있었다.57)
 
1836년 이후에 피니는 요한 웨슬리의 성화의 노선을 따라 그의 완전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Timothy Smith가 지적하였듯이 찰스 피니의 완전주의는 요한 웨슬리의 추종자들이 가르쳤던 것과 같이 급진적이었다.59) 피니에게 있어서 “완전”이란 괴로운 육체적 정신적 욕망이나 실수와 편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 충만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을 의미하였다.60) 피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서 완전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61)
따라서 피니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명령에 인간이 복종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피니는 말한다: “금생에서의 성화 교리, 죄를 알지 않고(without known sin)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완전 성화 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이며 그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풍부한 수단이 제공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62) 피니에게 있어서 “완전”주의 교리는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악한 충동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하는 가운데서 의무를 행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63) “하나님의 법은 보상적이고 징벌적인 자연적 강제력(natural sanctions)을 가지고 있다”고 피니는 주장한다.64) 그의 「조직신학」에서 피니는 자신의 완전주의를 변호하면서 금생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나는 완전에 도달할 수 있음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완전하고 지속적인 성결의 상태에 금생에서 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사실상 대단히 중요하다.”65) 피니는 “칭의와 성화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66)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여 그로 하여금 영혼 속에서 사시며 통치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성화를 이루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는 그의 여러가지 직무의 실행을 통해, 그리고 영혼의 요청에 대한 그의 여러 가지 반응들을 통해, 믿음에 의해 사유(私有)된다. 그리스도는 영혼으로 하여금 그의 완전하심과 충만하심을 신적으로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신다. 이러한 발견의 상태가 믿음과 순종이다.”67)
 
그의 「조직신학」에서 피니는 금생에서의 완전 성화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피니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근거하여, 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이를 명령하셨다는 사실; (2)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 기능에 힘입어 천부적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 (3) 금생에서의 신자의 완전 성화를 위해 복음이 예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 (4) 금생에서의 완전 성화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명하고 계시다는 사실; (5)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를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 (6) 금생에서의 신자의 완전 성화가 성경에서 선명하게 약속되고 있다는 사실.68)
피니에 따르면, 완전 성화는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표현된 약속이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 기능에 힘입어 천부적으로 이 완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명하셨다고 그는 말한다. “피니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기능(moral agency)에 힘입어 천부적으로(naturally) 하나님께 완전히(fully) 순종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완전한 성화는 하나님의 법에 전적으로 순종하는데 있으며 하나님의 법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만을 명한다고 피니는 가르쳤다. 천부적 능력에 입각하여 우리가 완전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완전 성화는 각 개인의 책임이었다. “그대가 계속하여 완전한 상태에 있는 한 그대는 완전할 것이라”고 피니는 주장한다.69) 인간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완전한 상태로 보존시킬 수 있도록 그 조건으로서, 자신을 완전한 상태로 보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피니는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두 장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논하였다.70)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그의 논증 전체를 뒷받침하는 기본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5:48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정의하기에 앞서 피니는 이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과 똑같은 자연적 완전 상태를 우리가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둘째, “본문에서 요구하는 완전은 지식에서의 완전이 아니다(우리의 한정된 능력에 준한다 하더라도).” 셋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유혹이 없는 상태, 우리의 체질을 벗어난 상태 혹은 우리 주변의 사물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인의 투쟁이라는 말 속에 함축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요구되는 완전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무한한 도덕적 완전이 아니다.”71)
피니는 성화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이해한다.72) 그의 성화 개념은 단지 “하나님께 대한 헌신(consecration)의 상태”73)일 뿐이며,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 혹은 순응의 상태와 정확히 같은 뜻, 같은 것”이다.74) 성화란, 그에 의하면, “능력, 감정, 소유물이 의지의 통제를 받아 의지가 자체와 존재 전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최고의 관심을 표하는 방향으로 헌신, 성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도덕적 법에 대한 현재로서의 전적 순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75)
피니는 완전 성화라는 말에서 “완전”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성화는 두 가지 의미에서 완전할 수 있다: (1) 하나님께 대한 현재적인 완전한 순종 혹은 전적인 헌신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2)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헌신 혹은 복종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완전 성화란 이런 의미에서, 성화의 상태 혹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 헌신의 상태에 확고부동하고 끈질기며 견고하고 계속적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나는 ‘완전 성화’라는 용어를 하나님께 대한 몸과 혼과 영 즉 전 존재의 확고부동한 전적 헌신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할 것이다.76)
 
피니에게 있어서 완전 성화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하나님처럼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다. 하나님의 법은 완전하고 비이기적이고 전폭적인 자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히나님의 행동 감정과 똑같은 감정, 하나님의 행동 원리와 똑같은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한결같이 자아에서 완전히 탈피하기를, 하나님처럼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이 규정하는 내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서 조금이라도 모자르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하나님처럼 완전한 상태이다. 하나님이 느끼시는 대로 느끼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그것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미워하시는 바와 똑같은 이유로 그렇게 함) 등등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77)
 
하나님은, 자신이 최고로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비의 사랑, 만족의 사랑” 이 양자를 가지고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신다고 피니는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듯 완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신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 동일한 규범에 순응할 수 있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도덕적 존재로 창조하였다. 이 규범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동일한 성품을 가지기를, 하나님과 같이 완벽한 사랑을 가지고 전폭적으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처럼 한결 같은 눈을 가지고 남의 유익을 구하기를 요구한다.”78)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이 율법 하에서, 그리고 복음 하에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의무이다. 피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확고히 믿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이 그것을 명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훌륭하게 추론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피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이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라고 명하심에도 우리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겠는가?”라고 질문을 제기한 다음 이렇게 답변한다: 아니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실 때는, 인간에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필수적 능력이 있다는 의미로 우리는 항상 이해해야 한다.”79) 둘째, 완전해질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나아가, 피니는 여러가지 근거에 입각하여 이것이 진리라고 확신한다: (1)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 (2) 이 세상에서의 신자의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예언은 완전 성화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3) 그 완전한 성화는 성경 곳곳에서 약속된 위대한 축복이다; (4) 신자의 완전 성화는,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목적 그 자체이다; (5) 만일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거룩해지는 것이 실천할 수 있는 의무가 아니라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마귀가 인류를 타락시키는데 있어서 자신의 계획을 너무 완벽하게 달성하였다는 뜻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데려가는 방법 외에, 그들을 거룩하게 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속수 무책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6) 이 세상에서 완전 성화에 도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음 속에 동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 속에 충분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80)
더 나아가, 피니는 논적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우리가 금생에서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지성적으로 이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자신있게 주장하였다. 피니에 의하면 성화된 영혼은, 자신이 영구히 성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성화되었음을 알거나 고백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완전 성화의 교리가 영적 교만으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된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성화 속에는 완전한 겸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81)
피니는 James Brainerd Taylor처럼,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의무라는 교리를 믿었다.82) 세상에 보다 나은 완전이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지 않고 믿음이 아닌 율법에 의해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83) 이 완전성화의 상태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이 완전 성화의 상태는 무관심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행위에 의해서나 율법의 행위 혹은 그 어떤 종류의 행위에 의해서도, 의로움을 느끼고자 하는 어떤 직접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율법의 행위로써 은혜를 얻고자 하는 어떤 노력에 의해서도, 남의 체험 모방하려는 시도에 의해서도, 준비가 갖추어 지기를 기다림으로서도 결코 도달될 수 없다.84)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영구한 성화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현대적인 영구한 성화의 상태를 가져오는, 유효한 작인(作因)이라기 보다 도구 내지 조건이다.”85)
요컨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찰스 피니의 기본 논증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완전 성화는 하나님의 법에 대 한 완전한 순종에 있다; 하나님의 법은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천부적 능력에 근거하여 완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 완전 성화는 각 개인의 책임이다.
 
우리는 피니의 완전주의 교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가 말한 내용의 대부분은 그가 체험했던 내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완전주의 교리와 회심, 체험 사이에는 필수적인 상호 보완 관계가 있었다. 피니는 분명, 완전상태(원숙한 사랑과 성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회심 체험은 지속되지 못한다고 믿었을 것이다.86) 그의 완전주의 교리와 회심 체험 사이에 존재하는 통일성은 그에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요소였다. 피니의 완전성화 개념에 대한 본 논문의 고찰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비평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로, 피니의 완전론은 완전론의 내용과 거기에 도달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사이에 본질적으로 모종의 모순을 안고 있다. 피니는 우리가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듯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에 의해 궁극적으로 성화를 획득하게 된다고 전적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피니가 바로 말하고 있듯이 성화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화에서 획득하는 것 자체가 “율법의 행위”이다. 따라서 도덕적 율법에 대한 이 순종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직접적 효과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피니는 “기독교 완전론”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며 인간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다. “완전 성화는 모든 의무의 완전 이행을 의미한다”고 피니는 말한다. “성화는 도덕적인 법에 대한 현재의 완전한 순종 바로 그것이다.”87)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고 우리의 모든 의무를 다 수행하는 한도내에서만 자신의 완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논증을 견지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노력 없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노력은 완전 상태의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결론짓는 것이 순리라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피니의 완전론에는 완전론의 내용과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 사이에 일관성이 결여되었다.
둘째로, 칭의와 완전 성화에 대한 그의 모호한 구별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피니에 의하면, 완전 성화는 모든 단계의 기독교적 삶에 전제가 되는, 온갖 영적인 성취의 일차적인 조건이다. 그러므로 피니는 완전 성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 소유물이며 이것 없이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완전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으며 완전해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 피니 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완전하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 보다 더 완전한 그런 예는 존재 할 수 없다.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칭의만을 얻은 자와 성화와 칭의 모두를 얻은 자, 이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화되지 못한 자는 칭의를 받지 못한 것이다. 성화는 칭의의 결과가 아니라 그 조건이며 성화는 칭의에 선행한다.88) 그에게 “현재적 성화”는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또 다른 조건”이다.89) “어떤 신학자들은 성화를 칭의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칭의를 성화의 조건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그 문제에 대한 잘못된 견해”라고 피니는 딱 잘라 말한다.90) 한 마디로, 우리는 성화되기 위해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얻기 위해 성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91) 칭의는 성화에 의해 좌우되며 완전한 성화를 함축한다. 우리가 성화없이 칭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잘못이며 칭의 없이 성화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옳다는 것이다. 칭의가 “현재의 완전한 순종”, “완전한 성화”, “도덕적 완전”에 근거하며 또한 이러한 것들에 의하여 좌우되며, 이러한 것들이 지속되는 한도 내에서 지속된다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개혁주의와 상치된다. 이런 성화와 칭의의 모호한 구분과 전도현상은 전통적인 칭의론과 성화론을 뒤엎는 도전이다.
세번째로 비평해야 할 점은 결국 “칭의”와 “성화”를 전도시키고 “완전성화”를 칭의의 전제조건으로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피니가 점진적 성화의 개념을 배제하였다는 사실이다. 피니에 의하면 부분적으로 성화된 신자란 존재 할 수 없다. 그는 점진적 성화의 개념 자체를 배제시켰다. 불완전한 성결은 있을 수 없으며 부분적으로 성화된 상태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완전히 거룩하든지 전혀 거룩하지 않든지 둘 중 어느 상태에 존재 한다. 피니에 의하면 점진적 성결이라는 개념 자체가 배제되어야 한다.92) 완전 성화는 구원 과정의 끝 지점에 있지 않고 이 땅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우리 편에서의 어떤 결심이나 노력 없이, 혹은 율법에 복종하는 어떤 행위 없이, 믿음의 행위에 의해 즉시로, 완전 성화, 즉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피니는 우리가 단지 믿기만 한다면, 이 믿음이 즉시 우리를 완전한 성화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점진적 성화개념을 거부하였다.93)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 즉, 완전히 성화된 자 아니면 전혀 성화되지 않는 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점진적 성화를 인정 하는 전통적인 입장에 대한 도전이다.
마지막 넷째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달성과 달성에 대한 전망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우리는 비판할 만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피니의 완전주의 사상 전체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달성과 “성공에 대한 합리적 희망을 통한” 달성에 대한 전망, 이 양자의 구별 속에 내포된 태도와 행위 사이의 역동적 상호 작용에 관한 그의 개념에 의해 좌우된다.94) “성공에 대한 합리적 희망”을 가져야 할 필요성, 이것이 핵심적인 것이었다. 피니는 희망을 인간 노력의 주요동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피니는 완전의 획득”을 성공에 대한 어떤 합리적인 희망”으로 만듦으로써, 완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인위적으로 교묘히 처리한다.
이것은 칭의와 성화 모두가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은 물론 구원이 본인의 의지에 결단의 결과라는 19세기 미국 부홍운동의 신학파 지도자들의 신학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전통적인 Edwards적 칼빈주의와 대립되는 것이다.
 
찰스 피니와 오벌린의 완전주의에 대한 이 역사적, 교리적 고찰의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우리가 찰스 피니와 오벌린의 완전주의를 그들 자신의 역사적 맥락 즉 19세기 미국 부흥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찰스 피니는 결코 전통적인 의미의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웨슬리안의 전통 속에서 그의 신학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의 후기 신학은 초기보다도 더욱 반칼빈주의, 친알미니안주의적이었다. 피니의 완전주의 역시 웨슬리안 완전주의에서 빌려온 것이다.
찰스 피니의 완전주의 교리와 오벌린의 완전주의는 그 초기 단계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독창적인 고안물이 아니었으며 서부 뉴욕의 완전주의를 확대시킨 것 내지 웨슬리형의 완전주의와 New Divinity의 그것을 수정한 것이었다. 오벌린 대학의 초기 정착자들은 서부 뉴욕과 New Divinity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피니와 오벌린의 완전주의자들은 New Divinity의 Taylor 및 Beecher와 직접·간접적으로 접촉을 가졌었다. 서부 뉴욕의 완전주의의 토양으로부터 자라나고, 동시에 웨슬리 형태의 완전주의로부터 형식과 본질을 빌려온 피니의 완전주의는, 피니가 알았든 몰랐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New Divinity의 신학과 혼합되었다. 칼빈주의를 알미니안의 전통과 융합시킴으로 말마암아 전통적인 칼빈주의를 희석시키고 말았다.
피니의 완전주의는 Mahan 같은 오벌린의 완전주의자들과 함께 오벌린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충분히 발전되었지만, 그가 뉴욕을 떠나 오벌린대의 교수직에 취임하기 전에 이미 그의 완전주의의 근본 골격은 형성되어 있었다. 피니는 오벌린 대학으로 오기 전 서부 뉴욕에 있을 때부터 고상한 형태의 삶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며 기독교 완전주의를 전파하고 있었다. 피니가 완전주의의 본 고장인 서부 뉴욕에서 복음을 전하며 그의 초창기 대부분을 보냈다는 점을 감안해 보건대, 그가 서부 뉴욕의 완전주의를 공유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그의 완전주의 애호 경향, “새로운 수단들” 신학적으로 반(反)칼빈주의적인 입장은 New Divinity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연합되었다.
피니와 동일한 색채를 띠고 있던 오벌린의 동료들은 그에게 영적 신학적 실험실을 제공하였으며, 이를 통해 피니는 자신의 완전주의 교리를 체계화할 수 있었다. 내, 외적 환경 뿐만 아니라 오벌린 대학과 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분위기도 피니의 야심과 놀라운 동반관계를 맺어 주었다. 서부 뉴욕의 완전주의 및 New Divinity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오벌린의 초기 교수진,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기풍, 피니 자신의 끝없는 성경 연구와 웨슬리의 「완전주의 평해 」 및 James Brainerd Taylor의 「회고록」 연구 등이, Mahan과 함께 피니를 오벌린을 넘어 전국적 영웅으로 그리고 역사적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피니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를 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완전주의 교리 전체를 19세기 미국 부홍 운동의 맥락 속에서 주의 깊게 고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찰스 피니 역시 그의 시대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찰스 피니와 구 프린스톤(특별히 Charles Hodge와 B. B. Warfield) 신학자들 사이에 완전주의를 놓고 벌어진 신학적 논쟁 역시 장로교 설립 초기부터 제기되어 왔던 Scottish-Irish Old Side와 New England의 New Side 논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19세기 미국 부홍운동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후주]
1) Allan Coppedge, “Entire Sanctification in Early America Methodism: 1812-1835. JWT 13 (Spring 1978), 3 -50.
2) 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oan System (Cincinati: Standard Publishing Company, n.d.), 37-47; Bill J. Leonard, “Getting Saved in America: Conversion Event in a Pluralistic Culture,” Journal of Review & Expositor 82 (Winter 1985), 118-123.
3) Sydney E.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72), 460. 또한 보라: Bill J. Leonard, “Getting Saved in America: Conversion Event in a Pluralistic Culture,” Journal of Review & Expositor 82 (Winter 1985), 119-120.
4) 보라: Robert, Samuel Fletcher, History of Oberlin Collage I (Oberin: Obering College, 1943); Timothy L.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Baltimore: The Jone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0); Jomes E. Johnson “Charles G. Finney and a Theology of Revivalism”, Church History 38 (September 1969), 338-358; Leonard I. Sweet, “The View of Man Inberent in New Measures Revivalism”, Church History 45 (June 1976), 206-221; Revival and Reform in the Theology of Charles G. Finney (London: The Scarecrow Press, Inc., 1985).
5) Melvin L. Vulgamore, “Charles G. Finney: Catalyst in the Dissolution of American Calvinism”, Reformed Review 17 (June 1964), 33-42.
6) 이 역사적, 전기적 스케치는 피니의 생애와 사역 및 오벌린의 완전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특히 완전론과 관련하여 다루려 한다. 다음 작품들이 전기적, 역사적 조명의 자료로 사용되었다: Charles Finney, Memoirs (New York: Fleminy M. Revell Company, 1876); James E. Johnson, The Life of Charles Grandison Finney (Ph. D. 학위 논문, University of Syracuse, New York, 1959); B. B.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1).
7) James E. Johnson, “Charles G. Finney and Oberlin Perfectionism,” Journal of Presbyterian History 46 (March, June, 1968). 43.
8) James E. Johnson, “Charles G. Finney and Oberlin Perfectionism”, Church History 38 (September 1969), 43; Timothy L.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Nashville, 1958), 114-134; John L. Peter, Christian Perfection and American Methodism (Nashville, 1956).
9) Chales G. Finney, Memoirs (New York: Fleming M. Revell Company, 1876), 12-18; Hellen Wessel, Autobiography of Charles G. Finney (Minneapolis: Bethany Fellowship, Inc., 1977), 13. 피니는 회심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821년 가을의 어느 주일(主日) 저녁에 나는 내 영혼의 구원 문제를 즉시 결말짓기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과 화해하기로 결심하였다.”
10) Finney’s Memoirs, 25. 그가 장로회 관할 아래 들어온지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인 1823년 12월 30일에 스트리트 교회의 장로회 모임에서 복음을 설교해도 좋다는 인허를 받았다. 보라: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19.
11) Whitney R. Cross, The Burn-Over District: The Social and Intellectual History of Enthusiastic Religion in Western New York, 1800-1850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2), 160-169.
12) Charles G. Finney, Memoirs, 339-340. 또한 보라: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II, 37. 제 3 장로회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Warfield는 피니가 1835년 봄, 뉴욕의 제 3 장로회에서 탈퇴하였다고 말한다.
13) George M. Marsden, The Evangelical Mind and the new School Presbyterian Experience: A case Study of Thought and Theology in Nineteenth Century America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70), 80.
14) Finney, Memoirs, 339.
15) Ibid., 340.
16) Ibid., 340.
17) Ibid., 341.
18) Ibid., 341.
19) Ibid., 335.
20) Robert Samuel Fletcher, A History of Oberlin College (Oberlin, Ohio: Oberlin College, 1943), 209.
21) J. E. Johnson, “Charles G. Finney and Oberlin Perfectionism,” Church History 38 (September 1969), 47.
22)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8.
23) Ibid., 49.
24) Ibid., 8. Morgan은 1802년에 아일랜드, Cork에서 태어났으며 1826년에 윌리엄 대학(William College)를 졸업했다. 예일대(Yale College) 출신 Henry Cowles는 1803년에 코넥티컷의 Norfolk에서 태어났다. 그는 1826-1828까지 예일 신학교(Yale Divinity School)에서 수학하였다.
25) Timothy L. Smith, “The Doctrine of the Sanctifying Spirit: Charles G. Finney’s Synthesis of Wesleyan and Covenant Theology”, WTJ 13 (Spring 1978), 93.
26) Timothy L. Smith, “The Doctrine of the Sanctifying Spirit”, 96.
27) James H. Morhead, “Social Reform and the Divided Conscience of Antebellum Protestantism”, Church History 48 (December 1979), 416-430; Leonard I. Sweet, “The View of man Inherent in New Measure Revivalism”, Church History 45 (June 1976), 205-221.
28) Timothy Smith, “The Doctrine of the Sanctifying Spirit”, 97.
29) William G. McLouglin, Modern Revivalism: Charles Grandison Finney to Billy Graham (New York, 1959), 108-113; Donald Dayton, Evangelical Heritage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6), 15-24.
30)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461.
31) Johnson, “Charles G. Finney and Oberlin Perfectionism,” 51.
32) Johnson, Ibid., 47-48; James H. Moorhead, “Social Reform and the Divided Conscience of Antebellum Protestantism”, Church History 48 (December 1979), 419.
33) George W. Wright, Charles G. Finney (Boston, 1891), 203; B . B.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Il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831), 37.
34) Finney’s letter to Noyes, April 3, 1837, in Religious Experience of John Humphrey Noyes, 334.
35) 「오벌린 전도자」는 월 2회 발행되는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기독교 완전론 전파를 주 목적으로 하고 Henry Cowles의 편집책임 아래 발간되었다. 제 1호로 출간된 Mahan의 연설은 그가 지은, “기독교 완전론(1836)”이라는 작은 책의 핵이 되었다. 보라: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8.
36) Finney, Memoris, 347.
37) Warfield, Studies iη Perfectionism, 57 : Whitney Roger Cross, The Burned-Over District: The Social and Intellectual History of Enthusiastic Religion in Western New York, 1800-1850 (Ithace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2), 228-51; R. S. Fletcher, A History of Oberlin College I (Oberlin: Oberlin Collage, 1943), 224-225; Timothy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104. Major articles of The Oberlin Evangelists over perfectionism were as follows; “Asa Mahan, Scripture Doctrine of Christian Perfection”, (Oberlin, 1939); Henry Cowles, “The Holiness of Christians in this Present Life,” (Oberlin, 1840); Charles Finney, “Views of Sanctification”, (Oberlin, 1840) and “Lectures on Systematic Theology”, (Oberlin, 1846).
38) See Warfield, “Mahan’s Type of Teaching”, in Studies in Perfectionism, 64-124, 136.
39) Warfield, “Mahan’s Type of Teaching”, 66.
40) James E. Hohnson, “Charles G. Finney and A Theology of Revivalism”, 338. “그는 초기에 사람들의 회심을 일으키는데 성공을 거둠으로써 여기에 자극을 받아 신학의 문제들에 대해 실용주의적인 접근노선을 취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칼빈주의 신학 체계를 꺼려하게 되었다.”
41) Finney, Lectures of Systematic Theology (Oberlin, 1878), 595, 616: Melvin L. Vulgamore, “Charles G. Finney: Catalyst In the Dissolution of American Calvinism”, Reformed Review 17 (June, 1964), 39.
42) Finney, Memoirs, 59; James E. Johnson, “Charles Finney and A Theology of Revivalism”, Church History 38 (September 1969), 346. 피니는 구학파의 칼빈주의가 삶에 대한 운명론적 관념으로 귀결된다고 믿었다. 그러한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일정한 시간에 원하실 경우 자신을 구원해 주기만을 기다려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구원받기로 선택되었다면 언젠가는 성령이 그를 회심시키지 않겠느냐고 그는 반박한다. 피니의 메시지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에 맞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죄인이고 아니고는 자기 선택 여하에 달린 것이며 자기의 의지를 발휘함으로써만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깨우쳐 주는데 목적이 있었다. 피니는 칼빈주의 교리가 부흥운동에는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적으로 타락의 개념을 거부하고 자유 의지를 받아들였다. 피니는 또, 자기 신학이 자기를 위해 형성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프린스턴 신학교에 다니기를 거부하였다.
43) 피니는 「회고록」에서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신앙 고백올 읽게 되었을 때 …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나는, 대부분 전혀 무관한 성경 구절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그러한 도그마를 인간들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문서에 대해 아무런 존경심도 느낄 수가 없었다.” 보라 : Finney, Memoirs, 60.
44) Melvin L. Vulgamore, “Charles G. Finney: Catalyst In the Dissolution of American Calvinism,” 39.
45) Melvin. L. Vulgamore, “Charles G. Finney: Catalyst in the Dissolution of American Calvinism”, 41; James E. Johnson, “Charles G. Finney and A Theology of Revivalism”, 341; McLoughlin, Modern Revivalism, 19, 20, 21, 44, 65; George F. Wright, Charles Grandison Finney (Boston, 1891), 25, 179, 181, 196, 200.
46) MacLoughlin, Modern Revivalism: Charles G. Finney to Billy Graham (New York: The Ronald Press Company, 1959), 47.
47) McLoughlin, Modern Revivalism, 42.
48) Finney, Sermons on Important Subjects, 139. 피니와 구학파가 의견을 달리한 또 하나의 교리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것이었다. 구학파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이것은 아담의 범죄결과 모든 인간 속에 본유적으로 내재해온 상태라고 가르쳤다. 피니는 부패가 이기심의 상태로서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며 모든 인간은 회심하지 않은 경우 그 상태에 머물게 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만족이 이 회심하지 않은 부패한 인간들의 궁극적 선이라고 한다. 또 피니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죄악적 본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받은 유혹을 강화시킬 뿐이라고 믿었다.
49) Finney, Semons on Important Subjects, 40.
50) Finney, Memoirs, 153.
51) McLoughlin, Modern Revivalism, 41.
52) James E. Johnson, “Charles G. Finney and a Theology of Revivalism”, 341.
53) Frank H. Foster, A Genetic History of New England Theolog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e Press, 1907), 453.
54) A. T. Swing, “President Finney and an Overlin Theology”, Bibliotheca Sacra LVII (1900), 465.
55) Frank H. Foster, A Genetic History of New England Theology, 453;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II, 19.
56) Sidney E. Mead, Nathaniel W. Taylor, 1786-1858: A Connecticut Liberal (Chicago, 1942), 158; William McLoughlin, Modern Revivalism (New York, 1959), 30-78.
57) David L. Dodge to Finney, Sep. l7 1828. Finney papers. Oberlin College Library. Vulgamore, “Charles G. Finney”, 41.
58) For Finney’s Perfectionism after 1835, see Memoirs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876), 339ff; Lectures On Systematic Theology, 402-543; Lectures to Professing Christians, 397-382; Sanctification (London: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n.d.), 9-37; Sermons on Important Subjects (New York, 1836), passim; “On Being Holy” in Sermons on the Way of Salvation (Oberlin: Edward J. GoodRich, 1891), 332-344.
59) Timothy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New York: Abingdon Press, 1957), 103.
60) Finney, Systematic Theology, 420. 그것(완전 성화)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든 천상적 마음이든, 믿음 혹 소망의 완전한 확신이든 전적 헌신의 상태이든, 원하는 대로 부르라”라는 이 모든 것을 동일한 뜻으로 이해한다. 보라; 또한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104.
61) W. G. Mcloughlin, Modern Revivalism, 104.
62) Finney, Memoirs, 340.
63) McLoughlin, Modern Revivalism, 105.
64) Finney, Skeletons of a Course of Theological Lectures (London: Milner and Sowerrby, n. d.), 235.
65) Finney, Systematic Theology, 360.
66) Ibid., (Abridged), 375, 395.
67) Ibid., (Abridged), 376.
68) Ibid., III (Oberlin, 1878), 204.
69) Finney, Views of Sanctification, 29.
70) Finney, Lectures to Professing Christians, 339-382.
71) Ibid.
72) Ibid., 200, 594, 595.
73) Ibid., 594.
74) Ibid., 200.
75) Ibid., 595.
76) Ibid., 295;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a142.
77) Finney, Lectures to Professing Christians, 341.
78) Ibid., 342.
79) Ibid., 344.
80) Ibid., 346-353.
81) Ibid., 354-357. 피니는 그러한 반론들과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 습관의 힘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금생에서 완전히 성화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2) 도덕적 수단에 의해 극복되거나 제거될 수 없는 많은 물리적인 난점들이 최악의 생활에 의해 창출되었다; (3) 성경은 이 교리에 반대한다; (4) 사도들은 자신들이 불완전함을 인정한다; (5) 그런데도 우리가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훌륭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 아닌가?; (6) 그러나 완전하지도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완전하다고 공언한다. 그러므로 나는 금생에서의 완전을 믿을 수 없다; (7) 완전하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과 광신에 빠졌다. 그로 나는 그것을 생각하기도 두렵다; (8) 그럼에도 그대로 금생에서 어느 누구든 완전히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82) Ibid., 359; Lectures on Systematic Theology, 407. 피니는 또한 자기 교회 신도들에게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평해”를 읽어볼 것을 권하였다.
83) Ibid., 360-363. 피니는 다음과 같은 여타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 (1)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2)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완전 성화를 원하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향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음에도 만족을 느끼며 그것이 채워지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4)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위대한 계획을 간과한다; (5) 그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사유(私有)하지도 않는다; (6) 바른 종류의 의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84) Finney, Sanctification, 9-19.
85) Ibid., 19.
86) Bill J. Leonard, “Getting Saved in America: Conversion Event in a Pluralistic Culture,” 119-120.
87) Finney, Lecture on Systematic Theology, 759-760. 피니에게 있어서 완전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체질적 변화나 지성적 변화 내지 감정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의 변화를 의미 하다. “성화”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피니는 성화를, 과정(진행되고 있는 것)의 관점보다 실천(행하는 것)의 관점에서 규정한 경우가 더 많았다.
88) Finney, Systematic Theology, 108-155.
89) Finney, Ibid., 107-555, 557. “성화는 칭의의 조건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취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과 하나님 섬김에 대한, 마음과 삶의 현재적 충만 완전한 헌신은, 과거 죄의 현재적 용서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현재적 열랍에 대한 불변적 조건이다. (2) 회개한 영혼은 이 마음을 다한 헌신의 상태가 지속되는 한도 내에서 청의의 상태가 계속된다.”
90) Finney, Ibid., 391.
91) Finney, Lectures on Systematc Theology, 439, 846, 470-482. 또한 Studies in Perfectionism, 146-147에 있는 Warfield의 논의를 보라.
92) Warfield, Studies in Perfectionism, 139.
93) Finney, View of Sanctification (l840), 168. 피니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완벽한 믿음은 자연적으로 확실하게, 즉각적으로, 완전 성화의 상태를 낳는다. … 이러한 결과는 믿음의 발동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화는 순간적인 일이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을 발휘하는 즉시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준수한다. 즉 완전 성화를 이룬다.”
94) Finney, Systematic Theology, 583, 586, 587.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8.06.28 10:13
  • 수정 2020.12.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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