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독립운동 100주년 특집

 

 
 
 
일본(日本)이 한국을 합병한 다음해에 일세(一世)를 격동시킨 큰 의옥사건(疑獄事件)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온 세상이 다 아는 百五人 사건이라는 것이다.                                                       
 - 1946, 鮮于燻         

목   차

1. 105인 사건과 서북기독교

2. 105인 사건과 선천신성중학교

3. 법정에서 드러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이후 한국의 영구적인 식민화를 위해 국내 반일세력을 제거하기를 원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알려진 ‘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사건’이다. 1911년 일제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은 데라우치 총독 살해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수백 명을 체포했고, 그 중 123명을 기소해 105인에게 유죄를 언도했다. 그 목적은 윤경로 교수의 말대로 “합법성을 가장한 재판제도”를 통해 “국내 반일민족세력,” 특별히 신민회와 서북 출신 기독교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주 목표였다.
 
특별히 그 중심에는 신민회와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 대거 포진한 신천신성학교가 있었다. 때문에 105인 사건은 초기 신성학교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신성학교 학생이었던 백낙준이 지적한 대로 “세칭 백오인 사건(百五人事件)은 신성학교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와 민족사 상에 빼놓지 못할 중대사건”이었다. 
 
 
 
  
1. 105인 사건과 서북기독교
 
105인 사건은 일제가 강제적으로 조선을 합병시키고 “배일민족(排日民族) 진영과 한국인에게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운동과 선교사들을 제거하려고 무모한 연극을 꾸민 것이다.” 일제의 타깃이 바로 신성학교였다. 백낙준은 105인 사건과 신성학교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증언 한다:
 
사내가 1911년 11월 하순에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내용할 때에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선천역두에서 사내를 암살하려다가 미수하였다는 날조사건(捏造事件)이다.  1911년 10월에 교원 7인, 학생 20명을 구속하여 서울에 압송하더니 계속하여 3,40의 학생과 다수의 선천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하였다. 악형과 고문으로 살상자를 내면서 자백을 받아내고 형식적 재판에 붙여 105인에게중형을 선고하였다가 세계적 여론에 쫓기어 주모자라는 6인만을 협의자로 유죄 선고하고 기여 99인을 무죄 백방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에 신성학교는 일시 폐교할 수밖에 없었고 교장 윤산온도 이사건의 교사자(敎唆者)로 되어서 추방을 당할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신성학교는 이 시련에서 일제의 날조를 폭로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무섭게 성장하는 한국기독교가 식민지배의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특별히 서북지역 선교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선천신성학교는 말살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105인 사건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교사들이 재직하는 신성학교를 탄압하고 이들 교사들의 사상적 배후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신민회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일제는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된 뒤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안태국, 이동휘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민회를 말살할 계획을 세웠다.
 
신민회는 을사늑약 이후 1906년경에 조직된 비밀결사단체이다. 을사늑약 이후 민중들은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지식인들은 조약무효화 투쟁을 벌이며 항일투쟁을 전개했지만 신무기를 갖춘 일본군에 맞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의식 있는 민족지도자들이 먼저 민족을 깨우고 실력을 양성한 후 국권을 회복하려는 뜻을 가지고 조직한 것이 신민회였다. 대한신민회통용장정에 나타난 신민회 목적은 다음과 같다:
 
本會의 目的은 我韓의 腐敗한 思想과 慣習을 革新하야 國民을 維新케하며 衰頹한 發育과 産業을 改良하야 事業을 維新케하며 維新한 國民이 統一聯合하야 維新한 自由文明國을 成立케 함
 
신민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문 잡지 및 서적을 간행하여 백성의 지식을 계발케 할 것, 각 곳에 권유원(勸諭員)을 파견하여 권유문(勸諭文)을 전파하여 백성의 정신을 각성케 할 것, 정미(精美)한 학교를 건설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각 곳의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할 것,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방침을 지도할 것, 신민회의 합자로 사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보일 것,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기회가 올 때의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등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신민회는 회원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다음과 같은 5개항의 규칙도 정했다:
첫째, 회원은 조국정신을 굳게 지키고 조국 광복에 헌신하여 충성을 다할 것,
둘째, 회원은 조국을 위했던 선현선열(先賢先烈)을 반드시 사모하고 계술(繼述)할 것,
셋째, 회원이 만일 본회를 배반하였을 때는 어느 때든지 그 생명을 빼앗길 줄 알 것,
넷째, 회권은 본회의 비밀을 엄수할 것이며 만일 탄로났을 때는 해당자는 혀를 깨물고 말하지 말 것,
다섯째, 회원은 달고 쓴 생활과 힘들고 편한 활동을 다른 회원들과 함께 할 것.
 
신민회의 초대 중앙위원은 총감독 양기탁, 총서기 이동녕, 재무 전덕기 집행원 안창호였고, 서울 총감은 전덕기, 평북총감 이승훈, 평남총감 안태국, 황해총감 김구, 함경총감 이동휘, 경상대표 김진호, 충청대표 최익, 강원대표 주진수, 기타대표 김도희, 본부직원 임치정(대한매일신보영업국장) 김홍숙, 신민회언론기관으로는 대한매일신보였다. 신용하 교수가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에서 지적한 대로 신민회는 양기탁을 중심으로 한 대한매일신보, 전덕기를 중심으로 한 상동교회와 청년학원, 이동휘와 유동열을 중심한 무관출신, 이승훈과 안태국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실업가와 민족자본,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미주 교포의 공립협회 등 다섯 세력이 축이 되었다.
 
신민회는 전국적인 조직이었지만 윤경로가 지적한 것처럼 신민회 활동은 서북지역이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고 그 중심에는 이승훈이 있었다. 1907년 2월 20일 귀국한 안창호가 3월 10일까지 서울지역에서 귀국강연회를 마친 후 1개월 간 서북지방 순회 강연회를 가졌을 때 이승훈은 안창호와 역사적인 조우를 했다. 이후 이승훈은 서북지방 신민회 조직과 확장에 진력하여 평북에 이승훈, 평남에 안태국, 황해도 김구, 함경도 이동휘가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평북지역 신민회 책임을 맡은 이승훈은 선천 정주를 정점으로 의주 곽산 철산 용천 등지에 신민회 평북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를 통해 양준명, 이용화, 오희원, 황국보, 이명룡 등 평북지방은 물론 서북지방 일대의 대표적인 토착 자본가들과 상공업자들, 그리고 이용혁, 곽태종, 선우혁, 차균설, 임경엽, 강규찬 등 선천의 신성학교와 정주의 가명학교의 영향력 있는 교사들이 신민회에 대거 입회하였다.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은 우수한 학생들이 신민회에 대거 참여하였다.
 
신민회의 입회 자격 요건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 피를 흘릴 수 있을” 정도의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었다. 이승훈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가입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자연히 서북지방에서의 신민회 활동에서 이승훈은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다 1911년 1월 안악사건에 연루시켜 이승훈을 구속하고 제주도로 유배시키면서 그의 신민회 활동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선천지역 신민회는 양준명과 이용화가 공동대리인으로 평북 신민회를 이끌었다. 공동 책임자로 임명 받은 이 두 사람은 신민회 주창자 5-6명과 신성중학 뒤편 개천에서 목욕을 하며 공동책임자로 임명 받은 사실을 알리고 참석자들에게 신민회를 위해 전력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때 참석한 이들은 이용혁, 곽태종, 선우혁, 차균설, 김일준이었고, 이날 이들 외에도 최덕윤, 김익겸, 강규찬, 노창권, 안준, 홍성익, 양전백, 이정순, 박찬림을 비롯 여러 명이 더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모두 평북신민회 평의원들로 윤경로의 표현을 빌린다면 “당시 선천을 중심한 평북 신민회 유력인사로 보아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신민회 조직과 활동을 주도했던 평북 이승훈, 평남 안태국, 황해도 김구, 함경도 이동휘 등 서북지방 출신들로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신민회는 비밀 결사조직의 독립운동단체였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서북지역 출신 지도자들을 경계했다. 실제로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스티븐스 사살 사건,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일어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사건, 그리고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李完用) 피살미수사건 모두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었다.서북 기독교 출신 지도자들의 제거가 목표였다는 사실은 105인 사건 피의자 중 양기탁 윤치호를 제외하고 모두 서북 출신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일제는 1908년 황해도의 김구, 김광복, 도민권, 이승길, 김홍량 등 한국 기독교계의 쟁쟁한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160명의 회원을 가진 해서교육총회가 도내 학교들을 포섭하고 일면일교(一面一校)의 교육시설을 확충하고 강습소를 열어 국민계몽운동에 힘쓰자 이들을 제거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1910년 12월 안중근 의사의 종제 안명근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사건이 발각되자 일제의 경무총감부(警務摠監部)는 이들을 고의로 소위 안명근 사건(安明根事件)으로 알려진 안악사건(安岳事件)과 결부시켜 김구를 위시한 회원 전원을 투옥하고 이들 중 김구를 비롯한 10여명을 내란미수죄를 적용시켜 15년 이상의 중형에 처하고 40여명은 제주도와 울릉도로 유배시켰다.
 
황해도 일대 기독교 지도자들 제거에 성공한 일제는 105인 사건을 통해 한편으로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안태국,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된 강력한 항일단체인 신민회를 타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서 가장 교세가 활발하고 교육기관이 많으며 배일사상이 강한 선천 정주 평양 등 서북출신 기독교 지도자 제거에 착수했다. 김양선은 왜 일제가 평양 정주 선천 등 서북지역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는가를 이렇게 증언 한다:
 
신민회의 조직은 일본의 침략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루어졌으므로 회원은 애국사상이 강한 사람으로서 엄밀히 선출되었고 치밀한 조직을 세워 2명 이상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고 회원의 생명과재산은 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강력한 비밀결사로 한국 유일의 독립운동단체였다. 신민회계의평양 평양대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는 애당초 항일독립을 목적하고 세운 학교였고, 평양 숭실학교와 선천 신성중학교는 기독교 학교 중에서 배일사상이 가장 강한 학교였다. 그리고 평양, 정주, 선천 교회들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알려졌다. 안창호는 평양에서, 이승훈은 정주에서, 양전백은 선천에서 솥발같이 서서 강력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한국 통치의 암적 존재인기독교 세력을 삼제(芟除)해 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마디로 일제는 기독교 세력을 식민 지배를 방해하는 암적 존재로 판단했다. 때문에 일제는 이들 서북지역의 장로교 민족운동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이들이 조작한 음모 사건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 축하를 하기 위해 서순(西巡)을 한다는 소문이 1910년 음력 8월에 돌았고, 이 소식을 접한 신민회 중앙 간부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등이 서대문 임치정 집에 모여 수차의 밀회를 갖고 총독암살 모의를 했다는 것이다. 총독이 서순할 때 배일사상이 강한 사람들을 경의선 연변의 8개 도시, 평양, 선천, 정주, 남청정, 곽산, 철산, 차련간, 신의주 역전에 환영객을 가장하여 내보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 거사에 외국 선교사들이 대거 개입하였다고 주장한다. 선교사들의 사주를 받은 서북 기독교 지도자들이 1910년 음력 8월 중에 암살계획을 세웠다가 총독의 서순이 지연되자 10월 29일부터 11월 1일(양력 12월 26일-28) 사이에 선천 신의주 등 여러 도시에 환영객을 가장하여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미수로 끝났다는 것이다.
경무 총감부 경시 구니토모(國友尙謙)는 1911년 음력 7월 26일 정보를 입수하고 그 진위를 가리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다 스왈른, 매큔, 베어드 등이 배후에 사주했다는 정보를 접하였다고 주장했다. 강도사건으로 검거된 이재윤을 조사하다 우연히 그가 이 음모 사건에 개입한 것을 알게 되었고, 이재윤과 평소 잘 아는 위장된 불평자들을 접촉시킨 결과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서울로 압송해 조사를 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시나리오는 일본 동경교육대 와타나베 마나부(渡部學)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 마디로 “날조된 것”이다.
 
이 사건은 “신성중학교 생도 외에 경성의 윤치호, 평양의 양기탁 안태국 김동원, 진남포의 임충옥, 정주의 최성주, 선천의 강규찬 등 애국 독립운동 지사들을 일망타진하려 한 일본 관헌 측의 모략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1911년 10월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김동원, 윤치호, 안태국, 유동열, 김창건, 옥관빈, 최성주, 차이석, 강규찬, 이춘섭, 정익노, 홍성익, 장관선, 백일진 등 목사 6명 장로 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관서 지방 교회 지도자 500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이들 중 123명을 기소하고 그 중에서 105인에게 유죄언도를 내렸다. 유죄 언도를 받은 명단은 다음과 같다.
 
 
형언도
명단
10년
(6명)
윤치호, 양기탁, 임치정, 이인환(이승훈), 안태국, 유동열
7년
(18명)
옥관빈 강응진 차리석 나일봉 변인서 최예향 양준명 김일준 선우혁 곽태종 최덕윤 이용화 임경엽 최성주 홍성린 오희원 이기당 송자현
6년
(39명)
이덕환 이춘섭 김동원 김두화 윤성운 정익로 안경록 신상호 신효범 장시욱 홍성익 차균설 이용혁 강규찬 양전백 이봉조 노효욱 김창환 노정관 안준 주현칙 김익겸 이창석 이태건 최주익 김찬오 조덕찬 이명룡 임도명 백몽규 이근택 오학수 지상주 김시점 정원범 유학렬 장관선 김창건 백용석
5년
(42명)
오대영 옥성빈 김응조 윤원삼 서기풍 안세환 정주현 양준희 손정욱 정덕연 이동화 이정순 김현식 차희선 이정순 나봉규 백일진 홍규민 차영준 길진형 조영제 강봉우 백남준 오택의 평강열 나승규 안성제 김선행 김용엽 최제규 최성민 이재윤 이지원 박상훈 이병행 박찬형 이병제 김봉수 김용오 나의섭 김응봉 안광호
105인 명단, 출처: Japan Chronicle, The Korean Conspiracy Trial, 13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들의 출신지역별로 분류할 때 105인 사건과 한국교회 특별히 서북지역의 장로교회와의 밀접한 연관성이다. 그 연관성은 다음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볼 때 확실하다.
 
첫째, 일제가 기소한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이 지역 장로교 신자들이었다. 123명의 기소자 중에서 98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 중에 89명이 장로교인이었고, 감리교인이 6명이었으며, 기타 교파가 2명이었다. 89명의 장로교인 가운데는 현직 목회자가 5명, 장로와 집사가 각 8명씩, 각 지교회 평신도 지도자가 10명, 입교인이 42명, 학습교인이 13명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 89명의 장로교인 중에서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선천과 평양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기소된 123명 중 유죄 언도를 받은 105명의 종교별 분류 역시 장로교가 절대적이다. 105인을 종교적으로 분류하면 개신교인이 91명, 천주교인이 2명, 천도교도 2명 그리고 종교가 없는 이들이 10명이었으며 불교와 유교는 한명도 없었다. 91명의 개신교인 가운데 장로교가 81명으로 단연 가장 많았고, 감리교 6명, 조합교 2명, 기타 2명 순이었다. 기소된 123인을 기준으로 하던, 유죄언도를 받은 105명을 기준으로 하던 장로교가 압도적이다. 기소나 유죄 언도를 받은 전체 기독교인 중에서 절대 다수가 장로교 신자인 셈이다.
이와 같은 일제의 서북기독교 탄압은 이 지역 교회들 특별히 장로교의 급성장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주지하듯이 1907년 한국장로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남자 도사경회 기간에 발흥한 평양대부흥운동은 곧 평양전역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부흥을 경험했다. 이 특혜를 가장 많이 누린 교단은 역시 한국장로교회였다. 게다가 놀라운 평양대부흥이 일어나던 그해 9월 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 카나다 장로교선교회는 하나의 민족교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더 나아가 2년 후 소위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 진행된 전국적인 전도운동이 보여주듯 한국교회는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하나의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었다. 특별히 장로교회가 노회라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어 일제는 한국교회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흥운동과 노회 조직 과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장로교회들은 절대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부흥운동이 평양에서 일어났고 독노회 역시 평양에서 조직되었으며, 자연히 최초의 목사안수식도 그곳에서 거행되었다.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하는 이들이 평양에 집중되었고,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이었던 숭실대학과 평양신학교가 평양에 있었다.
 
둘째, 이 사건과 서북장로교회와의 연관성은 일제가 특별히 이 사건을 영향력 있는 서북지역 선교사들, 평양과 선천 주재 몇몇 장로교 선교사들과 연계시키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제는 선천, 정주, 평양의 교회 지도자들과 더불어 조지 매큔(George S. McCune, 尹山溫, 1864-1939), 스왈른(William L. Swallen, 蘇安論), 베어드(William M. Baird, 裵緯亮), 위트모어(Norman C. Whittenmore, 魏大模), 샤록스(A. M. Sharrocks, 射樂秀),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1894-1939)을 그 표적으로 삼았다.
 
셋째, 민족운동의 구심점이라고 생각되었던 북장로교선교회가 운영하는 선천신성학교를 중심으로 한 선천지역을 주 타깃으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123명 가운데 지역별로는 선천지역 출신이 46명으로 가장 많았다. 123명 가운데 서울 출신 5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선천(46명), 정주(6명), 내청정(24명) 철산(4), 곽산(4), 의주(3), 용천(2) 평양(27) 황해도 신천(2) 출신들이었다. 평북 89명, 평남 27명, 황해도 2명 등 전체 123명 중 118명이 서북지역 출신들이다. 
 
 
 
2. 105인 사건과 선천신성중학교
 
처음부터 일제가 서북지역 그중에서도 선천과 신성 신성학교를 겨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혐의를 씌워 체포하여 조사를 받은 사람의 숫자 중 선천출신이 제일 많았다. 이 사건에 가담혐의자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사람이 389명이었으며, 지역별로는 평양지역이 111명, 납청정(納淸亭) 27명, 정주 27명, 선천 145명, 곽산(郭山) 30명, 철산 6명, 신천안악(信川安岳) 13명, 신의주 의주 용천 23명, 경성 7명 합 389명이었다. 위 기록이 말해주듯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사람 중에서 선천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둘째, 기소된 자의 숫자도 선천이 제일 많았다. 일제는 혐의로 체포된 145명 중에서 99명을 불기소처분하고 46명을 기소시킨 것이다. 기소된 숫자가 평양 27명, 납청정 24명 정주 6명 선천 46명, 곽산 4명, 철산 4명, 신주안악 2명, 신의주 의주 용천 5명, 경성 5명, 합 123명으로 기소된 사람의 숫자를 기준으로 할 때 선천 평양 납청정 순으로 많았다. 일제가 각 지역의 주모자로 내세운 자들이 평양은 안태국(安泰國), 납청정은 이승훈, 정주 최성주, 선천 양준명, 신천안악 김구, 경성 윤치호였다. 혐의자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사람의 수로나 기소된 사람의 수로 볼 때 선천이 어느 지역보다 심한 박해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선천이 그만큼 민족운동이 살아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방증해주고 있다.
 
셋째, 선천지역에 기소된 사람들 가운데 신성중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기소된 선천 출신 46명 가운데 신성중학교 교사는 물리 화학 국문법 교사 곽태종(郭泰種), 수학과 기하학 교사 선우혁(鮮于爀), 성경 교사 홍성익(洪成益)과 길진형(吉眞亨), 한문과 작문 교사 강규찬(姜奎燦), 체조 교사 신효범(申孝範), 사무처 총무 장시욱(張時郁) 외 안준(安濬), 이용혁(李龍赫), 임경엽(林冏燁) 등 10명이었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123중에 교사 출신이 31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31명 가운데 10명이 선천신성중학교 교사였다. 또한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학생 20명 가운데 18명이 선천신성중학교 학생으로 명단은 김성태(金成泰), 김순도(金順道), 김용선(金龍善), 김용환(金龍煥), 김인도(金仁道), 김태헌(金泰軒), 김현식(金賢軾), 라봉규(羅奉奎), 백몽량(白夢良), 백일진(白日鎭.), 선우훈(鮮于燻), 이규엽(李圭葉), 이순구(李順九), 이재윤(李在潤,) 이정순(李廷淳), 이창식(李昌植). 정덕연(鄭德燕), 차희선(車熙善) 등이다. 신성중학교 10명의 교사와 1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어 전체 선천출신 기소자 46명 가운데 무려 28명이 신성중학교 교사거나 학생들이었다. 신성학교 설립과 운영에 깊이 관여한 양전백까지 합치면 신성중학교 교사진들과 학생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대거 기소된 셈이다.
 
넷째, 신성중학교가 105인 사건의 중심세력으로 박해를 받은 것은 일제의 날조된 105인 사건의 공판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총독암살에 사용할 단총(短銃)을 구입하는 일과 동시에 선천지역에서는 이 지역 외국인 선교사들의 협조를 얻기 위한 모임이 1910년 음력 11월말 신성학교에서 평양 정주 의주 등지로부터 온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차에 걸쳐 있었다” 고 주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일제는 전국에서 온 150여 명이 신성학교에서 모여 모의할 때 신성학교 교사인 곽태종이 당시 그 학교 교장 조지 매큔 선교사에게 이 일에 협조를 요청하자고 제의하였고, 참석자 전원이 찬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섭위원을 선정했는데 교섭의원으로 곽태종, 선우혁, 장시욱, 이용혁, 강규찬, 양준명 등이 선정되어 즉시 조지 매큔 선교사를 방문했다고 공판기록을 날조했다. 이들 6명의 교섭위원들은 양준명을 제외하고는 5명 모두 신성학교 교사들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암살모의가 완료된 후 가담하기로 한 이들이 각지에서 선천으로 모여들어 안태국이 평양에서 20여명을 인솔하고 도착했으며, 이승훈이 납청정에서 30명을 인솔하고 왔으며, 김구가 황해도 신천에서 수십 명을 데리고 선천에 왔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가 “총독 데라우치(寺內)가 서순(西巡)하기로 한 1910년 음력 11월 27일 경이었다”고 한다. 선천 모살 총책임자로 “이승훈으로 결정하고 신성학교 학생 중에서 담대한 자를 선발한 후 다음날 곧 총독 사내가 오기로 한 동년 음력 11월 27일 신성학교에 다시 모여 그 동안 준비해 두었던 단총 70정을 분배했다”고 날조했다. 일제는 이런 이유를 내세우고 신성학교 학생들 18명을 기소한 것이다. 일제가 얼마나 집중적으로 신성학교 교사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일제는 1심에서 기소된 123명 중에서 이창식 등 18명에게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언도하고 105명에게는 징역 10년, 8년, 6년, 그리고 5년을 각각 언도했다. 기소된 10명의 신성중학교 교사와 18명의 학생들 가운데 8년의 언도를 받은 교사는 선우혁, 곽태종, 임경엽 등 3명이고, 6년의 언도를 받은 교사는 신효범, 장시욱, 홍성익, 이용혁, 강규찬, 안준 6명이고, 5년의 언도를 받은 교사는 길진형이다.
 
1심에서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진 후 제 2심 재판인 경성복심공판이 1912년 11월 26일부터 이듬해 3월 20일까지 52에 걸쳐 진행되었다. “변호인들의 변론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제 1심 공판과정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으며 그 결과 “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105인 중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 외 5인을 제외한 99명이 제 2심 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런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변호인단의 적극적인 변론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제가 날조된 105인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로부터 여론의 공격을 받게 되자 처음 강경한 입장에서 후퇴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처음부터 데라우치 총독 살해음모 사건은 있지도 않고 설정할 수도 없는 날조한 사건이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강규찬은 1908년 여름 김익겸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했다.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취조를 받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신민회 가입 여부에 대해 취조를 받았는데 강규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 일제가 묻는 신민회의 목적에 대한 질문에 강규찬은 이렇게 답변했다:
 
서간도(西間島)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워서 청년(靑年)을 교육(敎育)하고 일말(日末),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면 그 기회(機會)를 틈타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일으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대한 일이므로 당시로서는 통감(統監) 오늘의 총감(總督) 및 오적 칠적 대신(五賊 七賊 大臣)을 암살하는 데 있었다.
 
일제의 취조 조서에 의해 작성된 1911년 현재 대한신민회 국내조직상황표에 따르면 강규찬은 이승훈이 회장으로 있는 선천지회 산하 선천지역 평의회 회원이다. 선천반장에는 양준명이고 재무는 선우혁이 가찰은 이용혁이 맡았으며 평의회 의원으로는 양전백과 강규찬을 비롯하여 19명이다. 이들 19명 중에는 신성중학교 교사 곽태종, 장시욱, 홍성익이 포함되었다. 선우혁과 이용혁까지 포함할 경우 신성중학교 교사 6명이 신민회에 참여한 셈이다.
 
일제가 서북교회 특별히 선천 신성학교를 주 타깃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1910년 12월 29일 데라우치 총독이 선천을 지나가는 기회를 타서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며, 총독암살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신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대거 체포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체포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34년 간행된 북장로교선교사(Histo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05인사건(The Conspiracy Case): 1910년 8월 한일병탄 후 일제는 자연히 한국인들을 의심했다. 특별히 기독교회를 의심했다. ‘전투 행진곡’과 같은 교회의 찬송가들, 기독교인들이 악령들을몰아내는 대형집회들, 다윗과 골리앗과 같은 이야기, 전도 집회 모두는 반정치적(semi-politic, 半政治的)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휴 오닐 학교[선천신성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특별히 의심의 눈총을 받았다. 드디어 1911년 10월 12일 3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2주후에 모든 신성학교 교사들, 얼마의 초등학교 교사들, 많은 [신성학교] 학생들과 몇몇 다른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유 가운데 하나는 데라우치 총독이 1910년 12월 28일 선천역을 통과하였을 때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얼마 동안 신성학교는 폐쇄되었다. 1912년 3월 학교가 다시 개교했을 때 처음에는단지 19명의 학생들만 등교했으나 나중에 등록 학생이 70명에 달했고 6월에는 되돌아온 상급반 학생들 중에 8명(전체 28명의 급우들 중)이 졸업했다.
 
일제는 음력 1911년 9월 3일 오전 선천 신성중학교를 급습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각자 교실로 들어가려는 교사와 학생들을 대거 서울로 압송하면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당시 교사 중 한명이었던 곽태종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경성 경무청에서 온 이들이 신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체포 압송하던 그날 갑자기 강당에 모이라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시 신성학교 교사의 한 사람이었던 곽태종의 회고에 의하면 강당에 있던 윤산온 교장은 이렇게 알렸다: 
 
지금 서울 경무청 본부에서 순사 세 사람이 와 있소. 그들은 우리 학교 선생님 몇 분과 학생들 여러명의 명단을 제시하면서 서울까지 연행해 갈 것을 내게 요청하고 있소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아직까지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여러분은 불가불 서울까지 가서 심문을 받으며 무고함을 해명해야 하겠소. 과히 염려들 마시오. 안심하고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이날 윤산온 교장은 경무청이 제시한 교직원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교사들은 강규찬, 선우혁, 홍성익, 길진형, 장시욱, 곽태종 등 9명이었고 학생들은 4학에서 1학년까지 30여명이었다. 이들 일행은 신성학교 운동장에서 수갑을 찬 채 선천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었다. 역에는 윤산온 교장을 비롯하여 10여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나와 일행을 맞았다. 곽태종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이들은 미처 가족에게 기별도 못하고 선천을 떠나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대충 그 귀추를 짐작하고 있었던지 말없이 보고만 있어서 불길한 예감이 일행을 긴장시켰다." 
  
이름
연령
신분
1심
형량
이름
연령
신분
1심
형량
이름
연령
신분
1심
형량
양전백
43
설립자
6년
김익겸
25
졸업생
6년
김용환
21
학생
5년
노정관
39
이사
6년
양준희
28
졸업생
5년
이규엽
19
학생
5년
선우혁
29
교사
7년
손정욱
25
졸업생
5년
이순구
19
학생
5년
곽태종
29
교사
7년
이동화
22
졸업생
5년
김태헌
20
학생
5년
임경엽
28
전교사
7년
이정순
23
졸업생
5년
백몽량
20
학생
5년
신효범
33
교사
6년
차희선
23
학생
5년
김성봉
21
학생
5년
장시욱
32
교사
6년
이정순
22
학생
5년
김용선
20
학생
5년
홍성익
31
교사
6년
백일진
29
학생
5년
김순도
20
학생
5년
이용혁
26
교사
6년
나봉규
28
학생
5년
이재윤
19
학생
5년
안준
46
교사
6년
홍규민
25
학생
5년
선우훈
19
학생
5년
강규찬
39
교사
6년
김현식
22
학생
5년
정덕연
24
학생
5년
길진형
21
전교사
5년
이창식
28
학생
5년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

 

출처: 윤경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연구'와 김영혁편, '창립 100주년 신성학교사'
 
선천의 위대모, 윤산온, 샤록스를 비롯한 서북지방 선교사 30여명은 최선을 다해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평양의 마펫은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는 105명에게 유죄언도를 내렸다. 위 도표가 보여주듯 유죄 언도를 받은 105인 가운데 선천신성학교 교사 출신이 전체 31명 가운데 10명이었고, 유죄 언도를 받은 신성학교 재학생은 전체 20명 학생 중에 18명이었으며, 신성학교 졸업생으로 유죄 언도를 받은 사람은 5명이었다.
 
이들이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는 본 논고의 주제가 아니지만 서울 경무 총감부 제1헌병대 유치장으로 이첩된 피의자들은 단근지, 학춤고문,  물고문, 손톱과 발톱에 대나무 못 박기, 입안에 석탄가루 쑤셔넣기 등 무려 72종에 달하는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얼마나 고문이 가혹했으면 김근형, 정희순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심문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3. 법정에서 드러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1912년 6월 28일부터 정식 재판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을 때 기소된 123명 중 미친 김일준을 제외하고 모두 고문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허위 자백했다고 법정에서 폭로했다.
 
신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 재판은 1912년 7월 1일 열렸다. 이날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문 당한 피고들 모두가 매큔의 신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다.” 7월 1일 월요일 그 현장에서 재판의 진행과정을 지켜본 일본 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7월 1일]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몇 명의 피고들이 자신들의 자백은 고문에 못 이겨 한 것이었음을 통역관을 통해서 재판장에게 항의하였다는 점이다. 전에도 이런 종류의 진술이 있었지만 나는이제야 통역관들이 피고들의 고문(torture)이라는 조선말을 훨씬 부드러운 단어로 대체했음을 알았다. 사실 통역문제와 피고에 대한 재판관들의 일반적 태도 문제는 조선말과 일본말을 모두 잘 아는사람들 사이에는 상당한 논쟁거리가 될 만한 주제이다.
 
이날 14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재판을 받은 순서는 길진형, 최덕윤, 노정관, 강규찬, 안준, 장시욱, 손정욱, 홍성익, 곽태종, 양준희, 이창석, 정덕연, 김용환, 이규엽이었고, 이중 첫 6명은 오전에 조사를 받았다. 첫 번째 재판정에 선 길진형은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했고, 자신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임을 밝혔다. 그는 매큔 선교사가 학생들에게 암살 모의를 지시했다는 사실도, 황해도 신민회원들을 만났다는 사실도, 로버츠 선교사가 학생들에게 다윗과 같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연설했다는 사실도, 선천역에 신성학교 학생을 가장하고 갔다는 사실도 모두 부인했다. 그 외 다른 다섯 명의 사람들도 한 결 같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피고[길진형]에 대한 신문이 끝난 후 나머지 다섯 명의 피고인[최덕윤 노정관 강규찬 안준 장시욱]에 대한 신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술은 여기에 모두 적을 만한 가치가 없어 요약만 하겠다. 그들은 모두 신민회 회원임을 부인했으며, 총독 암살계획을 세웠다는 것과, 그 계획이 윤치호와 양기탁에 의해 지시되었다는 것도 부인했다. 그들은 모두 총독 암살을 위해 선천역으로 갔다는 것도 부인했으며, 매큔 교장과 또 다른 선교사들이 이 계획에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했다.
 
이날 강규찬도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했음을 말해준다. 같은 날 오후 재판정에 선 손정욱, 홍성익, 곽태종 모두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양준명의 동생 양준희와 신성학교 학생 이창식과 정덕연 역시 판사의 질문에 “결코 들은 바 없다,” “받은 바 없다,” “아는 바 없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판사가 학생 김용환에게 “피고는 왜 예심 신문 때 지금과는 다른 진술을 했는가?”라고 질문하자 “더 이상 고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단호히 답했다. 신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용기 있게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함으로 조서에 있는 진술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임을 폭로한 것이다. 그 결과 이날 재판과정을 통해 “몇 가지 놀라운 사실들과 신문방법들”이 폭로되었다. 검사는 피고들이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자백을 번복하기 위한 상투적인 변명으로써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된다고 강변했다.
 
1912년 9월 28일 20회 공판에서 판사는 123명의 기소자 중 이창식 등 18인을 제외한 나머지 105인에게 검사측이 구형한 형량대로 구형했다. 105인은 판결에 불복하고 상급법원인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하였다. 변호를 맡은 우자와, 오쿠보, 하나이, 오가와, 다카하시, 미야케, 나카무라, 나카노 등 10명의 일본인 변호사와 장도, 권혁책, 김정목, 박용태, 윤방현, 태명식, 박승빈, 이기환 등 8명의 한인 변호사들은 법정에서 관할위 문제, 법률적용상의 위법성 문제, 모살죄 적용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변론했다.
 
비록 이들 변호사는 105인 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1912년 11월 26일부터 1913년 3월 20일까지 진행된 상급법원의 재판에서 재판상의 문제점이나 법률적용상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 그 결과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임치정, 옥관빈 6인을 제외한 99인이 무죄로 풀려났고, 이들 6인도 1915년 2월 12일 특별사면 형식으로 출옥했다. 
 
풀려난 신성학교 교사들은 더 이상 교사로 재직하기 힘들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913년 봄 대부분의 교사들이 무죄 석방된 뒤 그해 여름 곽태종(郭泰鍾)은 미국에 망명했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세상을 떠났다. 선우혁(鮮干爀)은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활약하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에는 거취 불명이었다. 홍성익(洪成益)은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하였고, 강규찬은 평양신학교에 진학해 안수 받고 평양산정현교회 목사가 되었다. 임병엽, 길진형, 이용혁, 일명 이일(李逸) 등도 도미하여 안창호 선생이 영도하던 흥사단(興士團) 운동에 참여하여 교포사회에서 활약하였다. 그 중에 길진형은 다시 귀국하여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임병엽, 이용혁 양씨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신성학교 교사들은 훗날 국내외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거의 동시에 중국에서 진행된 만청(滿淸)의 오족공화(五族共和)의 혁명운동은 신성학생들에게 무한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 사건은 훗날 3·1독립운동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고 3·1독립운동은 다시 중국 청년들에게 5.4운동을 일으키도록 영향을 주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이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백낙준의 해석에 동의하던 하지 않던 분명한 사실은 105인 사건이 3․1독립운동과 밀접이 연계성을 지니며 독립운동으로 승화되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105인 사건을 통해 한국의 기독교와 민족운동과의 상관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한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105인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 세력, 특별히 무섭게 발흥하는 서북기독교 세력을 제거하려는 데서 출발했다.
둘째, 선교사들이 배후에서 한국인들이 총독을 살해하도록 조정했다고 꾸며 선교사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셋째, 일제는 기독교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매큔이 교장으로 있는 선천신성학교를 주 타깃으로 삼았다. 1907년 “대한자강회월보유감”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강규찬의 민족의식은 매우 분명했다. 그는 이 같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신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신성학교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넷째, 구속된 이들 거의 대부분이 고문에 못 이겨 전혀
하지도 않았던 총독살해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허위자백을 했고, 강규찬 역시 1주일 동안 매일 일경에 취조를 했지만 1주일을 버티다 김일준이 허위 자백하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경의 강압에 무너졌다. 이 사건은 강규찬에게는 가장 가슴 아픈 사건으로 남았다. 하지만 강규찬은 이 사건을 자신의 생애에 거울로 삼고 이후 일생동안 일제의 식민 탄압에 용감히 맞섰다. 
 

 < 박용규저, 강규찬과 평양산정현교회에서 발췌, 편집함>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9.01.25 10:21
  • 수정 2020.12.3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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