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韓國民)이다.”

1919, The Korean Situation

 
 

 

목     차 
        가. 3·1운동에서의 기독교 역할      
         나. 평양기독교와 3·1독립운동        
              다. 일제의 3·1운동 탄압과 한국장로교회   
       라. 장로교 선교사들과 3·1운동      
맺는 말
 
한국교회는 겨레와 함께하는 교회였다. 처음부터 민족의 독립은 한국교회가 가장 열망했던 주제였다. 105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비정치화 노선을 걸었지만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는 의식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대거 신민회에 핵심 멤버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특히 평양과 선천을 중심한 관서지방 기독교인들은 이 일에 선두주자였다. 105인 사건, 조선국민회사건, 3·1독립운동이 보여주듯 민족운동의 선봉에 관서 지방 기독교가 있었다.
 
한국교회와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3·1운동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한국교회는 기미년 3·1독립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국내외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중추세력인 일곱 그룹의 지도 인물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중국 상해에 김규식, 여운형, 선우혁, 서병호, 신석우, 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송하여 우리민족의 독립을 호소하였고 선우혁을 국내 지도자들과 협력하도록 국내에 파송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총회와 흥사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한 안창호, 이승만, 정한경, 그리고 연해주에서 3·1운동을 일으킨 이동휘, 일본 동경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이들도 기독교 계통의 메이지학원의 한인 학생들이었다.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장로였고, 여운형은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전도사였으며, 선우혁은 정주교회 집사였고, 서병호는 소래교회 집사였으며 신석우는 감리교 목사였다. 이승만, 안창호, 정한경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이동휘도 평양신학교를 수학한 전도사였다.
 
국내에서 삼일운동 준비를 주도한 서울 평양 정주 모두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접촉하며 삼일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서울의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은 기독교인이었고, 김선두, 강규찬, 변인서, 도인권, 이덕환 등 목사와 장로가 중심이 되어 삼일운동을 이끌었던 평양 역시 기독교가 중심세력이었으며, 정주에서도 이승훈, 김병조, 이명룡 등 목사와 장로가 삼일운동을 준비하고 이끌어 갔다.
 
이중에서도 105인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승훈이 조서에서 밝힌 대로 기독교 측은 그가 인수하여 주도하였고 천도교 측은 최린이 주도하였다. 이승훈은 조서 과정에서 “금번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야소교 측은 피고가 주장하여 운동한 것인가”라는 일경의 질문에 “그렇다. 야소교 측은 내가 인수하여 주도 하였고, 천도교 측은 최린이가 주로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답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천도교 측의 책임자가 최린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실제로 두 사람이 삼일운동의 준비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가. 3·1운동에서의 기독교 역할
 
천도교 측과의 연합전선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한 이들도 기독교인들이었다. 김양선의 말대로 이승훈 장로의 제자며 서울중앙중학교 교사였던 현상윤과 그 학교 교장 송진우 그리고 최남선의 주선으로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이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연합전선의 구축과정에서 한 때 최남선 송진우 최린이 개인 사정으로 후퇴할 뜻을 표시하였을 때 이승훈, 박희도, 함태영이 기독교 측 단독으로 거사를 결행한다는 선포를 했으며,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 측은 합동을 다시 요청하게 되어 그 연합전선이 성사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삼일운동 준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교회는 삼일운동의 준비와 진행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특별히 한국장로교회의 리더십은 두드러졌다. 33명의 서명자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고, 이들 16명 중 7명이 장로교 지도자들이었다. 3·1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승훈이 정주장로교회 장로였고,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던 평양장대현교회 길선주, 선천 북장로교회 목사 양전백, 정주 장로교회 목사 김병조, 신의주 동장로교회 목사 유여대, 남산장로교회 집사 이갑성, 정주 덕흥장로교회 장로 이명룡도 모두 장로교인이었다. 이들 모두가 관서지방 장로교회 출신이었으며, 이중 3명은 105인 사건으로 유죄 언도를 받은 이들이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자들 123명이나 유죄 언도를 받은 105인을 기준으로 할 때도 서북지역 출신이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을 앞서 살펴보았다. 이 점은 삼일독립운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105인 사건으로 기소되거나 유죄 언도를 받은 이들이 삼일독립운동에서도 여전히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날조된 각본에 의해 기소되어 유죄 언도를 받았던 상당수의 서북지역장로교회 지도자들이 1919년 삼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의 인물들이 신민회의 지도자들이었음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운동에 서명한 7명의 장로교 지도자 가운데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등 3명은 105인 사건으로 유죄 언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105인 사건과 3·1운동과의 연속성은 단순히 33인 가운데 3명이 105인 사건으로 유죄언도를 받은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삼일운동 진행과정에서 105인 사건으로 기소되거나 유죄언도를 받은 서북지역장로교회 지도자들은 매우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처음 삼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곳이 서울, 평양, 정주 세 곳이었는데 그 중요한 발판을 놓은 인물은 105인 사건의 동지 선우혁, 양전백, 이승훈이었다.
 
선우혁은 105인 사건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조국의 국권 회복에 투신했다. 그러던 중 1918년 미국 대통령 위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론과 파리 강화 회의에 소식을 듣고 여운형 장덕수 서병호 한진교 등과 협의하여 1918년 2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1월 말경 선우혁이 서병호와 함께 국내에 들어와 선천장로교회 담임목사 양전백(梁甸伯)을 찾아갔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는 일과 국내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는 일이었다. 양전백을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양전백은 선우혁 집사의 부탁을 수용하고 이승훈장로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했다. 이승훈은 뜻을 같이하기로 하고 5천원의 거금을 선우혁에게 주고 길선주와 강규찬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105인 사건을 통해 옥고를 치른 선우혁, 양전백, 이승훈의 거룩한 의기투합은 기독교계를 움직이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평양의 지도자들도 곧 합류했다. 이승훈의 안내장을 가진 선우혁은 강규찬과 길선주를 만났고 길선주는 105인 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자기 교회 부목사인 변인서에게 그를 보냈다. 변인서는 105인 사건과 관련 있는 평양의 교계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서문밖교회 목사이며 장로교 총회장 김선두 목사,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 장대현교회 장로 이덕환(李德煥), 도인권(都寅權) 목사, 김성택(金聖澤) 목사가 한 자리에 모였고 이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3·1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곧 평양의 김선두, 강규찬, 도인권, 이덕환, 윤원삼, 김동원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과 인원동원 문제를 논의하였고 장대현교회 윤성윤은 상당한 자금을 내놓았다.
 
평양 시내 미션 스쿨 학생들과 교사들도 참여했다. 윤원삼과 안세환을 통해 숭실대학교, 숭실중학교, 숭덕학교, 숭의여학교, 숭현여학교 등 평양 시내 남녀 기독교 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접촉하여 이들과 교섭하도록 하였다. 윤원삼이 숭덕학교 교사 함석원, 관권응, 황찬영, 김제현 등을 만났고 안세환이 숭실대학 학생 이보식과 박형룡을 만나 협력을 끌어냈다.
 
같은 기간 서울 YMCA 간사 박희도와 세브란스 병원 약제사 이갑성이 서울에서 삼일운동 준비를 진행했고,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을 방문해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했으며, 이승훈은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이명룡, 함태영, 현순, 오화영,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 오기선 등과 접촉하여 이들의 동의와 협력을 구했다. 이승훈, 박희도, 오기선, 오화영, 신흥식, 함태영, 김세환, 안세환, 현순 등 개신교 측 지도자들은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는 이갑성의 집에서 천도교 측과의 협력문제를 상의했고, 이 문제를 위임 맡은 이승훈, 함태영은 2월 24일 최린을 찾아가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통보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 측과, 다시 한용운과 백용성을 통해 불교 측과 힘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신홍식, 박희도, 오화영, 정춘수, 이갑성,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박동완, 신석구 등 기독교 측 16인,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일, 권병덕, 양한묵, 김완규,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박준승, 나인협, 임예환, 이종훈 등 천도교 측 15인 그리고 한용운 백용성 등 불교 측 2인, 합 33인이 구성되었고, 그 대표를 손병희가 맡았다.
 
이승훈, 함태영은 최린과 만나 독립운동의 거사 일을 고종의 장례로 수십만의 민중이 경성에 모여드는 국장일 전전일인 3월 1일을 택하고 이날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지방 부흥회 인도 중인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네 명의 목사를 제외한 민족대표 29인이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거사의 준비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기독교, 특별히 한국장로교회와 3·1운동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역사적 혜안이 이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교인만이 현시점에서는 국제 정세에 가장 정통하여 민족자결의 횃불을 들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시간적으로 보아 이때가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하리만큼 그 안목이 트였다. 예수교인의 이와 같은 박력 있는 행동과 의의 있는 존재 양식이 없었더라면 이 백의민족이 호소하려 하고 수호하려고 하는 이념이 총을 쏘듯이 전국에 무섭게 작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이다. 물론 저들은 선교사들에게서 어떤 묘한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회의 공동체 안에는 어떤 크고 어려운 일이라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유능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미주, 만주, 중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로서 세계정세에 재빨리 반응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동인과 여건이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3·1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1919, the Korean Situation)
 
세계정세에 남다른 안목을 가진 기독교 지도자들은 민족의 아픔에 침묵할 수 없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과 파리강화 회의에서 보여주었던 소수민족에 대한 강대국들의 관심과 배려는 조선독립을 위해 절호의 기회였다. 일제의 국권찬탈의 아픔을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3·1만세운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의 의지를 전 세계에 드높인 것도 그 때문이다.
 

 

나. 평양기독교와 3·1독립운동
 
김양선 목사가 “3·1운동과 기독교”라는 논문에서 지적하였듯 한국장로교회, 특히 한국서북장로교회가 3·1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 사실은 3·1독립시위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05인 사건으로 유죄언도를 받은 강규찬, 변인서, 김동원 등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평양은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평양장로교회는 처음부터 기독교민족운동신앙적인 차원에서 전개했다. 3월 1일 평양 장로교회에서는 총회장 김선두 목사,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이일영 목사가 중심이 되어 6개 교회(장대현교회, 남문외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서문외교회, 창동교회)가 연합하여 숭덕학교에서 3천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종황제 봉도식을 거행했다.
 
고종황제의 봉도식이 거행된 뒤 참석자들에게 계속 남아 있으라는 안내가 있었다. 봉도식이 거행된 것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평양숭덕학교 교정에서 였다. 평양지역 조선독립선언식의 사회를 맡은 사람은 총회장 김선두였다. 그는 예배가 끝나고 남아 있는 교인들에게 베드로 전서 3장 13-17절과 로마서 9장 3절을 읽었다.
 
이미 참석자들은 분위기를 통해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현장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번하이젤이 증언하는 대로 참석한 교인들은 그의 낭독하는 음성의 억양을 들어서도 무엇인가 심각한 것을 내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날 총회장 김선두가 위 성경 말씀을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지 찾을 수 없지만 성경본문을 참고할 때 참석자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기독교인으로서 양심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선두는 1918년 제7대 총회장에 피선되어 총회장으로 재직하던 중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지역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날 독립 선언서 낭독은 숭실대학을 졸업한 정일선이 담당했다. 그는 선언서 낭독에 앞서 이날이 자신에게는 가장 기쁘고 영광스런 날이라는 언급을 하고 차근차근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어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 양전백 등과 함께 2년간 옥고를 치른 강규찬이 단에 올라 “격려 연설”을 했다. 그는 호소력 있는 강연을 통해 참석자들의 가슴에 민족의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그가 행한 강연의 요지는 “나는 세계가 어지러웠는데 평화가 되어 기쁘다, 또 인도 정의를 제창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강규찬의 연설은 3천명의 회중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고취시켜주었다. 이미 대한자강회에 참여하고, 신민회의 멤버로 선천신성중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어 다른 교사들과 함께 105인 사건으로 유죄언도를 받았던 강규찬의 호소는 힘이 있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전에 준비된 태극기가 전달되었다. 그들은 연단 벽에 대형 태극기가 매달리자 태극기를 손에 들고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선언서는 서울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상에서 인쇄하여 평양으로 밀송되었고, 태극기는 박현숙 교사가 이끄는 여학생들이 비밀리에 미리 준비한 후 빨래 광주리와 물지게로 운반하여 숭실학교 지하실에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고 설교가 끝난 후 전 회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감리교의 경우 박석훈 목사, 장로교의 경우 김선두의 지휘로 참석한 군중들은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평양의 여러 장로교회 교우들로 구성된 군중들은 집회 장소인 숭덕학교를 나와 가두 행진에 들어갔다. 이들은 좁은 언덕길을 내려와 관후리 골목을 빠져 나가 평양의 종로 거리에 이르자 거리는 온통 군중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태극기를 하늘 높이 흔들며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상인들은 가게 문을 급히 닫고 합세를 하였고 시민들은 기꺼이 데모 행렬에 합류 평양시내는 마치 독립을 되찾은 듯 독립만세 소리와 감격의 눈물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들뜬 마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이날 평양의 6개 장로교회 3천여 명의 교우들의 함성이 평양시내에 메아리쳤다. 숭덕학교에 모인 군중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켜주며 3·1독립운동에 앞장선 강규찬, 이 일에 앞장서기 위해 오산학교 교장을 그만둔 조만식을 비롯한 산정현교회 목회자와 교우들은 누구하나 할 것 없이 민족애로 가득 찼다. 평양의 교회들이 다 그런 교회였지만 특별히 민족의식이 투철한 신앙인들이 모여 있는 산정현교회는 처음부터 삼일운동의 주역이었다. 강규찬은 변인서, 이덕환, 김선두와 함께 삼일운동을 주도했고, 조만식은 아예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이 일에 전념했다. 조만식은 거사 전후 여러 지방을 비밀리에 순회하며 중앙에서 진행되는 거사 소식을 각 지방에 전해주고 지역 지도자들에게 3·1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3·1독립운동은 일사분란하게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다. 일제의 3·1운동 탄압과 한국장로교회
 
이 민족적 거사 앞에 일제는 대단히 놀랐다. 일제는 대대적으로 한국교회를 탄압했다. 무서운 검거 선풍과 박해가 평양에서 몰아쳤다. 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장로교회, 특히 서북지역의 교회 피해는 극심했다.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이승훈, 김병조는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33인 가운데 한명이었던 길선주는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고, 자신의 인장을 함태영에게 맡기고 33명 독립선언 서명에 참가한 양전백은 3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유여대는 3·1운동 당시 양전백 목사 집에서 이승훈, 이명룡, 김병조 등과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정명채, 김두칠 등 20여명과 의주에서 별도의 만세계획을 세웠다. 유여대는 1919년 3월 1일 자신이 담당하는 교구 교인들과 숭실학교 학생 칠팔백 명을 모아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 33인으로 삼일운동을 주도한 이승훈은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언도 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2년 출옥했다. 3월 1일 선천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를 주도하던 김병조는 상해로 탈출하여 이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피해는 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평양의 경우 장대현교회 집회를 주도한 윤원삼이 체포되고 황찬영, 박인관이 서대문 감옥소로, 산정현교회 당회장 강규찬 목사는 경성 서대문감옥에, 김선두 목사, 정일선 목사, 남산현교회 집회를 주도한 김찬응, 주기원, 박석훈 목사 및 홍기황, 박치록 장로 등은 평양감옥소에 수감되었다. 김창건, 변인서 역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3·1운동으로 인한 장로교의 피해 상황은 대단했다. 총회록에 기록된 각 노회의 피해 상황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1919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장로교회의 피해는 사망자 41명, 복역자 976명, 태형 928명, 중상자 116명, 집행유예 159명, 방죄방면 5명, 부상석방 16명, 악형 85명, 상고 중 60명, 교회 파괴 31동 피고인원 총계 2,386명이었다.
 
각 노회는 그 피해 상황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총회에 보고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경남노회 및 경북노회, 경충노회, 전북노회 및 전남노회 남한 지역의 노회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서북지방의 노회의 피해는 더 심했다.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 산재한 황해노회, 의산노회, 산서노회, 평남노회와 평북노회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특히] 평남노회와 평북노회의 피해가 어느 다른 지역의 피해보다 심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만큼 이 지역의 교회들이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방증해준다. 평남노회와 평북노회 외에 함남노회와 함북노회 피해를 포함시킬 경우 3·1독립운동으로 인한 서북지역 한국장로교회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1919년 10월 4일 평양신학교에서 회집된 제 8회 장로회 총회 때 전국의 각 노회가 보고한 3·1운동 피해 상황을 종합하면 체포된 교인이 총 3,804명, 체포된 목사 장로 134명, 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 체포된 자가 202명, 구속된 성도가 남자 2,125명, 여자 531명, 매 맞고 방면된 자 2,162명, 사살된 성도 41명, 1919년 10월 현재 수감된 성도 1,642명, 매 맞고 죽은 자 6명, 파괴된 교회당 12개, 그리고 파괴된 학교가 8개였다.
 
라. 장로교 선교사들과 3·1운동
 
한국 선교사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설정한 정교분리 원칙에 의해 직접 삼일운동에 가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3·1운동에 대해 협조적이었고 우호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김양선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한국교회]와 똑같은 심정을 가지고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준 것은 사실이다. 켄델이 “한국에 관한 진실”이라는 책에서 증언하듯 3천명의 군중 가운데는 평양지역의 영향력 있는 사무엘 마펫, 찰스 번하이젤, 그리고 홀드 크로프트도 참여했다.
 
3월 1일 한국인들 가운데 며칠 동안 억눌려 온 흥분들이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여러 가지 소문들을 들었다. 마펫과 홀트크로프트와 나[번하이젤]는 지역 3·1운동 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하고 우리들이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그 [숭덕학교]운동장이 사람들로 가득찬 것을 발견했다. 모든 우리 교회 학교 학생들이 거기에 있었고 또한 많은 공립학교 학생들도 그곳에 모여 있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살펴볼 때 여기 “나”는 번하이젤로 여겨진다. 이들 세 명의 선교사는 처음부터 삼일운동 시위대에 끼여 그 진행과정을 지켜보았다. 일경은 선교사들을 의심했고 실제로 마펫과 모우리 선교사가 4월 4일 경찰에 호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김양선이 지적하는 것처럼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삼일운동에 적극 협력하였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수 베커 박사는 독립선언 발표 장소에 대한 적절한 의견을 제시해 주었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우리의 받은 참상을 사진에 담아 일본의 폭정과 야만적 행동을 세계에 폭로시켰고, 숭실전문학교 제 5대 교장 마우리 박사는 자기 집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한 학생들을 은닉 보호하고 독립선언문을 번역하여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탓으로 평양 감옥에 구금되어 징역 6개월의 구형을 받았다. 동양선교회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강경에서 독립운동을 협조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구타당하였고, 선천 신성중학교 교장 윤산온 박사는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했다 하여 국외 추방을 당하였고,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펫 박사는 세계선교대회에서 한국독립을 협조하자는 연설을 행하였다. 서울 감리교 선교사 노블 박사, 빌링스 박사 등도 3·1운동에 크게 협조하였다. 그리고 중국 상해 Y.M.C.A. 총무 질레트 박사와 피셔 박사는 상해 임시정부에 크게 협력하였다.
 
총독부 관리가 사태의 진압에 선교사들이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 제임스 게일은 소요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며 반일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토해냈다. 게일은 첫째, 독립운동을 선교사들이 그 신분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둘째, 그렇게 하면 한국교회의 적대감을 일으키고 따라서 교회 문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정신적 영향력 감퇴 그리고 선교활동에 지장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 셋째, 본국 정부가 선교사들에게 정치문제에는 전혀 상관치 말라고 고시한 것을 들어 총독부의 요청을 거부했다.
 
조지 매큔은 삼일운동이 일어난 후 수많은 시위 참가 학생과 교직원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일본 헌병의 가택 수색을 완강히 거절하여 이들을 구출하는 한편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투옥된 학생들과 애국지사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찾아 위로하고 도와주었다. 조지 매큔은 1921년 큰 아들의 병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이는 표면상의 이유였고 그 이면에는 일제의 추방령 때문이었다.
 
삼일운동의 피해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선교사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지방에 있는 선교사들은 그 지방에서 일어난 일본인들의 잔학행위를 선교본부에 보고하였다. 카나다 장로교선교회 스코필드(Frank W. Scofield)는 덕수궁 광장에서 시위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해외에 알렸고, 제암리 참상을 사진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으며, 북장로교 선교회 원한경(Horace H. Underwood) 선교사는 제암리 교회 대학살 내용을 미국에 보고해 7월 17일자 국회보고에 이것이 게재되었다.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은 일어난 모든 정황을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 있던 북장로교 선교회 방위량(William N. Blair) 선교사에게 편지를 통해 알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와 필요한 곳에 보내도록 요청했다. 이와 함께 사무엘 마펫은 미국 공사 리 버콜즈(Lee Bergholz)에게 평양 주재 선교사들의 가옥이 일경들에 의해 수색을 당하고 모의리(Eli Mowry) 선교사가 일경에 체포되어 구속된 사실을 알렸다. 1920년 5월 사무엘 마펫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보고했고, 1921년 9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총회(The Alliance of the Reformed Churches)에 참석해 한국지원을 호소했다.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엄정중립의 정책을 어기고 독립운동을 직 간접으로 지원하거나 참상을 해외에 알렸다.
 
주한 선교사공의회는 새로 부임한 사이토(齊藤) 총독에게 일본 관리들의 비인도적 만행을 반박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원한경, 쿤스, 크램, 스코필드 등으로 삼일독립운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 조사에 나섰고, 스왈른의 아내 샐리 스왈른(Sallie Swallen)은 자신이 목도한 참상을 자신의 형부 공화당위원 애쉬부룩(William Asbrook)에게 일일이 적어 보냈는데 그것이 오하이오 주 신문에 게재되었다.
 
미국의 선교본부는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한국사태(The Korean Situation)라는 팜프렛을 만들어 전 세계에 배포하였다. 미국의 개신교와 천주교 42개 교파는 한국 독립을 비롯한 기도제목을 놓고 매일 1회 이상을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전국교회에 그 실행을 호소하였고, 미국교회 연합회는 주미 대사에게 일본의 만행에 대한 강경한 항의서를 제출하고 윌슨 대통령에게는 한국독립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맺는 말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한국장로교회, 특별히 관서지방 장로교회는 3·1운동에 동참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황해도 서해교육총회사건, 신민회 및 105인 사건, 조선국민회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던 한국장로교회, 특별히 관서지방 교회들은 1919년 3·1독립운동에서도 앞장섰다. 그 중에서 평남의 평양과 평북의 선천에 있는 교회들은 선봉에 서있었다.
 
독립운동 서명자 33명 가운데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김병조, 유여대 등 5명이 평양장로회신학교 출신이거나 재학했던 인물이다. 이승훈은 정주장로교회 장로였고, 길선주는 평양장대현교회 목사였으며, 양전백은 선천 북장로교회 목사, 김병조는 정주 장로교회 목사, 그리고 유여대는 신의주 동장로교회 목사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을 하지 못한 이승훈을 제외하고 나머지 4명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목회자들이었다. 1931년판 평양신학교 요람에 1919년 삼일운동 시위도가 삽입되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남산장로교회 집사 이갑성와 정주 덕흥장로교회 장로 이명룡을 포함할 경우 독립운동 서명자 33명 가운데 7명이 장로교인이었고, 이들 모두가 관서지방의 장로교 출신이었다.
 
총회 산하 12개의 노회 중 피해를 보지 않은 노회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노회들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또한 목회자들만 아니라 장로와 조사와 영수 그리고 집사나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직분의 교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민족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하였고, 민족을 살리는 길이 곧 자신들이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 중에서도 평양지역의 장로교회가 그 선봉에 있었다. 삼일운동의 준비와 진행 그리고 박해에 이르기까지 서북지역의 한국장로교회, 특별히 평양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한국장로교회는 기독교민족운동의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105인 사건, 삼일독립운동의 준비, 진행과정, 박해에 이르기까지 한국서북장로교회들은 삼일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한국장로교는 삼일운동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삼일운동 이후 이를 기념하는 기념대회를 가졌으며, 심지어 해방 후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평양의 장로교회들은 삼일절기념예배를 연합으로 드렸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삼일운동과 한국장로교회 특별히 서북장로교회와의 연관성을 피할 수 없다.
 
둘째, 105인 사건과 1919년 기미년 삼일독립운동이 모종의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 서명자 33명 가운데 105인 사건으로 유죄언도를 받은 이들이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3명이었고, 그 외 삼일운동에 적극 가담한 선우혁, 강규찬, 변인서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이들이었다. 여기서 105인 사건과 삼일운동이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본다. 윤치호가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삼일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셋째, 3·1독립운동에서 산정현교회와 강규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강규찬은 산정현교회 목사로서 숭덕학교에 온 교우들이 동참하도록 독려했고, 6개 장로교회 교우들이 모인 후에는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강연을 통해 독립의지를 강하게 불어넣었고, 식이 끝난 다음에는 시위에 앞장섰다. 이런 이유로 소열도는 강규찬이 33인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비록 33인 가운데 한 명이기는 하지만 길선주가 집회를 인도하느라 숭덕학교 집회 현장에 없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산정현교회 김예진이 거사에 적극 참여하고 조만식이 오산학교 교장을 그만두고 3·1운동에 헌신한 것도 강규찬의 민족의식에 기초한 목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박용규저, 강규찬과 평양산정현 교회에서 발췌, 편집함 >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19.01.30 15:26
  • 수정 2020.12.3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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