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Chadwell, Arthur Earnest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Chadwell, Arthur Earnest

 

Ⅰ. 기본사항

이름: Chadwell, Arthur Earnestv / 차드웰 / 한국명: 차애덕
 
1. 생몰연도: 1892. 8. 1 – 1967. 11. 21.
2. 출신 및 소속: 영국, 성공회
3. 한국선교기간: 1926 – 1941 / 1946 - 1967. 11. 21.
 
4. 연표
1892. 8. 영국 런던에서 출생
1921-1926. 런던대학과 차선트 성공회신학교 졸업
1923. 사제로 서품을 받음
1926. 영국 성공회의 파송 받고 내한(충북 진천지장 진천성공회 사제로 사역)
1928. 평안북도 박천 성공회 담임목회 사역
1931. 평양 성공회 교구로 발령(평양 사역)
1940. 7. 24 - 1941. 평양 형무소 투옥
1941. 강제출국
1946. 청주 입국 후 청주지방 전도
1951. 11. 30.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한국보좌주교로 서품
1953. 5. 31. 서울 대성당에서 부제성직에 김태순과 윤주현을, 사제성직에 이천환과 김경득을 각각 안수
1955. 주일복음 설교집 출판
1967. 11. 21. 노환으로 사망
 

Ⅱ. 선교사 소개

1. 한국에 부임하기까지

차드웰(A. Ernest Chadwell, 차애덕)은 1892년 8월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런던대학과 차선트 성공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사제로 서품을 받고 성공회 신부가 됐다. 얼마 동안 영국 성공회에서 신부로 사역을 하던 그는 선교의 소명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1926년 영국 성공회의 파송을 받고 내한한 Chadwell은 충북 진천 성공회에서 사역하면서 한국어 훈련을 받는다.

2. 첫 번째 한국 사역

이후 Chadwell은 1928년 평안북도 박천 성공회에서 담임목회자로서 사역하였으며, 1931년부터 평양 성공회 교구로 발령을 받고 평양에서 사역하였다. 그러던 중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된다. 영국 선교사들의 탄압 배경에는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가 발표한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에 대한 강력한 항의 성명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 첫 번째 피해자인 Chadwell은 1940년 7월 24일 외환관리법 위반과 단파 라디오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Cooper 주교도 같은 해 8월 10일 연행되어 4일간의 구류를 살았다. 그 이듬해인 1941년에야 석방된 Chadwell은 한국에서 강제 추방된다.

3. 두 번째 한국 사역

한국을 떠난 Chadwell은 스리랑카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영국으로 귀국하여 그곳에서 사역을 감당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다시 내한한 그는 청주지방 성공회와 그 주변 지역을 순회하며 사역을 감당한다.
그러던 중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공산군은 청주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이때 Chadwell은 주민들이 질서 있게 피난을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쟁고아들의 상황을 본국 성공회에 알리고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전쟁 기간 중 공산군에 의해 납북된 쿠퍼(Alfred Cecil Cooper, 具世實) 주교를 대신하여 Chadwell에게 한국 성공회를 맡기기로 하고, 그를 보좌 주교로 임명하여 1951년 11월 30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주교 승품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Chadwell은 한국 선교를 위하여 성직자의 확보가 1차적 과제라고 생각하고 긴급히 독신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신 선교사를 요청한 사유는 선교비의 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빨리 한국어를 습득하고, 적어도 10년간 봉사할 수 있는 젊은 사제를 파송해주기를 요청하였다.
한국성공회는 Chadwell의 지도 아래 전쟁의 상처를 씻으며 건실하게 성장해갔다. Chadwell 주교는 1953년 5월 31일 서울대성당에서 1949년 이래 처음으로 부제성직에 김태순과 윤주현을, 사제성직에 이천환과 김경득을 각각 안수하였다. 그 후 이천환(李天煥)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75년간의 선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1965년 5월 27일 주교 승좌식을 갖고 한국인 초대 주교로서 서울교구를 창립한 인물이 되었다.

4. 은퇴 이후

출판물을 선교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 Chadwell은 1955년 주일복음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이후 1963년에 은퇴한 그는 인천성당에서 1년간 봉직하였다.
1967년 11월 21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3묘역의 성공회 구역(자-3))에 안장되었다. Chadwell의 묘비에는 “May His Wounds both wound and heal me, He enkindle, cleanse, anneal me. Be his Cross my strength and stay(주님의 상처는 나를 상하게 하여 고치며, 불 붙여 깨끗이 하여 단련하고. 주님의 십자가는 내 힘과 의지가 되어지이다.”이라 쓰여 있다.
 

Ⅲ. 사진

당시 차드웰 주교의 한국에서 사역 당시 모습(왼쪽)
 
 
양화진에 있는 차드웰 주교의 묘비
 
 

Ⅳ. 참고자료

- 신호철 편저. 『이 땅에 떨어진 밀알들, 양화진 선교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서노회, 2004.
- 김승태, 박혜진 편.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 <선교문화신문>. 2005. 8. 30.
- <한국장로신문>. 2007. 1. 27.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오헌 실장 정리 **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20.03.04 07:41
  • 수정 2022.02.1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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