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에 해외선교 꿈 심은 '대중전도운동의 선구자' / 국민일보, 2017. 1. 8.

1888년 11월 12일 제임스 게일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게일이 한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무디는 게일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격려했다. “젊은이, 한국으로 떠나는 거지? 당당하게. 자네를 위해 기도할 걸세. 하나님이 자네를 축복할 거요.” 무디와의 이 역사적 만남은 게일의 중요한 한국선교 동력이었다.

무디를 통해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은 게일뿐이 아니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무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디의 고향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를 비롯해 그가 회심한 보스턴, 전도집회가 열렸던 동부의 대도시들, 그리고 그가 사역했던 시카고에는 여전히 무디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족과 유니테리언 교회 출석

무디가 살았던 시대는 한마디로 급변하는 시대였다. 영국으로부터 진화론이 물밀듯 몰려왔고 독일에서는 고등비평과 자유주의신학이 놀랍게 침투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급속히 진행됐다. 이단의 도전도 대단했다. 매사추세츠의 수많은 교회들과 함께 유서 깊은 무디의 고향 노스필드 회중교회도 유니테리언(삼위일체 교리와 달리 성자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넘어갔다.

1837년 그 교회에 부임한 올리버 에버렛도 철저한 유니테리언 목사였다. 그는 무디의 어머니 벳시가 남편을 잃고 9명의 자녀들을 힘겹게 키울 때 그녀의 가족을 헌신적으로 돌봐줬다. 무디는 다섯살 때 세례를 받고 17세 때까지 유니테리언 교회를 다녔다. 무디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 교회는 지금도 노스필드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로 남아 있다. 교회 게시판에서는 ‘주일 오전 10시 예배, 1673년 설립, 1826년 유니테리언 교회 가입’이라는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통 신앙으로의 극적 변화

무디는 17세 때 삼촌이 운영하는 보스턴의 양화점에서 일하며 마운트 버논 회중교회에 출석했다. 담임 목사 에드워드 커크는 구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상당히 복음적인 목사요 부흥운동가였다. 강단 메시지와 주일학교를 통해 무디는 처음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유니테리언 신앙 관습에 젖어 있던 그에게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변화를 가속화 시켜준 인물은 교회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이었다. 킴볼은 1855년 4월 21일, 무디가 일하는 양화점에 찾아와 예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들려줬다. 이것이 킴볼이 말한 전부였지만 무디는 완전히 변화됐다. 무디가 고백한대로 그날은 ‘성령으로 거듭난 날’이었다. 무디가 회심한 옛 양화점 자리에는 현재 커먼웰스은행이 들어섰고 건물 외벽엔 그의 회심을 기념하는 표지가 다음과 같이 붙어 있다.

“1855년 4월 21일 사람들의 친구, 노스필드 학교 설립자, 기독교 전도자 D L 무디가 이 자리에 있던 한 양화점에서 하나님께 회심했다.”

주님을 만난 후, 무디는 완전히 바뀌었다. 태양이 전에 없이 빛났고, 모든 피조물과 깊은 사랑에 빠졌으며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버논 회중교회는 그를 곧바로 교인으로 받아주지 않고 이듬해 엄격한 문답을 통과한 후에야 인정했다. 무디가 YMCA 회원이 된 것도 그때였다.

보스턴에서의 신앙경험은 무디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었다. 그가 평생 주일학교와 교회 신앙교육, 그리고 YMCA 사역을 중시한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얼마 전 필자는 무디가 회심한 양화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회중교회 고문서실에서 당시 커크 목사가 버논교회에서 사용하던 교회 문답, 무디의 입교 기록, 무디 서명이 담긴 YMCA 기록을 찾아냈다.

평생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던 목회자

1856년 9월 시카고로 이주한 무디는 4개월 후인 1857년 1월, 시카고 YMCA에서 열린 연합기도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체험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썼다. “이 도시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저는 고향 노스필드에서도 부흥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무디의 전기 작가 존 폴락이 지적한 것처럼 이 경험은 무디에게 깊은 영감을 제공했다. 그가 시카고 북부 슬럼가 노스마켓홀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였다. 처음부터 거리에서 방황하는 도시 젊은이들이 주된 관심사였다. 학생들은 800명으로 불어났고 주변 여러 교회에서 자원 봉사자들이 교사로 참여했다.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거듭났다. 1860년 11월 25일 막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도 무디의 주일학교를 방문해 격려했다.

무디는 아예 양화점 세일즈맨을 그만두고 복음전도에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시카고 일리노이 스트리트 독립교회를 설립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디는 찰스 스펄전처럼 평생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다. 그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며 겸손히 안수를 사양했다.

근대 대중전도운동의 선구자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건드리가 지적한 대로 무디는 죄로 인한 타락,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성령에 의한 중생을 외쳤고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에 충실했다. 1871년 복음성가 작곡가 데이비드 생키와 만난 후 무디의 영향력은 놀랍게 증가했다. 1873∼1875년, 1881∼1884년, 그리고 1891∼1892년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다.

1875년 생키와 함께 영국에서 가진 집회에서는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왔고 교파의 장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성경공부가 다시 활성화됐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했다. “웨슬리와 윗필드 이래 런던이 이렇게 깊은 감화를 받은 때는 없었다.”

리버풀의 한 술집 주인은 만일 무디와 생키가 한 달이 아닌 5개월을 그곳에 머물렀다면 술집 절반은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무디가 영국에서 돌아와 시카고와 뉴욕 필라델피아 브루클린 보스턴에서 개최한 대중전도 집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돌아왔고, 침체했던 교회들이 살아났다. 대중전도운동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다음세대 준비한 교육가, 선교동원가

무디는 처음부터 다음세대를 준비했다. 교회학교와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879년 마운트 헐몬 여학교를, 1881년 남학교, 1886년 시카고 무디성경학교를 설립했다. 1886년에 ‘이 세대에 전 세계 복음화를’이란 모토로 학생자원운동을 시작한 것도 무디였다. 케임브리지대 7명을 비롯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선교를 꿈꾸며 전 세계로 흩어졌다. 50년간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무려 2만500명의 젊은이가 선교사로 헌신했다. 한국은 가장 큰 수혜국이었다. 무디의 영향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게일, 베어드, 마펫, 리, 기포드, 클락 등 수많은 개척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다. 1906∼1909년 한국에 파송된 135명의 선교사 가운데 81명이 학생자원운동 출신이었다.

무디의 고향 노스필드에는 무디기념교회와 수많은 학교, 콘퍼런스가 열렸던 강당, 생가, 그리고 무디의 무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후 110년이 지난 지금도 무디성경학교와 노스필드 마운트 헐몬 학교, 무디출판사는 힘 있는 사역을 펼치고 있다.

드와이트 무디가 1855년 4월 21일 회심했던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시내 양화점 자리로, 지금은 커먼웰스은행(오른쪽 건물)이 들어서 있다. 노스필드에 있는 무디 생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마운트 버논 회중교회 YMCA 규정 및 명부집(사진 위부터).

  

드와이트 무디

 

글·사진 박용규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20.03.04 16:02
  • 수정 2020.12.1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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