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사로, 외교관으로 격변기 한국근대사의 '주역' / 국민일보, 2017. 1. 15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한국 근대사의 주역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 그가 활동했던 사역, 그가 남긴 발자취가 그랬다. 그가 한국에 입국한 1884년부터 미국으로 소환 당하던 1905년까지 20여년은 한마디로 격변의 시대였다. 이 기간은 한편으로 복음이 놀랍게 확산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식민지 각축전이 첨예하게 진행됐다. 격변의 시대에 알렌은 종교와 의학, 외교와 문학에 족적을 남겼다.

알렌의 자취는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신시내티, 톨레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그가 다닌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과 마이애미 의대, 델라웨어 제일장로교회, 은퇴 후 말년에 다닌 톨레도 제일회중교회, 그리고 가족이 묻혀 있는 묘지가 그대로 있다.

필자는 알렌의 고문서가 가득한 뉴욕시립도서관을 시작으로 그의 체취가 배어있는 오하이오 곳곳을 방문해 거룩한 소명을 따라 살았던 한 시대의 거장을 만났다.

뛰어난 의대지망생

알렌의 선교 비전은 모 교회에서 싹이 텄다. 그의 모 교회 델라웨어 제일장로교회는 해외선교가 매우 활발했다. 독실한 장로교인이었던 아버지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과 어머니 제인 알렌의 영향도 컸다. 알렌의 선교 비전은 1877∼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안대를 다니는 동안 구체화되었다. 이 대학은 3학기제로 운영되는 미북감리교 소속으로 우수한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알렌은 대학 시절 교지 편집장을 맡았고,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교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필자가 알렌의 모교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알렌의 사진과 졸업식 순서, 그의 학적부를 비롯한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

장차 의학 전공을 위해 자연과학을 공부한 알렌은 1881년 6월 30일 대학을 졸업하고 이학사(B.S.) 학위를 받았다. 그는 최우수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 회원이었고, 모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유명인사로 1910년 모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입국 첫 의료 선교사

대학을 졸업한 알렌은 바로 신시내티에 위치한 마이애미 의대에 진학했다. 이 대학은 1886년까지 오하이오 웨슬리안대 출신 가운데 10명만이 진학할 정도로 입학이 까다로웠다. 1852년 르우벤 머시 박사가 8명의 동료 의사와 함께 설립한 마이애미 의대는 알렌이 입학할 당시 교수진이 탁월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공부를 시켰고, 토요일 오전에도 수업했다. 게다가 매일 1시간씩 임상 실습을 이수하게 해 실무에 강한 의사로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알렌은 1883년 당당하게 졸업생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졸업과 함께 의사 자격도 취득했다.

알렌은 그해 10월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온 교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아내 앤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다. 앤은 문학을 전공한 대학 동료였다. 모 교회 델라웨어 제일장로교회가 재정을 후원하였다.

중국 상하이와 난징에서 첫 1년간의 선교 사역은 녹록지 않았다. 알렌은 새로운 선교지인 한국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 1884년 6월 9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엘린우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국의 여러 외국 공관들과 세관에서 의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허락하신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그곳에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일해 보고 싶습니다.”

동료 의사들도 알렌의 한국행을 적극 권했다. 1개월 반이 지난 7월 22일, 알렌은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Korea’라는 전보 답신을 받았고, 9월 20일 한국 땅을 밟았다. 이렇게 해서 알렌은 한국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병원 제중원 개원

한국에서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가 알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도착 채 3개월이 되지 않은 1884년 12월 4일, 알렌은 뮐렌도르프의 요청을 받고 갑신정변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다.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지도자 민영익이 오른쪽 귀측 두개골(頭蓋骨)의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심하게 나 있었다.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났다. 다행히 경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 표피가 잘리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민영익은 계속 피를 흘리며 빈사 상태였다.

알렌은 정성을 다해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발랐다. 그 때만큼이나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다. 만약 살아난다면 다행이지만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서양인들이 다 제물포로 피신했지만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의 후예답게 그는 공관에 남아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다.

민영익의 상처는 놀랍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1월 27일 고종은 알렌에게 현금 10만냥과 정 2품에 해당하는 참판(嘉善大夫) 벼슬을 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민영익의 치료를 통해 서양의술의 탁월성이 입증되었다. 서양의술을 바라보는 고종황제와 대신들의 시각도 완연히 달라졌다. 알렌의 제안으로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병원 제중원이 개원되었고, 개원 후 1년 동안 2만529명이 치료를 받았다. 제중원은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이곳은 초기 한국의 중요 선교거점이었다. 1885년 4월 5일 입국한 언더우드도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한국 선교를 준비했다.

한국을 대변한 미국 외교관

알렌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참으로 깊었다. 고종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알렌과 상의했고, 알렌은 많은 자문을 해주었다. 이 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1887년 알렌은 신설되는 미국 주재 한국공관 서기로 임명받고 12명의 한국인들을 데리고 워싱턴에 가서 한국 공관을 개설했다. 미국인들의 한국 내 사업권을 획득하도록 주선한 인물도 알렌이었다. 그는 1890년 한국주재 미국공관 서기관, 1897년 미국 총영사, 그리고 1901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임명받고 외교의 최일선에서 미국과 한국의 가교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알렌이 미국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

알렌은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의 침략정책의 문제점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고 미국이 한국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하는 미국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일본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원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5년 알렌을 전격 해임하고 미국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알렌은 지속적으로 한국을 변호했다.

확실히 알렌은 이 땅에 다방면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첫 개신교 선교사로 입국해 한국에 서양의술을 소개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과 미국의 외교적 가교를 놓았다는 점에서 알렌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과 외교활동은 곧 한국 근대사였다.

알렌을 파송한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 제일장로교회 전경. 알렌의 한국 활동을 전한 1904년 3월 6일자 ‘콜로라도스프링스 텔레그래프’ 기사로 ‘한국 최초의 미국인’이란 제목과 치료 장면을 담은 삽화가 보인다. 1883년 마이애미 의대(현 신시내티 의대) 졸업앨범. 빨간 원 안의 인물이 알렌이다(위쪽부터). 의대 졸업앨범과 콜로라도스프링스 텔레그래프 기사 등은 국내엔 첫 공개됐다. 미국 신시내티 의대 고문서실, 오하이오 웨슬리안대 고문서실 제공

  

국내에 첫 공개된 알렌의 웨슬리안대학 시절 사진.

 

글·사진 박용규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20.03.04 16:10
  • 수정 2022.02.15 14:16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