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던 일꾼, 이 땅의 밀알이 되다 / 국민일보 2017. 2. 6.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십시오.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1887년 성탄절,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한국어로 처음 설교하면서 택한 성경구절이다. 그는 평생 마태복음 1장 21절 말씀을 붙들었다. 아펜젤러는 여러 면에서 한국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해 두신 인물이었다. 그처럼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이타적 사랑으로 조선을 섬긴 선교사도 드물다.

그는 한국의 존 웨슬리였다. 그가 자란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우더튼, 그가 다닌 웨스트체스터학교와 제일장로교회, 모교 랭카스터의 프랭클린마샬대학과 그의 첫 사역지 제일감리교회, 그리고 뉴저지 메디슨의 드루신학교에는 그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필자가 아펜젤러의 모교와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들 모두의 자랑이었다. 최근 드루신학교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경건한 독일개혁교회에서 성장

제1차 대각성운동이 뉴잉글랜드 전역을 휩쓸던 1720∼1740년대, 독일 이민자들은 펜실베이니아 여러 곳에 독일개혁교회를 설립했다. 100년 후인 1828년 찰스 피니가 이곳에서 설교하면서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처음 설립된 독일개혁교회는 3000명이 모이는 필라델피아 최대 교회로 성장했다.

아펜젤러의 아버지 기드온과 어머니 마리아가 출석하던 사우더튼의 독일개혁교회(Immanuel Leidy’s Church)도 이즈음 설립됐다. 담임 피셔 목사는 경건하고 덕망 있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가 숨을 거두며 한 말은 “주님의 이름이 축복을 받으소서. 그의 이름이 송축을 받으소서”였다. 아펜젤러는 부모를 따라 그 교회에 다녔다. 필자가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 입구에는 아펜젤러의 가족 사진이 진열돼 있었고, 교회 옆 묘지에는 아펜젤러 부모가 묻혀있었다. 멀지 않은 곳엔 그의 생가가 있었다.

신학을 꿈꾸던 명문대 괴테 문학도

아펜젤러의 어머니는 독일어로 자녀를 양육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 12세까지 독일어가 편했다. 메노나이트파와 개혁교회 전통에서 성장한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펜실베이니아 웨스트체스터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1812년 설립된 주 정부의 공교육 시범학교로 1871년부터 해마다 160명의 학생들을 선별해 교육시켰다.

아펜젤러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웨스트체스터 제일장로교회를 출석했다. 그러던 1876년 10월 6일, 그는 특별 집회에서 뚜렷한 회심을 체험했다. 죄에 대한 회개, 성령의 내주하심, 믿음의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이며 성경은 지금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에게 행동과 분리된 지식은 질병이자 죄였다. 그가 회심하고 나서 시작한 학교 기도모임에서 웨스트체스터 YMCA가 태동됐다.

아펜젤러는 1878년 명문 프랭클린마샬대 인문학과에 진학했다. 유명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가 오랫동안 봉직하던 곳이다. 1787년 독일개혁교회가 설립한 이 대학 인문학과는 입학 때부터 높은 수준의 고전어 실력을 요구했다. 독일 이민자들이 세운 대학이라 독일문학, 특히 괴테문학 연구가 활발했다. 아펜젤러는 역사가 깊고 전통 있는 이 대학의 괴티안 회장으로 3, 4학년 때 기념연설을 했다.

그는 대학에서 헬라어와 라틴어는 물론, 문리 역사 심리학 독어를 수강하며 인문학의 기초를 다졌다. 훗날 그가 한글 성경번역과 문서선교에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인문학적 소양 덕분이었다. 아펜젤러가 1882년 문학사(B.A.) 학위를 받고 졸업한 프랭클린마샬대에는 괴티안 회의록과 졸업사진, 졸업식 순서, 졸업생 명부를 비롯한 아펜젤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펜젤러는 1879년 4월 20일 대학 2학년 때 개혁교회에서 감리교로 적을 옮겼다. 그는 스미스 목사가 시무하는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기도모임과 성경공부에 참석하면서 그곳 영적 분위기에 매료됐다. 감리교가 개혁교회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다. 아펜젤러는 감리교에 등록하고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필자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아펜젤러 채플과 도서관, 기념부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국 선교 비전 심어준 신학교 선교대회

아펜젤러는 대학 졸업 후 드루신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그곳은 역사가 짧았지만 강력한 영적훈련소였다. 학교 카탈로그에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이 언제 회심했는지를 기록할 정도로 회심을 중시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24명의 동료 졸업생 모두 회심을 경험했다. 그가 해외선교 비전을 구체화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였다. 그는 1883년 10월 25∼29일 하트포트에서 전국 31개 신학교 350명의 학생 대표들이 모여 제4회 전국신학생 선교대회를 개최할 때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언더우드도 뉴브룬스위크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이는 한국 선교를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루터교 화란개혁교회 독일개혁교회 등 다양한 교파 신학교와 비렌즈, 뉴턴, 핫지, 타운젠드, 고든 등 당대 탁월한 지도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고든은 참석자들에게 심령에 내주하시고 충만케 하시며 이끄시고 권능을 주시는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할 것을 촉구했다. 선교대회는 아펜젤러에게 해외선교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심어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타적 사랑을 실천

아펜젤러는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축복을 받으며 한국으로 향했다.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갓 결혼한 아내 엘라 닷지와 함께 이튿날 아라빅호에 몸을 실었다. 그 배에는 스크랜턴 의사 부부와 그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턴 여사도 동승했다. 24일간의 항해를 거쳐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이들은 3월 5일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제1회 한국선교사회를 조직했다. 여기엔 개화파 거두 박영효와 성경 번역의 선구자 이수정도 참석했다.

아펜젤러는 4월 5일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언해’를 손에 들고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후 1902년 6월 11일 순교할 때까지 배재학당과 정동감리교회, 성경번역, 연합운동을 비롯해 너무도 많은 족적을 남겼다. 대학에서 쌓은 고전어와 현대어, 자연과학과 인문학 지식은 한국 선교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그는 유창하고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복음전도자요 설교자였다. 성경 언어와 독일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능숙하게 읽어낼 정도의 탁월한 어학 실력은 성경 번역에 유감없이 발휘됐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창세기 신명기를 비롯한 많은 신구약 한글성경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이뿐인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일기와 사역을 기록했으며, 학교를 설립해 서재필과 이승만 윤치호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를 양성했다. 한반도의 복음화와 민주화, 근대화는 그가 일생동안 가슴에 품었던 선교 비전이었다. 그는 이 비전을 붙들고 사명에 살았다. 죽는 순간까지 이타적 사랑을 실천한 아펜젤러는 확실히 이 땅에 심겨진 한 알의 밀알이었다.

 

아펜젤러를 한국에 파송한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가 졸업한 뉴저지 드루신학교로 아펜젤러 흉상이 건물 측면에 세워져 있다(위쪽). 아펜젤러가 다녔던 프랭클린마샬대학으로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아래쪽).

 

아펜젤러의 사역과 순교,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를 기록한 미국 신문 기사(왼쪽)와 광무 2년인 1898년 아펜젤러가 조선 정부와 주고받은 서신(오른쪽).

  

아펜젤러의 프랭클린마샬대학 졸업 사진.

  

글·사진=박용규 교수(총신대·역사신학)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20.03.04 16:24
  • 수정 2022.02.1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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