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한국교회 영성의 거장' / 국민일보, 2017. 2. 20.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고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루에 세 번 혹은 네 번을 설교하면서도 결코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선지자의 말과 같아서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다.”

영향력 있는 북장로교 선교사 스탠리 솔터가 길선주에 대해 한 말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나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그에게 ‘가장 재능 있는 설교자’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전도자’ 그리고 ‘비범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한국인으로 그만큼 서양인들에게 주목을 받은 인물도 드물다. 독보적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미 34세 때에 “능력 있는 설교자요 깊은 사고의 소유자, 뛰어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며 영적 지각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탁월한 설교자

젊은 시절 그는 한국의 여러 종교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다. 사모하거나 갈망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온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찾아 나섰다. 밀려오는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찬물을 눈에 부으면서까지 열심이었다. 그가 시력을 잃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친구 김종섭이 건네준 ‘천로역정’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내가 읽어주는 ‘천로역정’은 그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이었다. 목마르게 추구하던 영원한 진리를 기독교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같은 종교적 열정은 그대로 신앙 열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1897년 8월 15일 그레이엄 리에게서 세례를 받고 가장 먼저 가족 복음화를 실천했다. 1898년 평양판동교회 영수, 1901년 장로 그리고 1902년부터 장대현교회, 평안남도와 황해도 조사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종교적 편력과 진리에 대한 확신은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이키는 강력한 힘이었다.

길선주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었지만 대단한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다. 1907년 2월 홀(E F Hall) 선교사는 이렇게 본국에 보고했다. “길선주는 한국인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이며 실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설교를 들은 한 선교사는 또 이렇게 평했다. “아시아인이든 유럽인이든 청중들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어떤 국적의 사람을 좀체 들어보지 못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무디 피어슨 고든 심슨 등 대단한 설교자의 메시지를 듣고 한국에 입국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높이 평한 것이다. 길선주의 음성은 달콤했고 그의 예절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는 놀라운 설득력으로 심령에 호소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웃고 울다 엄청난 죄의 확신으로 전율했다.

대부흥을 위해 예비된 특별한 사람

돌이켜 볼 때 그는 한국교회 대부흥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특별한 인물이었다. 하디가 원산부흥운동의 포문을 열고 리가 평양대부흥을 견인했다면 길선주는 그 저변을 확대시킨 주역이었다. 1906년 가을 하워드 존스톤을 통해 웨일스와 인도 부흥 소식을 들은 길선주는 웨일스 부흥의 주역인 이반 로버츠처럼 조선의 부흥을 위해 쓰임 받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리와 마펫에게 전해 받은 서구 기독교의 영성이 존스톤을 통해 더욱 강력한 형태로 그의 심령에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12일부터 22일까지 그가 인도한 황해도 사경회에서 이재선 김익두 김원민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1907년 1월 14일 그가 스스로 아간이라며 내면에 숨겨둔 죄악을 솔직히 고백하자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이 회중들 가운데 임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며 고꾸라지고 울부짖고 절규했다. 내면의 온갖 죄악을 고백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온갖 죄악들이 그날 밤 토로됐다.’ 부흥의 불을 서울과 전국으로 갖고 간 사람은 길선주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회개를 동반한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놀라운 성령의 임재와 부으심을 목도한 길선주는 조지 매큔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분(성령)의 영광의 놀라운 현시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노라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우리의 소중한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와 그의 은혜의 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 모릅니다.”

이후 개인과 가족과 교회와 사회가 변하기 시작했다. 기생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고 전국적으로 민족복음화의 불길이 타올랐다. 길선주의 놀라운 영성은 말씀과 기도와 성령충만에서 나왔다. 그는 구약을 30회 이상 통독했고 창세기와 에스더는 540회 이상 읽었다. 신약은 100회 이상 통독했고 묵시록은 1만독을 했으며 요한복음은 500회 이상 읽었다.

그처럼 기도를 열심히 한 사람도 드물다. 그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시작한 새벽기도는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한국교회 영성의 뿌리가 됐다. 그는 언제나 성령 하나님을 최우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는 성령충만을 사모했고 체험했고 가르쳤다. 믿는 자는 성령의 인도, 성령의 감동,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형제자매와 화목해야 한다. 겸손해야 하며 마음의 경건과 주의 일에 힘쓰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기독교의 영성을 민족운동으로

길선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 평양지회 조직에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첫 아들을 잃었으며 1919년 3·1운동을 적극 독려했다. 그가 볼 때 3·1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었다. 온 민족이 하나 돼 “나라의 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이 확신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길선주는 이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3·1 독립운동 서명자로 투옥됐고 여기에 가담한 둘째 아들도 징역을 살았으며 딸 진주와 아들 진섭은 피신했다. 그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고 암기하고 시간 나는 대로 묵시록 강의를 재정리하고 말세학 강의를 체계화시켰다. 출옥 후에는 전국을 다니며 내일에 대한 소망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언제나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줬다.

복음을 전하다 세상을 떠난 인물

길선주는 1927년 20년간 담임하던 장대현교회를 사임하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혼신을 다해 잠든 영혼을 깨우다 1935년 11월 26일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1936년 1월 ‘종교시보’는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다 세상을 떠난 그의 부고를 이렇게 알렸다. “아! 선생은 과연 순교의 최후를 마치셨다.”

이는 마지막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숙소로 돌아와 세상을 떠난 조지 윗필드를 연상케 한다. 확실히 길선주는 서양의 어느 부흥운동 지도자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는 영성의 거장이었다. 선교사들의 영성을 한국적 상황에 아름답게 계승해 교회를 살리고 사회와 민족을 살리도록 하는 일에 그만큼 탁월하게 쓰임 받은 사람도 드물다. 한국교회가 다시 그의 영성을 회복하길 소망한다.

 새뮤얼 마펫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 그레이엄 리 선교사(왼쪽 세 번째부터) 등이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

 

 길선주 목사가 장대현교회 강단에 앉아 신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 다양한 제스처와 퍼포먼스를 활용하는 등 뛰어난 무대 연출자였다(위). / ‘ㄱ’자 모양의 장대현교회 측면 모습으로 출입문에 십자가 모양이 선명하다(아래).

 

 길선주 목사가 직접 작성한 말세도(末世圖).

 

 30대 후반의 길선주 목사.

 

글·사진=박용규 교수(총신대·역사신학)

  • 기자명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입력 2020.03.04 16:56
  • 수정 2020.12.1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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