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러브레터,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하늘을 향한 러브레터,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1932년 우리나라에 의미 있는 일이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실. 지금도 해마다 발행되는 크리스마스실은 폐결핵환자의 치료를 위한 모금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이 크리스마스실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셔우드 홀이다. 1991년 9월 19일 양화진에 묻힐 때까지 그는 일평생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의료선교사이다. 셔우드 홀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사역을 감당한 사람이 되었을까?

존 헤론의 묘 옆에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가족묘 터에는 윌리엄 제임스 홀, 로제타 셔우드 홀, 그리고 셔우드 홀의 묘비가 서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이며, 모두 의료선교사들이다. 이들의 묘비 옆에 어린 나이에 생을 달리한 셔우드 홀의 아들 프랑크 셔우드 홀과 셔우드 홀의 여동생 마가렛 홀의 무덤도 함께 있다.

홀 가의 인연은 그의 어머니 로제타의 한국선교 결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로제타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하다는 말을 듣고 선교사 지원을 한 뒤 뉴욕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엄이 로제타의 성품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에게 한 평생 함께 사역하자고 청혼을 하였다. 그러나 로제타는 윌리엄의 청혼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윌리엄은 이미 중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되어 있었기에 이 땅의 사랑도 소중하지만, 하늘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로제타는 눈물을 머금고 청혼을 거절한 것이었다.

이윽고 로제타는 선교사역을 위해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홀로 남은 윌리엄은 외로운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어 달라는 청을 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윌리엄은 1891년 한국 선교사로 올 수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리움만큼 큰 것이어서 1892년 6월 21일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곧 결혼하게 되었다. 이 결혼식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으로 역사에 남기도 했다.

그러나 셔우드 홀이 태어난 다음 해 윌리엄은 평양선교 담당자가 되고, 로제타는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기에 기러기 부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해 청일전쟁이 일어나 윌리엄이 있었던 평양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이죽어가고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그 곳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다 병에 감염되었고, 서울로 후송되었으나 후송하던 배에서 더 큰 병을 얻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게 되었다.

한국에 온지 불과 2년만의 일이었다. 그 후 로제타의 뱃속에 있던 윌리엄의 딸 에디스가 태어났고, 로제타는 윌리엄의 교회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엄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에게 주님의 음성은 마치 남편의 간절한 바람을 듣는 듯 했다. 이 후 로제타는 한국에 돌아와 그의 아들 셔우드 홀과 더불어 일평생 한국을 위해 헌신하는 의료선교사가 되었고, 맹인점자교육의 창시자이자 기흘병원의 설립자가 되었다.

땅의 사랑이 하늘의 사랑으로 이어지기가 쉬운 일인가? 주님은 로제타를 통해 윌리엄의 소망을 잇게 하시고, 셔우드를 통해 풍성케 하신 것이다. 이루지 못한 조선의 사랑을 끝내 이루게 하신 주님의 사랑은 오늘 홀 가의 묘비 앞에 서 있는 나를 겸허하게 한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10.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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