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의 소원

헐버트의 소원

홀 가의 묘를 뒤로 하고 유니온교회 쪽으로 걷다보면, 의미 있는 묘비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헐버트의 묘비이다. 그의 비석에는 가운데 ‘헐버트의 묘’라고 다소 낯익은 글체가 써 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라고 한다. 원래 이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쓰기로 했으나 4.19혁명으로 인하여 하야하는 바람에 비문을 쓰지 못했고, 오랫동안 비어 있다가 1999년에 와서야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그 빛을 보게 되었다.

헐버트는 선교사로 이 땅에 들어왔지만 고종의 밀사로서 밀서를 가지고 워싱턴까지 나와 국무장관을 만나는 등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한국평론지에 일본의 야만을 폭로하기도 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보내도록 고종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구보다도 조선을 사랑하였고, 이 땅의 민족과 함께 울고 웃는 우리네 친구였다.

그의 묘비에 적혀있는 유언을 통해 헐버트가 얼마나 한국 민족을 사랑했는지 엿볼 수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목회자라면 누구나 영광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러나 헐버트에게 한국은 그 어느 곳과도 비교되지 않는 소중한 자리였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천 개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 루비 레이첼 켄드릭

헐버트의 묘비 옆으로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젊고 아름다운 영혼이 잠들어 있는 이곳은 루비 레이첼 켄드릭의 무덤이다. 그녀는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22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자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교부에서는 어리다는 이유로 2년간 더 훈련을 받도록 권고하였다.

이윽고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한국선교의 때를 맞이하게 되었다. 선교부에서는 우선 그녀를 개성에 파송하여 선교를 준비토록 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절실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급성맹장염이라는 질병은 한국에 도착한 지 8개월 만에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그녀에게 한국선교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런 일이었다고 한다. 켄드릭은 고향 친구들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온통 한국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런 마음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고향 교회친구들은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양화진에 묘비를 세우고, 그 가운데 그녀의 편지 한 구절을 적어 놓았다.

“만일 내가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조선백성에게 그것 모두를 줄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10.2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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