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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907년 대부흥 현장 평양을 가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 장대현교회
2007년 01월 27일 (토) 18:31:34 박용규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31) 1907년 대부흥 현장 평양을 가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은 선교가 시작된 후 반세기 동안 한국 교회 영적 각성의 진원지였다. 평양은 토머스 순교 이후 이 나라에 입국한 모펫과 블레어,베어드,리,스왈른,번하이젤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울부짖으셨던 것처럼 그들은 평양을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고 말했던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대로 유독 순교의 피가 많이 흘렀던 평양에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놀랍게 꽃피었고 강력한 부흥이 임했다. 특히 1903년부터 원산에서부터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부흥의 불길은 1907년 1월 14∼15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 받는 평양 대부흥 운동이 발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약 100년 전,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평남 전역에서 몰려든 100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은 장대현교회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장대현교회 사창골교회 남문외교회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평양 시내 4개 장로교 교인들은 1월6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연합으로 저녁집회를 가지며 사경회 참석자들과 함께 부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매일 저녁 집회마다 은혜의 역사가 점증하더니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 회개와 더불어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조지 매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그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존경하는 브라운 박사님,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체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그후 장대현교회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부흥의 진원지가 되었고 한달 후인 1907년 2월 한국에서 가장 큰 감리교 평양 남산현교회에서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곧 부흥의 불길은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를 넘어 평양 전역으로,다시 한반도 곳곳으로,급기야는 국경을 넘어 만주와 중국 전역으로 놀랍게 번져 나갔다.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으로 불리던 평양은 대부흥을 경험한 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대부흥 이후 교파와 교단,지역을 초월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으며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됐다.

뿐만 아니라 대부흥은 교육열,금연·금주,우상숭배 퇴치,여권신장,기독교학교 설립 촉진,윤리의식 증진,세계관 정립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평양 대부흥 때문이었다. 길선주 목사의 말대로 대부흥이 없었다면 한국 교회는 쭉정이 교회로 전락했을 것이다.

평양 대부흥 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나는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도하며 염원해왔던 평양 방문 기회가 주어져 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솔직히 내 마음 한곳에는 부흥의 현장을 찾아간다는 기대감과 그곳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낯선 곳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심적 부담이 교차되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는 순간 비행기에서 바라본 평양 순안공항은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하고 작았다. 각국에서 날아든 비행기들로 가득찼던 불과 몇 시간 전의 베이징공항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시골적인 분위기가 연상되는 순안공항의 정경이 꼭 싫게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모란봉에 올라가 그곳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국 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통역관 자격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던 27세의 토머스 선교사가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양각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모란봉은 100년 전 그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남겨놓은 사진 모습 그대로였다. 산천은 의구했지만 평양 시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새롭게 건설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변함없이 세월의 상처를 이겨낸 평양 시내의 지형을 통해 옛 평양성의 모습과 위치를 분별해낼 수 있을 뿐이다.

3일 동안의 짧은 체류 기간이지만 사상의 벽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암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조용히 희망의 씨를 뿌리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건축 현장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의 세월이 바벨론의 포로생활 70년보다 길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나 혼자만의 기도는 아닐 것이다.

순안공항에서 3일 동안 우리를 안내했던 중년의 안내원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다시 회복되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오,주님! 부흥과 통일의 그날을 속히 주옵소서.

(총신대 신대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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