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님, 한국교회가 살게 되었습니다"

왕십리교회 오치용목사
2007년 총회평양대부흥기념예배 및 국민출애굽운동선포식(2007.1.19 승동교회당)소감문/ 오치용 목사

   

          “오 주님,한국교회가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씨를 뿌리게 하시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신다 하신 말씀은 진리이다.  2007년 새해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시고 계시다. 주께서 흘리게 하신 눈물에 주님의 감격으로 채우신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07년1월 대부흥맞이 새벽기도회, 1월14일 전국 노회들의 기념예배

지난 2007년1월19일은 한국교회와 민족의 역사에 남을 일이 이루어졌다. 1907년1월에 크게 폭발한 이른바 ‘평양대부흥’의 역사가 다시 재현되는 2007년의 큰 증거를 남긴 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날만은 아니다. 이미 1월 들어서 2일부터 19일까지 이른바 1907년의 평양대부흥의 역사가 시작되는 평안남도 남자사경회의 시작과 여자 사경회의 마침의 날까지를 기념하는 대부흥맞이 새벽기도운동이 총회적으로 시작되었고 다른 교단도 그 비슷한 기간에 대부흥을 기념하며 꿈꾸며 그리고 먼저 우리 자신, 한국교회의 부족했던 점을 회개하는 새벽기도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월14일 주일에는 교단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인 대부흥기념 동시예배가 드려졌고 오후에는 거의 전국의 모든 노회들이 정해진 교회들에 모여서 오후 내지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회개하며 부르짖으며 간구하면서 교회와 나라를 위해 열방을 위해 기도했다.  그 날에 모이지 못한 노회들이 연속적으로 모이며 한 노회도 참석치 않는 일이 없는 큰 역사가 일어났다.  곳곳에서 드려지는 연합예배는 결코 형식적이 아니었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그저 프로그램으로 마쳤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진지함과 열정이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정말 놀라운 그런 진지함이 전국을 덮었다. 만일 이 광경을 전국을 네트워크하여 한 눈에 보는 그런 시스템을 갖추었다면 세상이 놀랄 그런 대역사라고 할 수 있다.  평양대부흥을 기념하는 그리고 그 재현을 꿈꾸어오며 기도한 일, 그리고 그 실천이 결코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남기는 역사적인 일이요 은혜였다.  지금도 그 날에 있었던 은혜를 곳곳에서 간증하는 것을 듣게된다

2007년1월19일 평양대부흥기념예배 및 국민출애굽운동 네트워크 선포식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더 깊은 감동을 남긴 일은 바로 1월19일 승동교회당에서 있었던 총회의 평양대부흥기념예배와 국민출애굽운동 선포식이었다.  사실 이 운동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가장 큰 부담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이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이 우려를 보여 주었다.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행사위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획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회성 이벤트성 이런 것으로 되지 않아야한다, 는 등의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나타났고 사실 그 모든 이야기는 분명히 크게 일리있는 지적이었다.  정말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그 때 마다 다짐하곤 했었다.  1989년 영국에 유학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선교사님들의 기록이었다. 에딘버러 대학 뉴컬리지에 속한 비서구기독교연구센터(Centre for the Study of the Non-Western World, CSCNWW)에서 연구하고 있던 어느날 나는 그곳 도서관에 소장된 Korea Mission Fields 전집들을 읽기 시작했었다.  초대 한국교회를 일으킨 서구의 선교사님들이 발간하던 선교저널이다.  어느 순간부터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에 대한 선교사님들의 감격적인 기록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참으며 나는 깊이 그리고 한없이 울었다.  책장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닦아내며 울었다.  한국교회가 드디어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선교사님들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그 내용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이 되어지는 것을 넘어서 감격과 감동이 솟으면서 울었다.  아, 우리 한국교회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리고 한국교회를 사랑한 선교사님들. 한국교회를 일으키는 초대한국교회의 성도님들, 그리고 지도자들. 그 모든 회개와 그 모든 간구와 그 모든 눈물이 나를 울게 했다.  참으로 많이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귀국하면 반드시 이 평양대부흥의 역사가 재현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그 후 지금까지 그 감동과 결심을 잊지 못하면서 기도해 왔다. 주님 정말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1993년 왕십리교회의 담임을 맡으면서 왕십리교회의 100주년인 2008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살피다가 1905년에 왕십리교회는 이미 성도들의 모임이 시작된 기록을 읽게 되었다.  1907년에는 교회가 예배당을 건립한 기록이 남아있다. 1908년 2월에 정식으로 왕십리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이미 1905년에서 1907년에 왕십리교회는 태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1907년 왕십리교회가 예배당을 이미 지은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서 서울에 그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관심이 깊어지고 왕십리교회 성도들이 어떤 형태로든 그 은혜에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교회 100주년 준비는 곧 평양대부흥 100주년 준비와 깊이 그 맥을 같이하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공식적으로는 1908년이 교회 100주년이니 1907년의 교계의 평양대부흥100주년 기념운동에 총회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수도노회와 총회의 어른이신서기행 목사님을 찾아뵈었고 적극적인 격려를 받으면서 2002년8월25일, 왕십리교회 정기당회에서 평양대부흥100주년 기념대회 및 관련준비에 대한 건의를 총회에 올리도록 노회에 헌의를 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총회에서 임원회로 넘기고 특별한 움직임이 없어서 기다리고 다시 다음 해, 2003년에 수도노회에서 총회에 재 건의를 하게 되었고 부총회장으로 출마하신서기행 목사님이 비전의 첫번째로 평양대부흥운동을 제시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장이 되신 해에 평양대부흥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서 나는 총무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한편 총회세계선교회에도 제안하여서 2007년에 총회가 기념대회를 할 때 세계선교대회를 같이 갖는 것으로 임원회가 결의하여 먼저 선교지역별 대회가 그 준비가 되기로 하였고 2005년부터 총회도 본격적으로 2007년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2006년에 들어와서 3월에 들어서 새로남교회에서의 비전선포식, 그리고 왕십리교회에서의 1차 학술세미나 및 부흥사경회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순회하며 6차에 걸친 학술세미나와 부흥사경회를 겸해서 하기 시작해서 분위기를 일으켰고 민족복음화 세계선교의 마스터플랜작업에 들어갔다.  3월24일에 전국비전대회를 장충체육관을 가득히 매운 가운데 개최하면서 경건, 부흥, 선교- 성령으로!, 라는 대부흥운동의 맥을 확실히 짚어나가는 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평양대부흥100주년 행사는 준비단계였고 막상 2007년이 되었을 때 정말 의미있는 대부흥의 해가 될까, 라는 걱정은 계속되었다.  그런가운데 평양대부흥운동이 일회적, 일과성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는 인식을 깊이하면서 2007년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에 형성되는 기독교민심을 국민운동으로 승화하는 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류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구원운동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담은 실천적 구원운동으로서의 엑소더스 출애굽운동을 민족적으로 세계적으로 추진할 필요성을 가지고 회개, 경건, 화평, 복음, 생명사랑의 5대실천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국민출애굽운동(Korea National Exodus Movement, KNEM)을 기획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 교계와 사회의 제반 영역에 그늘진 부분 속에 무신론사상과 이단사이비사상이 침투하여서 자리잡는 것을 막아야할 필요도 동시에 느끼면서 교계와 사회 속에 이 운동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민족을 이끌어 나가는 추진력이 되게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논의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국민출애굽운동 네트워크, 라는 개념이 자리잡았고 그 네트워크 형성을 하면서 동시에 그 네트워크가 아주 실천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 5대 실천운동을 하나로 묶는 개념을 생각하던 중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사랑, 이라는 점에 착안하면서 ‘사랑마을’이라는 개념의 마을을 세우자는 비전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는 대외구호를 많이 하지만 그러나 집약되는 힘이 부족했다.  구세군의 ‘자선남비’같은 효과를 교계적으로 창출하지 못했다.  따라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교파분열, 개교회주의, 교인들의 이기적인 이미지의 굴레를 제대로 벗지 못하면서 전도의 문이 막혀가고 교계는 성장정체 내지 감소라는 위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교회 내적인 운동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만남, 그것도 전국적으로 모든 지역에서 언제든지 설립이 가능한 개념의 마을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웃과 지역과 교회가 만나는 만남의 마을을 ‘사랑마을’이라고 하여 그 안에 구제와 인재양성, 각양한 민족사랑의 열정을 담는 일을 하자는 국민운동개념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교회들이 서로 기도하고 교단들이 서로 기도해주는 기도네트워크도 준비하게 되었다.  장.감.성. 연합이라는 꿈을 갖고 2006년9월 총회가 1월에 대부흥기념집회를 허락하였으나 교계사정 및 장소사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월19일 오후2시 115년의 역사를 가진 승동교회가 흔쾌히 장소를 제공하고 봉사하겠다고 함으로써 정말 역사적인 평양대부흥 기념예배 및 국민출애굽운동네트워크 선포식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오 주님, 한국교회가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1월19일 당일날 기념대회를 섬기는 대부흥운동 기획총무의 책임 때문에 좀 일찍 승동교회당에 도착하게 되었다.  새벽에도 기도하면서 주님 정말 오늘 모든 집회가 그냥 한 행사로 끝나지 않게 하옵소서, 그저 하나의 이벤트로 그치지 않게 하옵소서, 정말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었다. 오면서도 기도했었다.  총회산하 전국교회 지도자들, 총대들, 노회장, 상비부장, 기타 총회의 지도적인 분들, 그리고 통합측 장로교 총회장 및 임원들을 비롯한 교계의 지도자들이 함께 초청되어 오신 모든 분들에게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승동교회당 입구에 들어서면서 나는 깊은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곳곳에 프랭카드와 현수막이 있고 기념예배와 국민출애굽운동네트워크 선포식을 알리는 내용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곳곳에서 모여드는 총대 목사님 장로님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면서 본당이 어느덧 가득하게 되었고 CBS-TV,CTS-TV를 비롯한 방송, 언론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더군다나 통합측 총회장님과 우리 총회장님의 역사적 회동으로 인해 큰 관심이 모아지는 때라서 통합측 이광선총회장님 일행의 참석으로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집회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마음에 긴장을 하고 있었다.  승동교회 본당 앞 양쪽 현수막은 대부흥기념 및 국민출애굽운동선포식을 알리고 있었고 총회장님이 설교하시는 제목은 제2부흥과 한반도구원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갖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순서가 진행되면서 나는 정말 그저 하나의 행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정말 그 때 같은 은혜가 재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총회장 장차남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역사에 남을 명설교라는 생각이 들어왔다.  이어서 있었던 통회의 시간에 나는 강단 오른쪽 내빈석 및 순서자들의 좌석 뒷줄에 앉아있었다.  지도자들의 회개하는 그 기도소리,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합니다, 라는 그 소리가 형식과 거짓없는 진실로 들려지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눈물이 계속 한없이 쏟아지는데 혹시 카메라가 나를 잡을까, 하는 염려에 앞 사람의 어깨 뒤로 고개를 숙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가 나중에는 그냥 얼굴에 손수건을 대고 울었다.  울고 또 울고 한없이 눈물이 솟는데 울다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우는가.  왜 이렇게 울지…, 라는 물음을 하다가 내 속에서 해답이 들려왔다.  오 주님, 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가 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냥 그것이었다.  무슨 다른 이유와 설명이 필요없었다. 아, 이렇게 통회하고 이렇게 서로 하나되는구나, 이렇게 하면 산다, 이제 한국교회가 살게 되었구나.  나는 울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회개의 대표기도자들의 순서가 끝나면 곧 이어 내가 단상에 올라가서 ‘국민출애굽네트워크 선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두 페이지에 걸친 선언문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회개와 나아갈 방향, 특히 우리가 회개함을 선언해야하는데 울면 외식적으로 보일 것 같아서 염려가 되었다. 한국에 와서박용규 교수님의 평양대부흥운동 1,2권을 읽으면서 확신한 것은 정말 성령이 하셔야한다는 것이다.  절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명저라고 할 수 있는 평양대부흥운동, 그 책들을 읽으면서 곳곳에 견출지를 붙이다 보니 너무도 많이 붙였던 기억이 난다. 페이지 페이지 마다 다 중요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평양대부흥의 진정한 재현을 위한 우리의 결단을 선포하고 국민운동차원으로 승화하는 선언을 할 때 정말 인간의 어떤 것이 가리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울면서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순서가 되어서 강단에 올라갔고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눈으로 그 선언문을 읽어내려가게 된 것이다.  대부흥의 꿈과 비전을 담으면서 여러 동역자들의 조력을 받아서 완성된 그 선언문은 읽어내려가면서 선포하면서 마음을 다시 감동시켰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 주님 한국교회가 살게 되었습니다.  강단에서 모인 회중 여러 지도자 목사님들 장로님들 성도님들이 가득히 모인 모습을 볼 때 그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 함께 일어나서 마지막 선포의 문구를 함께 합창할 때 그 합창은 이제 한국교회가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하나님의 새로운 허락이 메아리치는 찬양같이 들려졌다. 자리로 돌아와서 감격속에 앉았을 때 기도가 나왔다. 주님 정말 겸손하게 하옵소서. 정말 겸손 또 겸손하게 하옵소서

 그 다음에 있었던 격려사들은 또하나의 연이은 감동을 주었다.  특히 통합측 총회장 이광선목사님의 그 겸손한 발언은 모두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합동측을 장자교단, 맏형으로 모신다는 말에 한편으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통합측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말이기 때문이다.  박수소리가 나면서 마음이 하나되는 합류의 물소리를 듣게 되었다. 집회를 마치고 나서 본당에 그대로 선채 이층에서 내려다보며 찍는 사진촬영도 역사적인 순간을 놓지지 않으려는듯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후레쉬같이 곳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외식과 거짓, 위선과 오만이 자리 잡을 수 없는 그런 은혜로 마가다락방 같은 은혜 속에서 2007년1월19일 집회는 마치게 되었다

 제주선언으로 이어지는 화합

 스코트랜드에서는 Korea Mission Fields 그 글들이, 그리고 한국에서는박용규 교수의 평양대부흥운동에 담긴 그 글들, 그리고 학술세미나 때에 여러 교수님들이 밝히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메시지들이 감동을 주는 가운데 나는 2007년7월8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있을 예정인 대부흥기념대성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월26일, 27일 제주도 제주컨벤션센타에서 있었던 24개 주요교단 교단장협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결의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교단장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그리고 KNCC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평양대부흥기념 대회를 전체 한국교회가 남한에서 한번 갖는 것으로 하자는 결의가 있게 되었다.  모든 교단들이 다 자기들의 계획하던 독자의 계획을 멈추고 다같이 한 대회를 갖자고 하는데 모두가 동의하는 모습 속에서 한국교회의 화합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통합측 교단이 합동측에서 7월8일 개최예정인 상암대회로 함께 하기로 한 것도 역사적인 일인데 이제 한국교회가 한 대회를 한다고 할 때 우리 교단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한국교회가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백지로 삼고 그 위에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그림을 그리시옵소서.  만일 한국교회가 다른 날짜에 다른 방식으로 하자고 의견이 모이면 어떻게 할까, 라는 걱정도 하면서 그러나 마음에 결심을 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님 정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교회가 하나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 한반도에 구원을 주옵소서. 면면촌촌까지 사랑마을이 열리고 민족의 출애굽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오 주여 화합을 주옵소서.   1월19일 오후, 통회의 시간에 흘리던 그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주님은 반드시 그 분의 일을 이루실 줄 믿고 기도한다.  주여 7월8일 상암동에서 영적인 지진이 일어나는 제2의 여의도 집회 같은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한국교회가 대 화합하는 집회, 선교에 헌신하는 집회, 온가족이 함께 하는 집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사오니 주님의 뜻대로 하옵시고 교단들이 서로 진정한 감동 속에서 화합하는 쪽으로 한국교회의 하나되는 대성회가 열리게 하옵소서. 크고 작은 물결들이 합류하고 크고 작은 물결들이 퍼지면서 한반도와 온 세계를 적시는 생명의 강으로 넘치게 하옵소서, 그 속에 우리의 회개와 감동의 눈물이 함께 하게 하옵소서.  이제 영원히 2007년1월19일을 기억하면서 그 전, 그 후의 모든 은혜들을 감사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한국교회가 민족과 열방을 품고 나가는 그 위대한 모습을 먼저 엎드려 무릎꿇고 바라보면서…. 

 

 

 

 

 

 

 

 

 

 

 

 

 

 

 

 

 

 

     

 

 

 

  • 기자명 간사
  • 입력 2007.02.0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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