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4) 스코틀랜드 던디

기사입력 2006.07.19. 오후 3:21

비록 강도에 있어서는 19세기 아일랜드나 웨일스 부흥에 비견할 수 없지만 1839년 스코틀랜드에서도 부흥했다. 1859년 아일랜드와 웨일스 부흥이 미국의 기도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진행되었다면 스코틀랜드 부흥은 독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부흥의 시기도 1859년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와 웨일스의 부흥보다 20년이나 앞선 1839년이었다. 

스코틀랜드 부흥은 성공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성령의 부으심이 동반된 전형적인 부흥이었다. 킬싯과 던디,퍼드에 집중된 이 부흥의 주역은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과 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였다. 

우리는 맥체인의 부흥의 발자취를 찾아 던디로 향했다. 그가 사역했던 던디의 성 베드로 교회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시신은 교회 옆에 묻혀 있었다. 교회 안에 들어서자 그가 사역했던 당시의 강대상과 의자 일부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성 베드로 자유교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데이비드 로버트슨 목사가 사역하고 있었다. 로버트슨 목사는 우리 일행에게 성 베드로 교회가 스케치된 우편엽서를 건넸다. 그 엽서 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던디 세인트스트리트에 소재한 성 베드로 교회는 1836년 건립되었다. 제1대 목회자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스코틀랜드가 지금까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설교자와 유능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이며 29세 때인 1843년 세상을 떴다.”

1836년 23세의 나이에 성 베드로 교회에 부임한 맥체인은 신?구약성경을 균형 있게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면서 논쟁적이기보다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성격의 메시지에 집중했다. 곧 맥체인의 리더십 아래 성 베드로 교회는 역동적인 교회로 바뀌었다. 그는 주일예배 외에 성경공부 시간을 가졌고 화요일 저녁에 청소년들에게 신앙교육을 실시했으며 목요일에는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열었다. 

던디에 놀라운 부흥이 임했던 1839년 2월에 이르러 맥체인의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인근 4000명의 주민 가운데 3000명이 교회에 출석했고 그 중 반이 성 베드로 교회 교인이었다. 매주일 1200명이 교회에 출석했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대단한 수였다. 

이 놀라운 부흥의 비결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경건 생활에 있었다. 그는 매일 정기적으로 성경 말씀을 묵상했고 매일 6시30분에 일어나 2시간을 개인기도와 묵상으로 보냈으며 아침 8시30분부터 10시까지 가족과 아침기도회를 가졌다. 어느 날 그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얼굴을 아직 목도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내 사역을 시작할 수 없다.” 마치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 그는 매년 그가 처음 부임했던 11월에는 이사야 61장 1∼3절 말씀,‘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를 가지고 설교했다. 

맥체인의 능력 있는 목회 사역은 스코틀랜드 부흥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1839년 맥체인은 이스라엘 성지 여행을 떠나면서 번스에게 그동안 강단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선교사역을 준비하던 번스에게 멕체인의 요청은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였다. 1815년 출생,17세 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번스는 1834년 애버딘 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1839년 3월 강도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그 다음 달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다. 그의 첫 설교는 첫 설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우 힘이 있었고 능력으로 충만했다. 

번스는 1839년 7월16일 아버지의 성찬식 집례를 돕기 위해 킬싯에 갔다가 월요일에 시편 110편 3절을 가지고 설교했다. 이때 회중이 눈물을 흘리고 통회하며 죽은 사람들처럼 바닥에 쓰러지는 역사가 나타났다. 번스는 성령의 강권하심 속에 3주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집회를 계속 이끌었고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하셨다.

8월8일 수요일 던디로 돌아온 번스는 킬싯에서의 부흥이 던디에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 킬싯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킬싯에서의 부흥 소식은 이미 던디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번스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예배가 끝난 후 킬싯에서 일어난 일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남으라고 말했다. 약 100명이 남았다. 

“갑자기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듯 모든 사람이 통회하기 시작했다. 다음 저녁 교회에 기도회가 있었다…많은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몇몇 사람은 절규하고 울부짖으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면서 바닥에 엎드러졌다.” 

이 같은 역사는 그 후 수주간 매일 저녁 번스가 인도하는 기도회에서 계속되었다. 성지 여행에서 맥체인이 돌아왔을 때 영적 각성은 더욱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부흥 현상은 인근 성 데이비드 교회와 힐타운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이 같은 집단적인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맥체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애버딘 노회에 부흥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39년 8월까지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거나 일반적인 움직임은 없었으나 킬싯에서 주의 사역이 시작된 후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들 가운데 놀랍게 임했다…1839년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다. 우리는 가버나움에서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그 이상으로 성령의 충만한 부으심을 경험했다. 나는 스코틀랜드가 경험했던 이 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어느 나라가 부흥을 경험했는지 알 수 없다.”

지역 교회 성도들이 연합으로 참여하는 거대한 성찬식이 거행되었고 그곳에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했다. 이 부흥은 스코틀랜드 에반젤리컬 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감리교와 독립교회도 동참했다. 1839년 시작된 이 부흥은 맥체인이 세상을 떠나던 184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중심에 성 베드로 교회가 있었다. 성 베드로 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영향은 던디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 이후 던디는 종교개혁자 존 칼뱅이 제네바를 거룩한 도성으로 바꾼 것에 비견하여 북부의 제네바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후 맥체인과 번스는 1839년 스코틀랜드 부흥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1세기 반이 훨씬 지난 지금 스코틀랜드 던디에서는 옛날의 영광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하나의 희망을 보았다. 40대 초반의 젊은 스코틀랜드 목회자 로버트슨이 그 영광을 재연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1992년 부임 당시 7명이었던 교회가 현재는 1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한국 교회 실정에 비추어보면 매우 미약하지만 스코틀랜드 상황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이 메마른 스코틀랜드에 1839년 맥체인의 영광을 재연하는 부흥의 불씨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 기자명 박용규
  • 입력 2007.03.03 23:01
  • 수정 2021.03.2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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