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제들이 부흥회를 전적으로 책임맡아 인도

영변에 타오르기 시작한 부흥의 불길(1907년 3월)

 

북한 핵 발전소로 널리 알려진 영변에 100년전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순식간에 영변에까지 확산되었다. 영변은 평양에서 멀지 않은 지역인데 선교 사역을 평양과 늘 연계하여 진행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영향을 더 민감하게 받을 수 있었다. 1906년 11월, 평양의 방위량이 그의 조사들을 동반하고 영변에 내려와 열었던 사경회를 통해, 12월에 평양에서 열린 감리교 신학교 수업과 그 해 겨울에 평양에서 열린 연합 사경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여러 명의 영변교회 성도들을 통해 성숙한 은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영변은 평양대부흥운동을 어렵지 않게 공유할 수 있었다. 영변 지역에 있는 미국 광산에 종사하는 광부들에게까지도 부흥운동이 널리 확산되었다. 다른 모든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영변의 경우 모리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 대부흥운동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국 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곳에서, 한국 형제들이 부흥회를 전적으로 책임맡아 인도했을 때 가장 커다란 결실들이 맺혔던 것처럼 보인다.” 부흥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한 몫을 하였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 말씀사, 2007)

  • 기자명 박용규
  • 입력 2007.03.2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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