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츨라프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지 34년 후인 1866년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崔蘭軒) 선교사였다. 귀츨라프가 로드 암허스트 상선을 타고 입국했던 것처럼, 토마스 역시 미국상선 제너럴셔먼(the General Sherman)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1년 전에도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하여 한국선교를 모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번 입국이 한국과의 첫 인연은 아니었다. 토마스의 조선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이번이 입국을 타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앞서 진행된 귀츨라프의 단회적인 선교타진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토마스의 중국 입국과 한국선교 준비

토마스 선교사 기념 교회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Rhyader, Radnoshire)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B.A.)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4년 후 목사안수를 받은 후 중국에 왔다. 1863년 6월 4일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토마스는 윌리엄 캐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한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그 해 7월 21일 폴메이스(Polmaise) 호를 타고 중국을 향했다.


토마스가 아내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것은 한창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863년 12월이었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이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와의 사별이라고 말한 한 현대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은 토마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써 내려갈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그가 아내의 사별로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대변해 주기에 충분하다.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그에게 아내의 죽음은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는 그곳 기후가 자기의 아내한테 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한구(漢口)의 기후가 어떤지 살펴보러 갔다가 아내의 비보를 들은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 이국 만리타향에서 비보를 접한 23세 젊은이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가지고 이국 만리를 달려 왔던 젊은이의 가슴은 견딜 수 없어 터질 것만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중국에 와있던 현지의 런던 선교회 총무 무어헤드(Wm. Muirhead)와도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기자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에 가서 청국의 해상세관에서 통역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로 온 토마스를 방관하실 수는 없었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엄슨이었다.

 

1865년 가을, 한국에서 온 목선 한 쌍이 지푸에 나타났는데 그 안에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까지 온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슨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성경지식이 아주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인 형편과 국내 실정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추진할 것을 다짐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1865년 9월 4일 조선으로 향하는 배가 있어서 토마스는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의 소속 선교사로 서해안으로 떠났다.


1865년 9월 13일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1865년] 9월 4일 중국의 목선을 타고 지푸를 떠나 13일에 한국의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 해안에서 우리는 2개월 반 동안 보냈습니다. 나는 여기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인에게 전하기에 넉넉한 그 지방 언어를 한국인 천주교인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토마스가 다시 북경에 돌아온 후, 1866년 1월 12일자 자기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곳 한인들은 목이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토마스가 주는 성경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조선이 천주교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당국으로부터 선교의 윤허를 받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당시에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만주 해안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오랜 표류 끝에 이듬해 1월 초에 우장(牛莊)과 산해관(山海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간신히 돌아갔다.


잠시 북경대학 학장 서리로 일하며 한국선교를 물색하던 토마스는 1866년 1월 한국에서 동지사(冬至使) 일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그들이 묵고 있는 예부회동관(禮部會同館)까지 찾아가 한국 사절단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전에 따르면 토마스와 개화파의 거장 박규수(朴珪壽)와의 만남이 이때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다:


맛참 드르매 朝鮮셔 朴珪壽라 하는 이가 冬至使로 들어와서 北京에 寓居한다고 하였다. 이 消息을 들은 도마스 牧使는 急遽히 그를 차져갓다. 가셔 朴珪壽氏를 會見한 後 聖經 一券을 드리면셔 “貴國도 이 冊을 밧아 그대로 實行하면 만흔 福을 밧으리라” 하였다. 여러 가지로 얼마 동안 談話를 交換한 後 마즈막에 付託하는 말이 “내가 다시 朝鮮으로 갈 터이니 萬一 가면 當身은 좀 잘 指導하야 주시오” 하였다. 朴珪壽氏도 所然히 그러케 하기를 許諾한 後 그 밧은 바 聖經을 가지고 朝鮮으로 도라와셔 그것을 金玉均氏의게 주엇고 金玉均씨는 다시 金弘集 氏의게 주엇다 한다.


박규수를 비롯한 동지사 일행과의 만남은 너무도 짧고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토마스는 한국선교에 대한 전의를 새롭게 다질 수 있었다. 더구나 평양감사 박규수와의 만남은 토마스의 평양행을 더욱 사모하게 만들어 주었다. 1866년 4월 4일자 편지에서 토마스는 북경에 온 동지사 일행 중 한 사람이 토마스 목사의 포켓에 한문으로 된 쪽지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거기에는“어느 외국인이 서해안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마태복음 책 하나를 구득(購得)해 달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여기 어느 외국인은 토마스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렇다면 토마스는 서해안에서 불과 얼마 전에 전했던 자신의 선교사역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 된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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