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중 한 척이 강화해협에서 좌초당하는 바람에 형세만 살피고 다시 지푸로 회항하고 말았다. 로즈 제독은 1개월 후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보복을 강행했으나 강화읍을 점령하고 무기와 고서를 약탈하고 20-30명의 사상자를 낸 후 퇴각했다. 병인양요(丙寅洋優)의 사건을 만난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의 침략과 격퇴 사실을 청과 일본에 알리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가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셔먼호 사건이 난 바로 그 해 8월,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Earnest Oppert)가 탄 기선 엠페로(Emperor)가 한강을 거슬러와 비밀리에 라틴어로 편지를 보낸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고 강화의 행정관과도 연락을 하는 등 활발하게 국내 정황을 탐색하고 있었다. 오페르트에 의한 분묘 도굴사건은 서양인 그리피스마저도 그의 저서 조선: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에서 “시체도굴사건”(a body-snatching expedition)이라고 비난할 만큼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서양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가중시켜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의 결의를 다시 한 번 굳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은 “양이(洋夷)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즉 화(和)하는 것이요, 화(和)를 주장하여 나라를 파는 일은 자손만대까지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의 글을 새긴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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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06.06.2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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