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대원군의 하야, 강화도조약, 동도서기파와 개화파를 통한 서양문물과 기독교 수용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동안 주변국에서는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준비 작업은 주로 19세기 부흥운동이 강하게 일어난 영국과 미국, 캐나다, 호주를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 각 교파의 해외 선교회와 무디 부흥운동, 케직 사경회, 성결운동으로 대별되는 부흥운동, 그리고 학생자원운동이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수차례의 영적각성운동을 통해 미국 개신교를 놀랍게 신장시키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장감에 해외 선교열을 불러일으키심으로, 그리고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파송하심으로 오랫동안 그러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한국선교를 준비하여 오셨다.  

19세기 근대 선교를 주도한 나라는 영국과 미국이었다. 영국은 일찍이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8-1788), 그리고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를 중심으로 발흥한 복음주의 부흥운동 이후 해외 선교열이 고조되면서 여러 선교 단체들이 결성되어 해외선교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1792년 침례교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1795년에는 런던 선교회가, 1799년에는 국교회 안에 교회 선교회가, 그리고 1818년에는 감리교 선교회가 결성되었다. 1804년에 조직된 대영 성서공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는 국내외적으로 요구되는 엄청난 성경을 출판,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이들 선교회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를 필두로 리빙스톤 데이빗(Livingston David, 1813-1873), 로버트 마팻(Robert Moffat), 존 매켄지(John McKenzie), 존 필립 데이빗(John Philip David), 그리고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을 비롯한 걸출한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선교를 위해 크게 공헌한 로버트 토마스, 존 로스, 존 맥킨타이어 모두 19세기 영국이 배출한 걸출한 해외 선교사들이었다. 이와 같은 영국의 선교열은 미국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령(英國領)이었던 호주와 캐나다 교회에 해외 선교열을 강하게 불어넣었다.

  

한국에 가장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한 미국 장로교는 한국선교가 착수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신학, 교세, 해외 선교열에 있어서 미국 전 개신교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이었다. 1706년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mie, 1658-1708)의 주도로 최초의 필라델피아 노회가 결성되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716년 대회가 조직되면서 장로교회는 미국에서 주류 교단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740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를 중심으로 제 1차 대각성운동이 뉴잉글랜드에서 발흥하여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장로교회는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교세가 눈에 띄게 신장했고, 그 결과 교단의 틀을 다질 수 있었다.


부흥운동을 두고 장로교 안에 벌어진 교단적인 갈등으로 1741년 장로교는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신파(New Side)와 부흥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구파(Old Side)로 분리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758년에 다시 연합할 수 있었다. 비록 장로교 안에 신학적인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788년 장로교는 노회 설립 82년 만에, 그리고 대회 설립 72년 만에 뉴욕-뉴저지, 필라델피아, 버지니아, 그리고 캐롤라이나 4대회가 연합하여 총회를 조직하고, 미장로교(PCUSA)라는 공식적인 명칭도 채택하여 명실상부 미국 개신교를 주도하는 교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 후 전개된 미국의 제 2차 대각성운동은 국내외 선교를 가속화시켜 장로교회는 1837년 장로교 선교부(Presbyterian Board of Missions)를 조직했다. 불행히도 그 해 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의 연합 문제와 노예 문제를 두고 이를 지지하는 신학파(New School)와 이를 반대하는 구학파(Old School)로 분열되고 말았다. 신학파는 어번신학교와 뉴욕의 유니온신학교를 중심으로, 구학파는 프린스톤신학교와 맥코믹신학교를 중심으로 목회자 육성과 신학 교육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861년 노예 문제를 두고 남부와 북부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남북전쟁의 발발로 다시 구학파는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북부와 노예 제도를 찬성하는 남부가 분열하는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이미 신학파도 노예 문제를 둘러싸고 구학파보다 먼저 북부와 남부가 분열되어 미국 장로교회는 4갈래로 갈라졌으나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남부의 구학파와 신학파가 하나로 연합하여 1864년 남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교단을 조직했고, 북부 구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장로교 주류인 북장로교(PCUSA,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는 1870년 신학파와 역사적인 연합을 실시했다. 남북전쟁이 종식된 후 무디의 부흥운동과 국내의 교세 확장과 경제 성장에 근거한 해외 선교열에 힘입어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는 각각 1884년과 1892년에 한국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The Mission Review of the World
이와 같은 선교열은 장로교회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1784년 12월 24일 볼티모어에서 성탄절대회가 열리고,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가 감독직에 오르면서 감리교 교세는 제 2차 대각성운동 기간 동안 장로교를 압도할 만큼 놀라운 신장을 기록하였고, 곧 미국 내 제일 교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장감을 초월 제 2차 대각성운동은 국내외 선교를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10년 “해외선교를 위한 미국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814년에는 미침례교선교연맹(American Baptist Missionary Union)이, 1819년에는 감리교 해외 선교부가, 1837년에는 장로교 해외 선교부가 조직되었고, 뒤이어 1869년에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와 1878년 남감리회 해외 여선교회(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가 결성되어 1880년까지는 해외선교를 위한 토대가 구축되어 미국의 각 교단은 해외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착수했다. 1882년에는 미 감리회 내지 여선교회(Woman’s Home Missionary Society)가 결성되어 감리교의 해외선교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크 놀(Mark Noll)이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2차 각성운동은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에 의미심장한 역할을 했다. 특히 한국선교가 시작된 19세기 후반 미국의 해외 선교열은 절정에 달했다.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를 비롯해 아더 피어선(Arthur T. Pierson, 1837-1911), 고든(Adoniram J. Gordon, 1836-1895), 심슨(A. B. Simpson, 1843-1919),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 로버트 스피어(Robert Elliot Speer, 1867-1947) 같은 수많은 북미 개신교 지도자들이 세계 선교를 촉구했던 때가 바로 이때였다.

 

1880년대 한국 피어선신학교 설립자로 널리 알려진 장로교 목사 피어선은 선교대회를 개최해 해외선교의 긴박성을 일깨워 3,000여 명의 남녀들을 해외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는 1895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초교파 해외선교단체 가운데 하나인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the African Inland Mission) 설립을 주도하여 해외선교를 진작시켰다. 침례교 목사 고든은 1889년 평신도 선교사 양성을 위해 보스톤 선교사훈련원(the Boston Missionary Training Institute)을 설립하였고, 심슨은 미셔너리 얼라이언스(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모체가 된 해외 선교사역을 위한 선교사 네트워크를 1890년대에 구축하여 해외 선교열을 북돋았다. 존 모트는 미국 전역과 전세계 선교지를 돌면서 해외선교를 촉구하는 한편 이 세대에 세계 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를 저술해 수많은 교회, 교회 지도자들, 젊은이들에게 해외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학생자원운동의 초기 지도자 스피어는 1891년부터 1937년까지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를 맡아 교단의 해외 선교열을 고취하는 것은 물론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선교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884년 한국선교가 시작된 이래 첫 25년 동안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무디, 피어선, 고든, 심슨, 스피어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19세기 영미 부흥운동, 해외 선교열, 학생자원운동, 케직 사경회, 성결운동의 산물이었다. 또한 이 시대 일본에서 활동하던 헨리 루미스, 조지 낙스, 중국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 존 맥킨타이어, 길버트 리드(Gilbert Reid)도 마찬가지였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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