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과 일본에서의 복음의 준비


만주 우장에 거점을 마련한 존 로스 선교사와 의주 출신 젊은이들에 의해 중국에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廷)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학자 이병규(李秉逵)의 아들 이수정은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운 친우 사이였고, 일찍부터 개화설(開化說)을 주장하였으며 여러 차례 국가에 공로가 많았던 인물로 1882년 9월 19일 임오군란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2년 임오군란 후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일환으로 박영효를 정사, 김만식을 부사로 한 수신사(修信使)를 파송할 때 김옥균과 민영익을 국왕의 밀사 자격으로 수신사와 동행시켰는데, 이수정은 이 두 사람의 수행원 3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민비의 생명을 구해 준 공로를 인정받은 데다“왕과 가까운 친우로 왕의 근친”이었고 민영익과도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어렵지 않게 진행될 수 있었다.


본래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다 오래 전부터 일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민영익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1881년 초 이전에 이미 부산주재 일본영사 콘도우(近藤)와 접촉하고“동경(東京)에 가기 위하여 일본 주우은행(日本住友銀行)에 적금(貯金)”도 들어 놓고 있었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그는 상당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는 한때 민영익과 함께 무역과 상업을 통한 부국의 길을 찾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1년 농학부문 담당,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우(知友) 안종수(安宗洙)를 통해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의 선진 농업정책을 전수받고 한국에 그것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안종수는 일본에 있는 동안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출한 농학자 쯔다센(律田仙)을 만나 기독교에 대해 전해 들었고, 쯔다센에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산상수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처럼 고상한 정취를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매우 놀랍고, 그러한 가르침은 확실히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국인(內國人)들에게 금교(禁敎)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산상수훈을 담은 두루마리를 본국으로 가지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내가 배운 바를 왕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쯔다센의 탁월한 선진 농법에 감명을 받은 안종수는 돌아와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기술 서적으로 국민들에게 농업 선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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