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 성경 번역과 한국선교 호소


이수정의 회심과 그의 성경 번역의 착수는 일본에 유학 온 한국인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전도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가 일본에서 형성되었다. 이수정은 그의 친구들과 일본에서 주일학교를 개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의 동향 사람 가운데 두 명이 세례를 요청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귀족의 아들이었다. 1883년 6월 21일자와 7월 5일자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가 본부 길맨 박사(Dr. Gilman)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사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한국으로부터 귀족 청년 세 명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쯔다 씨를 찾아갔던 외교관의 아들입니다. 이들은 교육을 받을 목적에서 쯔다 씨에게 보내졌습니다. 한국인들 중에 세례를 받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네 명 더 있습니다. 이수정(Rijutei)과 그의 친구 이대인(Ritauin)은 다음 주일부터 주일학교(Sabbath School)를 시작하려 하는데 교재는 중국어로 된 소요리 문답을 사용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한국인 세 명이 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수정의 보고에 의하면 현재 한국인들 중에 기독교인 되었거나 되려는 구도자는 모두 12명에 이릅니다. 우리는 그의 번역 사업과 관련 지어 목회 사업을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이수정은 성경 번역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의 교류, 같은 동포들에게의 복음 전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선교 호소 등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국에서처럼 일본에서도 한국인들에 의해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초기 한국인들에 의한 복음 전파는 한국교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수정은 무엇보다도 성경 번역이 그에게 맡겨진 일차적인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1883년에 마가복음 번역을 끝낸 이수정은 다른 성경 번역에 착수했고, 그에게 성경 번역을 부탁한 루미스는 1883년 7월 30일 인쇄되어 나온 요한복음 일부를 미국 성서공회본부에 보냈다. 그의 노력으로 한문 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 신약성서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토를 붙인 한문 성경은 유식자 층에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수정은 이와 함께 1883년 6월부터 순수 우리말로의 번역을 착수해 1884년 4월에 완성하여 이듬해 2월 요코하마에서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 1천부를 발행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성경이었다. 비록 출판은 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도 완성했다. 이수정의 역본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번역 저본들이었다. 한글 성경 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놀즈(W. D. Reynolds)의 증언대로 로스와 이수정의 초기 번역은 여러 모로 보아서“대단히 값진”선물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피어선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한국 선교사역에 대한 인치심의 증거”였다.

  

이수정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농업기술이나 서양 기술문명의 전수가 아니라 동족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자신이 만나는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세례를 받은 후 이수정은 곧바로 루미스와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미국 선교단체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사역을 시작해야 하고, 다른 나라에서 먼저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사역을 시작할 것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이수정은 통역과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성공은 매우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수정의 노력에 힘입어 이미 1883년 5월에 조지 낙스 선교사와 헨리 루미스는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여행할 계획까지 세우고, 이를 본부에 타진하였던 것이다.

  

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1883년 12월 13일자 이수정의 편지가 선교잡지인 미셔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크리스마스 아동란”에 실렸다. 그의 한국선교 호소는 지칠 줄 몰랐다. 미국의 유명한 선교지 미셔너리 리뷰 1884년 3월호에 실린 이수정의 편지는 그가 얼마나 간곡히 한국의 선교를 호소했는가를 증거해 주는 단적인 예다.“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드리는 이수정의 인사”(Rijutei to the Christians of America, Greeting)로 시작된 이 편지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의 해설이 장식되어 있다:


이 면을 읽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은 이수정(Rijutei)이 매우 낯선 이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수정이라는 이름의 젊은 신사에 관해 알게 된다면, 나는 확신하건대 그 이름을 좋아할 것이고, 그도 좋아하게 될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흥미 있게 읽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 여러분은 먼저 지도에서 그의 고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과 일본에 관한 훌륭한 지도를 가지고 한국과 한국의 수도 서울을 찾아보십시오. 발견하셨습니까? 바로 그곳이 이수정의 고국입니다. 그는 왕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알려졌으며, 몇몇 사악한 사람들이 몇 년 전 반역을 일으켜 왕을 폐위시키고 왕비를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때 이수정이 민비 왕비를 숨겨 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 반역이 진정되자 왕이 이수정을 불러 갖고 싶은 선물이나 벼슬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이수정이 무엇을 요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입니까? 아닙니다. 총리직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단지 다른 나라, 먼저 일본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왕은 그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도착해 곧 선교사들을 만났고, 성경을 접하고 참 하나님과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읽었습니다. 진리가 그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곧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듯이, 이 종교야말로 나의 영혼에 너무도 소중하므로 나의 고국의 친구들과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곧 소중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강한 소원은 그리스도와 그의 소중한 구원을 고국의 그의 친구들과 민족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너무 엄청나고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편지를 다음과 같이 쓰는 것입니다.


이수정의 편지에 대한 편집자의 이런 긴 설명 후에 이수정의 편지가 소개되었다. 그 편지의 위에는 그의 편지를 쓴 날짜와 기록 장소“1883년 12월 13일 요코하마에서”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편지의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1883년 12월 13일 요코하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이수정은 미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믿음과 진리의 능력으로 나는 주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나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지킬 수 있으며, 결코 사단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조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아직 참 하나님의 길을 모르고 있으며,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전래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눈에 띄지 않는 지구촌의 한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 그곳에서는 기독교의 축복을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다섯 명의 나의 동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장차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숫자가 매일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 칠, 팔십 년 동안 불란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비밀리에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엄격히 그 종교를 금했고, 회심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승리의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숫자가 십만 명이 넘습니다. 비록 이 사람들은 주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예찬할 만하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신부들 역시 종종 박해를 받았으나 그들은 결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정부는 나라를 개방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으며 국민의 여건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완만한 정책을 쓰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록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완석작(Wan-Sok-Chuk)이라는 한 중국 기독교인이 우리 왕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헌정했으나, 정부가 이를 방해해 왕이 그것을 하사받지 못했습니다. 왕은 매우 불쾌했고, 그 일이 현재 중요한 논제가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려움들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만 그것들은 곧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황금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귀국은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민족들이 교사들을 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되면] 그러한 가르침들이 주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비록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보내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매우 진지하게 여러분들이 여기 한국선교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과 상의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을 일본에 보내 스스로 한국선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가장 훌륭하고 안전한 계획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간구합니다. 만일 나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나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이수정의 편지는 그가 일본에 건너간 이유와 그곳에서의 활동과 사역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선교를 준비하는 데 기여한 사실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복음을 접함으로 말미암아“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고, 후에 성경과 많은 기독교 전도문서를 번역하여 한국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한국 복음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더 큰 공헌은 미국에 한국선교를 촉구하여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 편지는 미국교회 교우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공개편지나 마찬가지였다. 선교誌의 편집자는 이수정의 이런 중심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그 편지의 끝에 편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결단을 호소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첨가시켰다.“사랑하는 주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으로 갈 수 있는, 그리스도와 소중한 영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야말로 당장 가서 일생동안 우상을 섬겨 왔던 이 가난한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와 참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이수정을 충분히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희망으로 심장이 박동 치고 있지 않습니까?”


세례 받은 지 만 1년도 채 안 된 사람의 편지 치고는 복음의 열정이 짙게 배어 있고, 전체 구성은 물론 내용과 논제가 너무도 분명하다.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푼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수정의 편지는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바울의 꿈속에 찾아와서 간곡하게 부탁했던 그야말로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열을 고취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윤태는 해외선교를 지원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해 북미의 유망한 젊은이들이 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한국선교를 결심하였다고 말한다:


이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에 뜻을 정하고 자기 나라를 떠나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온 사람은 한국장로교회의 창시자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Underwood)와 메토디스트[감리교]의 창시자 아펜젤러 목사(Rev. Gerhart Appenzeller)이다. 당시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두 청년은 뜻을 정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수정 씨의 편지를 잡지에서 읽은 후에 “조선에는 누가 가는가?” 하는 신령한 음성을 듣고, 전자는 북장로회의 선교사로서, 후자는 메토디스트교회[감리교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만일 오윤태의 말이 사실이라면 실로 이수정은 한국선교를 태동시킨 마게도니아인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한 셈이다. 이수정의 한국선교의 공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돼 국내에 널리 유포되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복음 성경 1천 권이 출판되던 바로 그 해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요코하마에 들려 이수정에게 2개월 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주머니에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선교사가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한 경우는 없었다. 근대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엄 캐리가 인도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해 인도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것처럼 이수정의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를 비롯해 이후에 오는 선교사들이 한국선교를 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언더우드가 선교지에 실린 이수정의 선교 호소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입국 전 그로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그리고 그가 번역한 성경을 가슴에 지니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했다면, 한국선교에 끼친 이수정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수정은 “비록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이라고 겸손하게 편지에서 밝혔지만, 확실히 그는 한국선교를 가시화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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