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 귀국과 말년


그러나 이수정이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에 한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소환하기 위해 소환령을 내렸다. 이수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명의 고위 관리가 일본에 와 이수정을 설득했으나 이수정이 귀환을 거절했다. 1886년(명치 19년) 1월경에는 이수정의 동생이 형이 일본에서 진 부채를 갚기 전에는 한국으로 귀국할 수 없다는 소문을 듣고 7, 8백 달러에 해당하는 1千圓을 건네주러 왔다. 일본에서 농업 기술을 배워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형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본에 건너온 동생은 형이 “더 이상 상업과 농업을 연구하지 않고” 기독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단히 실망했다:


여기에 到着하자 그[동생]는 이수정이 農業, 商業의 硏究에 從事하지 않고 있으며, 或은 수많은 異常한 發明品에 接하여 보고 놀랐다. 그의 모든 時間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쳐졌으며, 그의 마음은 完全히 變化한 것 같았다. 동생은 이것을 보고 唐慌하여 그 兄 이수정에게 말하기를 “當身은 더 以上 나의 兄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異常한 感應이 兄님을 完全히 支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에 빠져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전 시간을 몰두하며 신앙생활에만 매진해 있는 형의 모습을 불신자인 동생이 이해할 리 없었다. 그가 볼 때 그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 한동안은 농업기술을 전수해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하겠다던 형이 이처럼 기독교에 빠져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는 형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을 돕기 위해 1천 원의 돈을 가지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동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노하는 동생에게 이수정은 “나는 돈이 필요 없다. 너는 그 돈을 도로 가지고 가라. 나는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네가 바라는 대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와 우리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증기선보다도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동생을 돌려보냈다. 이수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성경 번역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지를 깨닫고 있었고, 또 그 일을 속히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동생의 귀국 권유를 거부한 것은 동생을 무시하거나 고국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민족을 향한 더 큰 일, 더 시급한 일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또다시 고위관리 박준우(朴準禹)를 일본으로 파송해 설득하는 바람에 이수정은 고국의 부름을 거부하는 것도 신앙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평소 이수정은 조선의 왕실은 물론 기왕의 민영익과의 친분과 우호를 소중히 여겼다. 정치적인 역학관계도 그의 귀국을 부채질했다. 갑신정변 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주모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은 물론 자객을 보내 주모자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이 한국선교를 선교사들을 통해 호소하자 자신도 그들과 한 배를 탄 매국자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일본에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지원해준 민영익과의 개인적 친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주재 선교사들과의 교분을 나누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행위 자체가 순수한 신앙에서 발로된 것이지만 본의 아니게 개화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격이 될 수도 있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


본래부터 이수정이 김옥균과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개화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문호를 열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을 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1880년 친구 김굉집이 일본에 건너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일본에 갔을 때도 이수정은 김옥균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만큼 둘의 사이는 좋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기 1개월 전인 1883년 3월에 김옥균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조선 학생들을 받아 1884년 3월 7일 당시 30여 명의 학생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1883년 8월에 저술한 조선일본선린호화(朝鮮日本善隣互話) 1권에 김옥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도 김옥균에 대한 이수정의 인상이 상당히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그들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것은 갑신정변 이후였다. 이수정은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주도하고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민영익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으로 인해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 그때부터 이수정이 1886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惡化 一路)”였다.


이 때문에 김옥균은 기회가 있는 대로 이수정을 제거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1886년 1월에 방문한 동생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3월 21일 이수정은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습격을 받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 1886년 5월 10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는“김정식이라는 사람이 이수정을 익살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동경경죄재판소에 구속되어 있다”고 보도했으며, 그 해 8월 24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의하면 “조선국(朝鮮國) 양산부(梁山府) 원동(園洞)에서 온 김의순(金宜純, 32세)은 지난 3월 21일 밤에 신전구(神田區) 담로정(淡路町) 二目四番地 도변유길(渡邊留吉) 댁(宅)에서 친하게 교제(交際)하던 이수정 씨와 말다툼 끝에 복부를 차고 준비해 가지고 있던 비단 손수건에 싼 탄환의 파편으로 머리와 얼굴을 때려 전치 20일 이상의 상처를 입혀 동경경죄재판소(東京輕罪裁判所)에서 심문(審問)을 받은 결과, 지난 21일 형법제삼백일조(刑法第三百一條)에 의거(依據) 중금고(重禁錮) 일년(一年)의 형(刑)을 받았다.”


1886년 들어 이수정은 두 번에 걸쳐 자객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이수정에게 적지 않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고국을 다녀올 계획을 세웠던 이수정으로서는 이와 같은 자객의 습격을 받자 아예 일시 귀국이 아닌 영구 귀국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이수정이 일본에 계속 체류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조국의 부름을 계속하여 거부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클라라 루미스(Clara Denison Loomis)에 의하면 “그[이수정]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헨리 루미스를 찾아와 한국에 오면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헨리 루미스를 초청했다.”루미스에게 방문 요청을 한 것을 보면 이수정은 귀국해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그는 1886년 6월 2일 4년 동안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조선 정부가 보낸 박준우와 함께 귀국했다.


그가 탄 배에는 이수정 외에도 박준우, 본국으로 소환되는 유형준(兪亨濬), 유송진, 박영우, 서광철(徐光轍), 김한기(金漢琦) 등 다섯 명의 유학생, 그리고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며 한국 정부로부터 2만 원을 가지고 와서 호화로운 생활만 하던 조복(趙福)도 있었다. 귀국 후 이수정의 신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한국에 도착한 후 보수파에 붙잡혀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설인데, 이것은 일본교회문서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루미스 역시 이수정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권력을 잡고 있는 보수파들에 의해 체포되어, 장차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반대할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지를 토막 내 처형당했다”고 말한다.

 

또 하나는 이수정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처형은 사실이 아닌 풍설(風說)이라는 주장이다. 이수정과 같은 배를 타고 조선에 왔던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은 1886년 7월 14일자 조선에서 동경으로 보낸 통신에“오랫동안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이수정 씨는 귀국 후 일본에 있을 때 얻었던 지병도 근일에는 점점 쾌차(快差)가 있어 건강이 회복되어 가며 국왕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고 우대하며 소중하게 여겨 근일에는 특별히 쌀과 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는 보고를 보냈다. 오윤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그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처형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수구파에 의해 처형을 당했든 아니면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세상을 떠났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 선교에 바쳐진 그의 길지 않은 생애 자체가 일종의 순교적 희생,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백낙준(白樂濬) 박사가 자신의 한국개신교사에서 엘렌 파슨(Ellen C. Parson)의 한국선교 15년사를 인용해 이수정이 귀국 직전에 배도했다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이었고 일본에서 문필로 널리 공적을 세웠으며 미국에서 그의 사진이 등재되기도 했지만, 파슨의 기록을 들어 이수정의 배도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만일 이수정이 기독교 신앙을 정말 버렸다면“참으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단지 귀국 전 그 주변에 벌어진 정치적인 정황 때문에 잠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루미스에 따르면 동생이 다녀가고 오래지 않아 이수정은 일본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에 개화파 정부를 세우려는 책략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의 주의력이 자연히 성경연구나 번역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미스는 이것이 곧 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루미스를 방문“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뉘우친다”고 고백하고 귀국하면 그를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둘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이수정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와 돌아가서 어떻게 선교사역을 협력할 것인지를 루미스와 심도 있게 논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수정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약 1개월 후인 7월 12일 헨리 루미스가 길맨에게 보낸 편지에서“앞으로 그는 선교사업에 매우 유용할 것으로 기대됩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수정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배도는 그의 활동경력, 그가 토로한 신앙고백과 확신, 그리고 귀국 전 루미스와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쉽게 단언하기 힘들다. 이수정은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불러 주신 거룩한 도구였고, 이를 위해 그가 남긴 발자취는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다. 당시 한국선교에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견해를 빌린다면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사역은 한국에 선교 문호를 개방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세 가지 공헌 가운데 하나였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7 11:04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