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후스의 순교

위클리프와 더불어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가로 널리 알려진 존 후스가 1415년 43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1372년 보헤미아의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후스는 1390년 명문 프라하대학에 입학해 3년 후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다시 3년 후인 1396년에는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400년 사제로 서품을 받은 후스가 개혁에 불을 지피기 시작한 것은 1402년에 프라하 소재 베들레헴 채플의 교구 목사와 설교자로 임명되면서부터다. 그는 곧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주도하는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후스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프라하의 대주교 쯔비넥(Zbynek)은 교황의 재가를 받아 베들레헴 채플을 포함한 예배당에서 후스가 설교하는 것을 금하는 금지령을 내렸다.

후스가 이를 거부하자  대주교는 1410년에 후스를 파문시키기에 이르렀다. 후스에게는 세례식이나 장례식을 비롯한 어떤 종류의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동안 그는 프라하를 떠나 "교회"와 "성직매매"를 저술하여 로마교회의 문제를 파헤치면서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414년 후스는 황제 지그문트로부터 안전을 약속 받은 후 콘스탄스회의 소환에 응했으나 한 달이 못되어 교황 22세 추종자들이 그를 붙잡아 투옥시켰다. 공의회 공판에 넘겨진 후스는 갖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학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1415년 7월 6일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받고 화형 당했다.

그의 순교는 로마카톨릭으로부터의 보헤미아 분리를 촉진시켰고, 후스의 개혁사상은 칼릭스틴스파와 타보리츠파를 통해 계속 되어 루터와 칼빈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06.1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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