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의 입국

1884년에 입국한 알렌이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리 로즈(Harry A. Rhodes)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게 한 지도자”였으며, 스피어(Speer) 박사가 그를 가리켜 언급한 것처럼 “매번 그가 미국에 올 때 선교의 횃불을 드높이 불태웠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펜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더(Scuder) 박사, 테일러(Taylor) 박사와 나란히 조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얼마간은 알렌의 노력으로 개원된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선교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였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다. 그의 위대한 열심, 불굴의 에너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초자연적이라는 위대한 신앙과 깊은 확신은 그를 탁월한 지도자로 만들었고, 모든 종류의 선교사역의 출발에 있어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교회사가 라토렛은 언더우드를 이렇게 평했다:


1885년에 두 번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가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선교를 계속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현명한 선교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교육자, 성경 번역자, 그리고 다른 기독교문서, 사전 편집자, 복음 전도자, 조직가, 그리고 국왕의 비공식적 고문관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구태여 라토렛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더우드만큼 추진력과 친화력과 주님을 향한 놀라운 비전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바울의 심장에서 박동치고 있던 복음의 빚진 자의 소명의식이 강하게 불타고 있었다. 본래 인도선교를 지망하던 그를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보내신 것은 이 나라를 복음화하시기 위한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이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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