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준비


뉴욕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뉴 브룬스윅신학교에서의 3년간 그가 경험한 배고픔과 어려움, 고학과 면학, 근면과 성실은 후에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훈련과정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882-1883년 겨울, 그의 급우 가운데 한 사람인 앨버트 올트먼스(Albert Oltmans)가 뉴 브룬스윅신학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200만 내지 1,300만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어 이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였다.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한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에 대한 윌리엄 그리피스의 도전이었다. 1882년, 언더우드의 뉴 브룬스윅신학교 10년 선배 그리피스는 그 유명한 조선: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를 출판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과 예리한 필치가 조화를 이룬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시로서는 한국에 관한 가장 무게 있는 서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고, 달레의 한국교회사나 로스의 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와 더불어 한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서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 관한 역사, 문화, 사회는 물론 한국의 대 외국교류관계, 그리고 선교전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그러면서도 국제 정세와 선교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술했다. 당시 세계무대의 뒤 안에 가리어져 있던 은둔의 나라 한국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올린 작품이었다. 뉴 브룬스윅신학교를 1872년에 졸업하고 세계 선교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선배 그리피스의 활동은 언더우드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신학교에서 마지막 3학년을 보내던 1883년과 1884년 사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행한 복음주의운동의 대변자 피어선(A. T. Pierson)의 강연은 언더우드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다. 뉴브룬스윅에서 재학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점점 더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터였기 때문에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1883년 언더우드는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대회에 참석해 많은 감명과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서의 꿈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그곳에서 한국감리교 선교의 개척자 아펜젤러를 만나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한국선교의 꿈을 더욱 다졌다. 그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선교를 위해 뜻을 모았던 절실한 동료요 친구요 동반자가 되었다. 훗날 한국선교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놀라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도선교를 준비하던 언더우드의 마음과 환경을 움직이셔서 선교지를 한국으로 극적으로 돌리셨다. 언더우드는 1909년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 때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882년과 1883년에 걸치는 겨울, 지금은 동경의 명치학원에 계시지만 그 당시에는 학생이었던 올트먼스 목사가 뉴 브룬스윅 선교지원자들을 모아 놓고 한 보고서를 읽어 주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조약에 의해 서양 세계에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은둔의 나라에 관한 것으로 그분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천이백만 내지 천삼백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것, 교회가 문호개방을 위해 기도했고, 결국 1882년 슈펠트 제독을 통해 맺은 조약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활동도 없이 일년여를 보냈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 하에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1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온 터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을 물색해 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채 1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 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인도가 나의 선교 소명으로 알고 인도를 위해 각별히 준비해 오던 일들이 떠올라 제가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는 개혁교회 선교부에 [한국 파송을] 두 차례나 신청했지만 그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금이 없다며 나의 청원을 거절했습니다. 또 장로교에도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에 남아 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교회의 요청을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 찰나,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언더우드는 개혁교회(RCA)에 한국선교를 두 차례나 신청했는데도 거절당한 것이다. 당시 그가 속한 개혁교회는 일본에 베어벡(Verbeck), 브라운(Brown), 발래(Ballagh), 윅코프(Wyckoff), 스튜트(Stout), 부츠(Booth), 피키(Peeke), 키더(Miss Kidder) 양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파송했고, 이미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선교회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까지 선교를 확장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가 북장로교로 적을 옮겨 한국행을 타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뉴욕에 있는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 청빙을 수락하는 서류를 발송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다시 한 번 뉴욕의 센터 스트리트 23번지에 위치한 북장로교 선교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 동안에 예기치 않은 변화가 발생해 있었다. 언더우드를 본 엘린우드 박사는 전에 없이 반가워했고 언더우드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언더우드는 선교부 다음 회의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언더우드의 한국선교의 오랜 염원은 그의 인내와 노력을 통해 현실로 이루질 수 있었다. 결국 “1884년 7월 28일 이 교육받은 복음 전도자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1884년 봄, 신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로부터 문학 석사를 받았고, 그 해 11월에는 뉴 브룬스윅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도 받았다. 한국 파송을 앞두고 언더우드는 런던 선교회 총무직을 맡고 있는 삼촌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 목사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삼촌은 우리도 한국에 거의 20년 전에 한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전후 문맥상 삼촌이 말한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였음이 분명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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