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의 입국과 활동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 후인 1885년 1월 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여기서 언더우드는 하나같이 한국선교를 염원하고 후원하던 헵번(J. C. Hepburn)을 비롯, 그곳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얼마 후 이수정을 만나 그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그가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들고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가 탄 배에는 아펜젤러도 타고 있었으나, 아펜젤러는 아내가 임신 중에 있었기 때문에 입국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미국 공관 폴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주일 후 아내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피스의 말한 바, “이 땅에 상주한 첫 안수 받은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4월 7일 서울에 도착해 4월 10일부터 광혜원에 “약제사”로 들어가 의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가복음의 번역과 사전편찬을 착수했다.


처음에 수술을 집도하는 알렌을 도우려고 했으나 피를 보고 두 번이나 기절해 할 수 없이 내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동시에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학교(John D. Wells School)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입법의원 원장을 지낸 김규식이 부모를 잃고 가난에 굶주리고 있을 때 언더우드를 만난 것이 바로 경신학교에서였다. 너무 굶주려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려는 그를 언더우드가 데려다가 양육하며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학교사업 외에 1887년에는 성서번역을 추진하기 위해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결성했고, 1890년에는 문서 선교를 위해 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했다. 성서번역은 언더우드의 필생의 사업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에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특히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아펜젤러, 스크랜톤의 노력은 대단했다.


언더우드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세례를 베푼 인물이며, 남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회의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 준 인물이며, 연합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가 지적한 것처럼, 입국한 지 불과 수년 만에 언더우드는 2권의 저술을 준비하였으며, 찬양집 번역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전도지와 간추린 기독교 교리를 저술하고 있었으며, 소요리문답 번역도 진행하고 있었다. 1890년 아내가 출산 후 건강이 좋지 않아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집회를 인도하며 한국선교를 촉구하였고, 1892년 돌아와서는 전도, 교육, 문서사업에 전념하여 1900년에는 신약을 완간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고, 그 해 YMCA를 조직하여 190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회장으로 시무했다.


한국교회가 선교희년을 맞는 1934년 마포삼열 선교사는 언더우드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는 윌리엄 캐리의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며 이렇게 평했다:


한글 성경 번역에 있어서나 일본어 교재의 준비와 인쇄에 있어서나 맥코믹신학교와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메시지와 도전에 있어서나, 미국 선교부와 교회에 대한 호소에 있어서든지,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촉구하는 일이라면 항상 선두에 서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는 윌리암 캐리의 신앙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의 음성을 들은 이들은 누구나 심금을 울리는 그의 호소력 있는 도전을 잊지 못할 것이고, 말씀을 전하거나 그가 낙관적인 보고를 할 때나 아니면 발전계획을 옹호할 때 열정적으로 전신으로 호소하는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과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맥코믹신학교 출신 그레이험 리(Graham Lee), 스왈른(Swallen), 무어(Moore), 그리고 테이트(Tate),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출신 레이놀즈(Reynolds)와 전킨(Junkin),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밀러(F. S. Miller),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 에비슨(O. R. Avison)을 한국 선교사로 확보한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를 개시하도록 한 것도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 외에 누가 존 로스 신약성경을 전해 받은 한국인들을 찾기 위해 그렇게 깊숙한 강계까지 실제로 위험한 여행을 하겠는가?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교육가로서”, “성경 번역자로서”, “편집가로서”, “여행가로서”, “정치가로서”, 그리고 “평화의 사도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처럼 언더우드 역시 전형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이 평소에 외친 대로 기독교 역사 속에 당신의 교회를 위해 일해 오신 하나님이 변함없이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시고,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신뢰한 가운데 “신쟈의 본분과  일”을 온전히 감당하고, “하님의 놉히 부르시 상을” 얻기 위해 “과 성품과 과 힘을 다야 하님을 랑”하는 가운데 “후세샹”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뎌를 아 즁에셔 자라” 간 하나의 참된 모델이었다. 교회사가라면, 아니 한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본 이들이라면 한국선교의 계획 이면에 언더우드의 신앙과 이상과 아이디어가 얼마나 반영되었는가를 깊이 인식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1889년 3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 양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그는 복음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생애에는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화란개혁교회(RCA) 교단과 뉴 브룬스윅신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19세기 부흥운동의 전통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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