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08월 20일/한석진 목사 소천

 
1939년 8월 20일 한국 장로교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한석진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 장로교회가 틀을 잡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한석진 목사가 단순히 한국 장로교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명(한석진, 서경조, 양전백,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 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여러가지 면에서 한국교회가 오늘날 처럼 놀랍게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893년 1월 서상륜과 함께 사무엘 마펫, 그레함 리, 소완론 등 세 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를 개척할 때 동행했던 인물도 한석진이었다. 이로 인해 1894년 5월에는 "이교를 수입하여 다수의 양민을 유혹하는" 선교사들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평양감사 민병석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풀려 나기도 했다. 1912년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었을 때 언더우드가 총회장으로, 길선주가 부총회장으로, 그리고 한석진이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보다도 그가 한국교회에 지대하게 공헌한 것은 여집사 제도를 처음으로 제의했다는 점에서다. 이 여집사 제도는 한국교회의 틀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국의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현대교회에서도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다. 비록 안수를 받지 않는 서리집사이기는 하지만, 여집사 제도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에서만 독특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제도이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08.01 12:03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