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2년 08월 23일/위그노대학살

 

구태여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의 명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초대교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기독교인라는 이유로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면 종교개혁 시대에는 개신교라는 이유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이었던 위그노 쟌 달브레의 아들과 카톨릭 신자 찰스 9세의 여동생 마가레뜨 공주와의 결혼식이 거행되자 분개한 카톨릭 교도들이 일주일 후인 1572년 8월 23일 프랑스 내 위그노 지도자들과 위그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23일 토요일에 시작된 이 학살은 26일 화요일까지 계속되어 약 2만 명의 프랑스 위그노들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역사에 학살사건으로 알려졌지만 종교개혁이라는 총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순교였다. 그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위그노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던 헨리 4세는 위그노와 카톨릭 간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1598년 4월 13일 낭뜨칙령을 발표하고 그해 5월에는 스페인과 베르뎅 조약을 체결해 1562년부터 계속되어 온 위그노와 카톨릭 간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08.01 12:05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