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의 입국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던 배후에는 가장 뛰어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있었다. 그는 복음에 대한 열정,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랑,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1912년, 그의 신학교 동료 앤더슨(William F. Anderson)이 말한 대로 “그는 신체적으로는 건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지성적으로는 예리하고 학자적이었으며, 게다가 따뜻한 가슴과 동정심이 어린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피스가 “한국의 복음의 개척자”, “한국인의 사도”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아펜젤러는 혈통적으로는 스위스 혈통을, 신앙적으로는 종교개혁과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이니아 소더톤(Souderton)에서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마리아 게르하르트(Gerhart)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메노나이트 출신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줄줄 암송할 만큼 독실한 신앙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받았고, 1872년 11월 12일 임마누엘 개혁교회에서 피터 피셔(Peter S. Fisher)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개혁파 전통을 준수하는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5 13:20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