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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enderson, Harold H.(1893-?, NP) / Henderson, Edna Pusey; Henderson, Renate Kroner

닉네임
이순종
등록일
2017-06-17 11:37:22
조회수
2163
첨부파일
 기말보고서 _ M0169 _ 2015210179 _ 이순종.hwp (411648 Byte)
Ⅰ.기본사항

1. 이름 : Harold H. Henderson (대구) / 헨더슨 / 한국명 : 현거선
2. 출신 및 소속 : 미국 오리겐주, 북장로교
3. 한국선교기간 : 1918년 9월10일 ~ 1941년 5월
4. 연표

① 1893년 11월 미국 인디애나 주 포트 웨인(Fort Wayne)에서 태어남.

➁ 1918년 - 미국 오리겐 주 출생으로 한국선교사로 파송. 9월10일 부인(Edna Pusey)과 함께 내한. 경북 대구 선교부에 배속받아 이듬해 계성학교 제4대 교장으로 취임. 경북 대구선교부에 임명받아 계성학교 4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임.

➂ 1925년 - 교장 취임 5년 만에 강당준공.

➃ 1931년 – 본관 신축함.

➄ 1936년 - 신사참배 문제로 기독교학교 폐쇄를 결정한 북장로회 선교부의 결의에 반발하여 강경한 태도로 평양의 숭실, 숭의 등이 폐지될 때에도 학교를 경북노회에 넘겨주어 계성은 경북노회 운영으로 계속 유지.

➅ 1941년 5월 - 일제는 그의 교장직 퇴임을 강요하여 교장직을 김석영에게 물려주고 귀국함. 해방 후 한국에 다시 나오지는 못했음

➆ 1954년 선교사직에서 사임한 후 미국 구라선교회 총부로 봉직하면서 한국의 구라선교를 지원함.

➇ 1944년 3월 29일 - 1918년 함께 내한했던 부인은 본국에서 별세. 1951년 크로너(Renate Kroner)와 재혼함. 슬하에 3남 4녀가 있는데 두 아들(Richard; Lloyd P.)이 목사가 됨. 그의 동생(Lloyd P. Henderson; 현대선)은 1920년 한국에 왔다가 만주로 가서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1932년 일본군(혹은 마적?)에게 피살당함.

5. 가족사항 : Henderson, Edna Pusey(부인)과 3남 4녀, Henderson, Lloyd Putnam(동생)


Ⅱ. 선교사 소개

해럴드 헨더슨은 1893년 11월 미국 인디애나 주 포트 웨인(Fort Wayne)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장로교인으로서 지역 교회에서 활발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부모가 있는 “기독교 가정” 속에서, 헨더슨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신앙생활을 “끊임없이” 하였다. 그가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된 데에는 특히 어머니(Jean Hayes Henderson)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의 북동부 태평양 연안에서 저명한 장로교 목사였던 리처드 헤이즈(Richard M. Hayes)의 딸이었다. 헨더슨의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질 정도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그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양육되고 훈련받은 깨끗하고 헌신된” 젊은이로 키웠다고 한다.

해럴드 헨드슨의 두 살 아래 동생 로이드(Lloyd Putnam Henderson, 1895-1932)가 형의 길을 따라 목사가 되고 한국에 선교사로 지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로이드는 선교사로 지원한 후 그것이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의 갈망(desire)”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해럴드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헨더슨이 교역자의 길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이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해외 선교사가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삶이라고 판단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헨더슨은 워싱턴 주 시애틀에 있는 주립 대학인 워싱턴 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동양 어문학을 전공 했는데, 이 대학에 다닐 때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에 참석하여 선교사가 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가 첫 번째 부인인 에드나 퓨지(Edna Margaret Pusey, 1892-1944)를 만난 것도 이 시절이었다.

에드나도 “학생자원자 선언카드(Student Volunteer Declaration Card)”에 서명한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자원자들은 매주 만나면서 같이 훈련을 받았는데, 헨더슨이 워싱턴대학의 학생 자원대(Student Volunteer Band) 지도자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1914년 약혼했는데, 워싱턴 대학을 1년 먼저 졸업한 에드나는 헨더슨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유치원교사 교육학교와 시카고의 무디 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에서 공부하면서, 결혼 후 같이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다른 많은 내한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헨더슨과 퓨지가 처음에 생각했던 선교지는 한국이 아니었다. 헨더슨은 정식으로 선교사 지 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무슬림 들을 상대로 선교를 하고 싶다면서 인도 북서부, 페르시아 그리고 중국 서부지역을 예로 들었다. 물론 그는 자신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항상 기후가 온화한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너무 더운 곳보다는 추운 곳에서 일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정식으로 지원서를 제출할 때, 선호하는 선교지로 한국을 먼저 택한 후 두 번째로 무슬림 지역을 적었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특별한 부름(special call)”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국이 헨더슨의 제1지망지가 된 것은 한국에 급히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선교본부는 먼저 로스코 코엔(Roscoe C. Coen)에게 그 자리를 제안했으나 결국 헨더슨 부부가 먼저 가게 된 것이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총무 스탠리 화이트(Stanley White)는 코엔보다 헨더슨이 “더 확실한(stronger) 사람”이라고 여겨 헨더슨이 갈 것을 바랐다. 화이트가 이렇게 판단한 데에는 여러 사람이 보낸 추천서가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특히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찰스 어드먼(Charles R. Erdman)은 자신의 제자 헨더슨을 “예외적으로 훌륭한 성품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적극 추천하였다.

당시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이사였던 어드먼은 해외선교부를 이끌어가던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이후 미국 북장로교 총회장(1925-26)을 지냈으며, 오랫동안 이사(1906-42)와 이사장(1926-1941)을 맡으면서 교단 해외선교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헨더슨이 한국을 “특별한 부름”으로 여기는 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프린스턴 신학교 선배 제임스 홀드크로프트(James G. Holdcroft)였다. 당시 마침 미국에 와있던 그는 헨더슨에게 한국의 상황을 직접 전해줄 수 있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양극단에 서서 갈등을 빚게 된다.

여겨 계성학교 설립을 결정했던 것이다. 처음 학교 설립을 책임진 사람은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였다. 그는 약 30명의 학생을 모아 대구 남문안교회 구내의 초가집 한 채에서 시작했는데, 이것은 서울 이남에 설립된 최초의 기독교 중등학교였다. 헨더슨은 1941년 마지막으로 안식년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 생활 전체를 계성학교 교장으로 보냈다. 계성학교 교장 직 이외에 헨더슨이 한 일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한글 성경 용어색인사전(concordance)을 만든 일이다. 부인과 함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원고를 완성했으나 신사참배를 둘러싼 혼란 속에 출간되지 못하고 말았다. 헨더슨 부부는 194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미국과 일본이 적대국이 되어,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도 모두 추방되는 상황 속에서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드나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44년 사망하였다. 두 사람은 한국 선교사로 있으면서
모두 8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그 가운데 1명을 한국에서 잃었다. 전쟁 기간 동안 헨더슨은 전쟁 노동자를 위한 초교파적 사역 책임자로 일하다가, 전쟁 후에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한국담당 임시총무, 미국 구라선교회(American Leprosy Missions) 총무 등의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헨더슨은 1958년 은퇴하였는데, 은퇴 후에는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가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Northfield)에 설립한 유명한 기독교 중등학교인 마운트 허먼 학교(Mt. Hermon School)에서 성경교사로 일하였다. 기독교적 중등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이 은퇴 이후까지 지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헨더슨은 1966년 계성학교 제60주년 기념식 때 초청되어 “제자들이 모아 보낸 여비로” 한국을 다시 방문했고, 박목월, 박태준 등 제자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는 90세가 넘도록 장수하다가 1984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한 학기동안 한국교회사를 배울수있어서 그것도 박용규 교수님께 배울수있어서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 선택수업부터 한국교회사 수업까지 교수님의 열정과 한국 교회의 부흥을 위한 노력을 본받아서 바른 말씀을 전하는 신학도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성일:2017-06-17 11:37:22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