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운동은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부흥운동의 영향과 성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첫째,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다.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 대로 평양에서 발흥한 “대각성(great religious awakening)은 영적운동(a spiritual movement.)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철저한 죄의 고백과 보상이 눈에 띠게 나타났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울면서 그들의 잘못을 서로 나누느라 수업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회개는 결코 고백과 눈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상할 때 평화가 따른다. 가능
기독교인은 이 민족의 미래를 깊이 고민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가슴으로 쓸어안았던 것입니다. 그 외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교회가 놀라운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기독교민족주의 사상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한 본분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따로 있고 민족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이 민족이 사는 길이 기독교에 있다고 확신한 이들은 민족복음화를 염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백만명을 주께로 인도하자는 소위 백만인 구령운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태동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사경회가 개최되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였다. 요한 1서를 본문으로 한 하디의 일련의 메시지는 그곳에 참석한 많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하디는 은혜를 받기 전 얼마나 자신이 교만했는지,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을 변화시켜주셨는지를 진솔하게 회중들에게 전해주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이길함 선교사로부터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12살의 어린 셔우드 홀(She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지역 주재 선교사들이 모여 가진 기도회 동안에 발흥한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영적각성의 모체였다. 초기 부흥운동의 모든 자료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산부흥운동으로 귀결된다는 일치된 견해를 피력하였다.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했던 기도회는 두 명의 무명 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캐나다 장로교 출신 여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라토렛이 “비극의 역사”(tragic history)라고 명명했던 우리민족 최대 수난 시대, 20세기 초 한반도에는 세 차례에 걸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 그것이다. 19세기가 지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후 10년 사이에 놀라운 부흥운동의 영적 파고가 세 차례나 계속된 것은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로 대변되는 제1차대각성운동도 1734
한국교회 영성의 거장, 길선주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장 탁월한 설교자, 비범한 사람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고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루에 세 번 혹은 네 번을 설교하면서도 결코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선지자의 말과 같아서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다.” 영향력 있는 북장로교 선교사 스탠리 솔터가 길선주에 대해 한 말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나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그에게 “가장 재능 있는 설교자,”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전도
그래함 리(Graham Lee)와 평양대부흥운동평양선교를 개척한 성령의 사람평양선교의 기적과 평양대부흥을 견인하다“만약 교회가 한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회를 선용한다면 한국은 근대에 기독교화 된 첫 민족이 될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간 존 모트가 한 고백이다. 평양선교의 기적은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그 무대의 주역은 그래함 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처럼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평양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교사도 드물다.마펫과 함께 평양선교를 개설하고 장대현교회를
1890년 Charles C. Long이 몇 장의 당시 고위층의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을 “Art and the monastery in Corea”라는 이름으로 기고했습니다.
100년 전, 한국부흥 ⑬-조나단 고포드1907년 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었을 때 -번역: 박용규 교수 초대교회를 인도했던 똑 같은 성령께서 한국교회를 인도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한국 교인들의 불타는 열정입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인쇄된 성경을 그토록 신속히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서만 한 해에 3000권의 성경이 팔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배웠고 심지어 우둔한 여인들까지 성경을 배웠습니다. 사업차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길을
일제의 침략이 절정에 달하던 그때, 비록 기독교계 내에서였지만 민족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교파와 교단의 벽을 넘어 민족복음화를 위해 하나되어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민족복음화를 위한 이와 같은 총체적인 노력과 협력은 한일합방으로 인한 민족적 고난을 극복하게 만들어 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고가 기성 신자들의 심령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평가-2 백만인 구령운동의 결과를 놓고 일부에서는 “이들 수치가 백만인 구령운동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수치들이 하나님께서 지난해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가져다주신 것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를 말해 주지는 않는다”며, 그리고 “심지어 부흥회에 참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1909년 9월, 백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할 때부터 과연 이듬해 9월까지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국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4년으로부터 불과 25년 만에 20만 명이라는 교세를 가질 수...
백만인 구령운동은 민족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고, 은혜 가운데 자라고 있는 증거를 볼 수 있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영향- 선교운동 3 이기풍 선교사는 목포와 복음의 불모지 제주도에서 여러 차례의 전도 집회를 열어 불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젊음을 바쳤다. 그는 매년 독노회에 참석해 “제쥬에 전도되 형편을 일일이 셜명”하면서 전체 한국 교회와 깊은 유대 속에 선교를 교단적인 차원에서 추진하도록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08년 1월 11일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에서는 청중들이 교회를 가득 메운 가운데 이기풍 선교사 파송예배가 있었다. 노회가 조직된 후 파송되는 첫 선교사의 파송예배가 부흥운동의 중심지 평양, 그것도 대부흥운동의 발원지 장대현교회에서 평양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이다...
동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은 민족복음화에 대한 비전으로, 이것은 다시 국내 선교를 넘어 해외 선교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선교운동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이들은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이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복음화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이미 뿌리 내린 한국인들의 민족복음화 열기를 더욱더 가속화시켰다. 당시 예수 믿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심령이 민족복음화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불타고 있었다. 비록 선교회가 여전히 한국 교회 전체를 총괄하고 있기는 했지만 백만인 구령운동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진행되는 동안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의
백만인 구령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안동에서도 전도 집회가 열려 교회에 새로운 영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1909년 7명으로 시작한 그곳 안동의 어느 교회는 설립된 지 불과 1년 만인 1주년 기념예배 때 교인이 70명으로 증가하였고, 1910년 10월 30일 교회 건축 후 드린 첫 예배 때는 400명이 교회당을 가득 메웠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 속에서 그 해 11월 13일 주일날 평양의 길선주..
1910년 10월 한 달 동안에 서울 전도 집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이어 10월 30일부터 각 선교부별로 지방 전도 집회가 열렸다. 전국의 선교부는 거의 10일 동안 정규 선교 사역을 중단하고 전도 집회를 열었다. 지방 전도 집회 역시 결실이 적지 않았다. 이미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전국에 알려진 길선주 목사가..
전도 집회는 어느 한 곳에서 집단적으로 사경회처럼 열리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각 지역의 개교회별로 준비하고 개최되었다. 서울 지역의 모든 선교사들이 서울 전도 집회에 총동원되었다. 심지어 의료 선교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아비슨이 맡고 있는 남대문(South Gate)교회에서도 전도 집회를 위한 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남대문교회에서는 전도 집회가 시작되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