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부흥에 대한 이해는 크게 조나단 에드워즈 식 부흥이해와 찰스 피니식 부흥 이해, 그리고 오순절 은사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에드워즈와 피니 두 사람이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부름 받은 시대적 상황과 오순절운동이 등장한 시기는 다르다. 에드워즈는 18세기 인물이고, 피니는 19세기 사람이며, 오순절운동은 20세기 현상이다. 약 1세기 씩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활동하던 신학적 배경도 다르다. 에드워즈는 칼빈주의가 강하게 지배하는 시대적 환경에서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쓰임 받았고, 찰스 피니는 수정 칼빈주의 혹은 알미니안주의가 강
이후 무디의 후계자 토레이(R. A. Torrey)와 시카고 화이트 스토킹 구단의 야구 선수 출신 윌리엄 빌리 선데이로 대변되는 20세기 초엽 미국 부흥운동, 영국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이 땅의 부흥을 꿈꾸며 일생동안 부흥을 외쳤던 로이드 존스로 대변되는 근대 칼빈주의 부흥이 있었지만 이전의 부흥과는 비견할 수 없는 부흥이었다. 그러다 1957년 뉴욕집회를 통해 전 미주 지역 부흥운동을 견인한 빌리 그래함의 출현은 미국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1950년대 민족의 위기 가운데 민족적 영적각성이 있었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여러 곳에서 놀라운 영적각성이 발흥했다. 이반 로버츠로 대변되는 1903-04년의 웨일즈부흥운동, 웨일즈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발흥한 1905년 호주부흥운동, 인도 카시에서 일어난 1905-06년의 인도부흥운동, 하디와 길선주에 의해 주도된 1903-07년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 오순절부흥운동, 그리고 1908년 만주 ∙ 중국부흥운동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아마도 사도행전 이후 이 시대만큼 전 세계가 부흥을 경험한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시대의 부흥을 글로벌 리
18세기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19세기에 접어들어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에서는 부흥운동이 계속되었다. 1787년 햄프던 시드니 대학과 워싱톤 앤드 리 대학으로 알려진 버지니아의 조그마한 두 장로교 대학에서 영적각성이 일어나더니 곧 동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02년 예일대학 학생 3분의 1이 회심하는 놀라운 영적각성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 후 50년간 일련의 각성운동이 주기적으로 일어나 동부의 대학들과 교회들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1800년부터 일기 시작한 소위 2차 대각성운동은 1
17세기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좀 더 강력한 형태의 영적각성운동의 성격을 띠며 발흥했다. 아마도 이 시대 발흥한 가장 강력한 부흥운동 가운데 하나가 18세기 웨일즈 부흥운동과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일 것이다. 조지 휘필드와 하월 해리스의 웨일즈 부흥운동, 1734-36년, 1740-42년 사이에 발흥한 1차 대각성운동은 이전의 크고 작은 부흥운동이 하나로 엮어져 폭발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였다. “능력의 세례”를 받은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와 다니엘
하지만 부흥이 하나의 뚜렷한 신앙운동으로 교회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의 현상이다. 마틴 루터, 쯔빙글리, 존 칼빈, 존 낙스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은 신앙을 재발견한 일종의 영적각성운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이 아닌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하박국이 언급하고 바울이 재확인하고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이 확신했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재발견하였다. 이들이 발견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는 잠자고 있던 수많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약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교회로서 역사적 출발을 하게 되었다. 초대교회 120 문도가 주님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놀라운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였고, 구약과 신약을 잇고, 다시 신약과 교회사를 잇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단회적인 사건이냐 아니냐에
예수님이 보혜사를 약속하신대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최초의 부흥 사건이었다.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공동체에 초자연적으로 임하셨고,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이 나타났으며, 바로 그날 삼천명이 회심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널리 퍼지는 전형적인 “부흥”의 표식이 나타났다. 로이드 존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교회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신앙부흥은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 날 일어났던 것의 일종의 반복이었다. 에드윈 오(J. Edwin Orr) 역시 오순절 성령의 부으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갱신의 메시지요,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해왔다. 그는 1978년까지 250개 전도집회에서 무디를 넘어 역사상 그 어떤 설교자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985년까지 그는 자신의 전도집회와 다른 집회에서 1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거의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신앙상담을 받았다.
박해를 가했던 로마 황제들의 최후 박해를 가했던 네로, 도미티안, 하드리안,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데시우스, 디오클레티안 황제 모두 거의 예외 없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네로는 권좌에서 쫒겨나 도망을 가다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도미티안도 자신의 종들에게 살해당했으며, 하드리안도 모종의 병으로 급사했습니다.세베루스는 사악한 친아들의 배신에 의해 제거 당했고, 막시미누스는 3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난 후 폭력에 의해 죽임 당했습니다. 데시우스는 늪에 빠져 죽어 시신도 찾지 못했고, 디오클레티안은 박해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초대교회 순교 증언들 아시아에서는 첫 순교자들 가운데 서머나의 폴리갑이 있었고, 빌라델비아 출신으로서다른 12명의 사람들이 그와 함께 순교했다. 총독이 폴리갑을 설득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연로한 나이를 고려하시오. 가이사의 수호신으로 맹세하시오. 말하시오. 우리와 함께 불경을 버리시오. 그리스도를 욕하고 모독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풀어주겠소.” 그러자 폴리갑이 대답했다. “지난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어떤 해악도 끼친 적이 없소. 내가 어찌 나의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고난 가운데 피어난 복음 초대교회 교우들은 생명 걸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기독교를 멸절시키고자 온갖 박해와 고문을 가했지만 그럴수록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로마를 지배했습니다. 초대교회 유명한 라틴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자신의 (Apology) 마지막 장 55쪽에서 통치자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선한 통치자들이여, 당신들이 우리를 고문하고 괴롭히고 성가시게 해도 좋습니다. 당신들의 악함이 우리의 결백을 시험하고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고통을 당하도록 허
얼마전 세상을 떠난 한 젊은 대학생이 남긴 인터넷 상의 유서를 보고 우리 모두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젊은이의 유서를 보다 인디언 선교의 새벽별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유언이 떠오르며 다시 저의 옷깃을 여미게 되었습니다. 브레이너드는 필라델피와와 뉴저지에서 1743년부터 1746년까지 생명을 다해 인디언 선교를 하다 그만 건강을 잃고 1747년 10월 9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북서쪽 헤브리디스의 가장 큰 섬인 루이스 섬과 여러 작은 섬에 하늘의 부흥이 수 차례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하나의 부흥의 요충지였던 헤브리디스는 첫 번째 1824년 부터 부흥이 시작되어 1835년 사이에 루이스 섬 곳곳에서 부흥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때 주역은 앤드류 맥로드 목사였다.
일생동안 부흥과 성령의 기름부음을 갈망하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Dr Martyn Lloyd-Jones, 1899-1981)는 1899년 12월 20일 남웨일즈 카디프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나 영국 복음주의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폭 넓은 영향력과 많은 유익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랑게이토에 있는 트레가론 문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16세 때에 성 바돌로뮤 병원의 부속 의학교에 입학했고 나중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에반 로버츠 (Evan Roberts, 1878-1951)는 1878년 남웨일즈 러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성경과 주일학교와 가정 예배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11살 때 그의 아버지를 돕기 위해 탄광에서 20대 초반까지 일하였다. 로버츠는 어린 나이부터 영적인 일들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이 있었다. 그는 탄광에서 일하면서도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성경을 읽었다. 성경 외에도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토머스 찰스의 ‘기독교 지침’, ‘웨일즈 칼빈주의
장차 영국의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게 될 찰스 스펄전은 1834년 6월 19일 에세스의 캘버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조합교회 목사인 가정에서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던 존 번연의 영국 침례교적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스펄전은 신앙 속에서 양육되었으며 기도하는 손에 의해 길러 졌으며
부흥의 땅 웨일즈 교회는 다시 침체되어 있었고, 기도모임은 생명이 없고 약화되어 있고, 설교는 정통적이지만 별로 영향력은 없었다. 이러한 때에 1858년부터 1860년까지 웨일즈에 불어온 부흥의 불길은 1859년에 절정을 맞이하였기에 지금까지 ‘1859 웨일즈 부흥’으로 부르고 있다. 웨일즈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주역으로는 데이비드 몰간
부흥이 일어나기 전의 북아일랜드는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였다. 도시는 닭싸움하는 오락과 장날과 장례일은 술 마시는 시합, 권투 시합을 하고, 경찰 감방이 사람들로 들끊었고, 술주정꾼들이 많았다. 항상 부흥이 있기 이전 시기의 특징은 역시 생명이 없고 무섭도록 죽어 있었던 것처럼, 그 당시 교회의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갔으며, 교회들 대부분이 수년 동안
스코틀랜드의 성자 로버트 맥체인 목사 (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는 29세에 일찍 하나님 나라에 갔으며 사역한 기간은 약 7년 반 밖에 안 되었지만 약 198년이 지난 현재까지 기억되어지고 있으며 많은 크리스찬들에게 교훈과 도전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