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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Tate, Mattie Samuel(1864-1940, SP)

닉네임
이중원
등록일
2017-06-27 13:27:24
조회수
2181
첨부파일
 M0047_2105210046_이중원.hwp (3625984 Byte)
Ⅰ. 내한 선교사 총람

1. 이름 : Miss Tate, Mattie Samuel / 테이트 / 한국명 : 최마태
2. 생몰연도 : 1864.11.24. - 1940.04.12.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1892.11. - 1935. / 1936년(재입국) - 1938.
5. 연표
1864.11.24. 미국 미저리주 캘러웨이 카운티 옥스베시에서 출생
미상. 풀턴의 교단 여자대학(Synodical Female College) 졸업
미상. 교단 여재다학 졸업 후, 버지니아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
1892.06.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92.11.07. 7인의 남장로교 개척 선교사의 한명으로 한국에 입국
1894.03.19. 오빠 테이트(Lewis Boyd Tate) 목사와 같이 전주 은송리로 이사
1894.05. 동학농민운동으로 다시 서울로 철수
1895. 크리스마스. 오빠 테이트와 서울에서 군산을 거쳐 다시 전주에 정착
1896.11.19. 선교부 설치를 위한 7인 개척 선교사와 현지 답사 후, 연례회 개최
1897.03.06. 7인의 남장로교 개척선교사들이 모여 전주 선교부 설립 예배를 드림
1900.04.24. Miss Mattie Tate의 집에서 소녀 6명으로 위한 교육 시작
1907. 전주지역 여전도회(Women's Missionary Society) 조직
1907 ~ 1919. 순회전도를 담당
1924. 클라크 여사의 기념관 학교에서 교사로 사역
1935. 한국 선교사역에서 은회. 미국으로 귀국
1936. 한국 선교사로 다시 복귀
1938. 다시 미국으로 귀국
1940.04.12. 미구 미저리주 오드레인 카운티 멕시코시에서 소천하다.
6. 가족사항
1) 부모님
부(父) : Calvin Howe Tate(1813-1879)
모(母) : Mary Jane Tate(1820-1890)
2) 결혼 유무 : 미혼
3) 형제‧자매
John Thomas Miller(1842-1920)
John Scotte Tate(1842-1920)
Lewis Boyd Tate(1864-1940)


Ⅱ. 선교사 소개 : 최마태(Miss Mattie Samuel Tate, 1864-1940)

1. 한국 선교를 향한 뜨거운 열정
미국 남장로교의 조선 선교회의 첫 선발대 중의 하나인 Miss Tate(최마태) 선교사는 그의 오빠인 Lewis Tate(최의덕)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오빠 Lewis Tate는 선교 보고를 위해 일시 귀국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은자의 나라인 한국 선교를 지망하게 되었다.
오빠 Lewis가 존 언더우드와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전킨과 레이놀즈와 같이 남장로교 선교회 해외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지명을 받았을 때, 선교에 관심이 많은 네 명의 여성과 합류하였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루이스의 동생인 Miss Mattie Samuel Tate이다.
매티는 선교사로 임명이 되기 전부터, 선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풀턴의 교단 여자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버지니아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몇 달씩 공부를 하였다. 그 당시 신학교에는 여성을 입학시키지 않는 상황에서도 단기간으로 공부를 하였던 것을 보면, 그녀가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한국 선교를 향한 그녀의 오빠, 루이스의 모습을 보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우리는 추측할 수가 있다. 따라서 남장로교 선교회 해외 선교부가 한국 선교를 결정하였을 때, 오빠와 같이 한국 선교사로 결단하여 입국하였던 것이다.
이런 그녀의 한국을 향한, 한국 선교를 향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녀가 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후에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자원자가 없자 그녀는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여 사역을 지속하였다. 결국 노령으로 인하여 다시 한국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한국에 대한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2. 한국의 여성을 위한 열정적인 전도자
1892년 오빠를 포함한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 6인과 같이 입국한 매티는 오빠 루이스와 같이 순회전도사로서 사역을 하였다. 그녀가 입국한 시대의 한국은 남녀가 같은 장소에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의 전도 역시, 성(性)에 의한 제약이 많았다. 이런 사회적인 제약에서 그녀는 오빠와 같이 순회전도자로 사역을 하면서, 오빠가 접근하기 힘든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녀가 순회 전도사로 사역을 하면서, 그녀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을 하였다. 그녀는 남자 순회 전도자와 동일하게 움직였으며, 동일하게 사역을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외국인 여성, 그것도 미혼의 여성이 한국 시골에서 사역을 하였기에 밤에도 그녀를 비롯한 여성 순회 전도자는 쉴 수가 없었다. 순회 전도자로서의 역할은 그녀가 50대인 중반인 1919년까지 지속되었다. 심지어는 1914년까지는 그녀가 유일한 호남 지역의 여성 순회 전도자였다.
순회 전도만이 그녀의 업적은 아니였다. 그녀는 순회 전도자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한국의 여성들을 위해 전주지역 여전도회를 직접 조직하기도 하였다.

3. 열정적인 교육자
순회 전도자로서 사역을 하던 그녀는, 한국 여성을 위한 고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결국 7인의 선발대인 전킨과 레이놀즈 부부가 교사가 되어 ‘선지자들의 학교’를 1899년 전주에서 진행하였다. 이들은 성경 공부를 진행하면서 더 심화된 교육과정이 필요함을 절심히 느꼈고, 세 가지 형태의 성경공부반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매티와 같은 여성 순회 전도자들은 시골 교회에까지 가서 성경을 전달하고,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매티의 사역은 초기부터 여성을 위한 교육을 중심이었다. 전주 선교부가 설립된 이후, 그녀가 신경을 써서 한 일은, 한국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6명의 한국 소녀를 대상으로 성경 공부를 진행하였고, 이 모임이 지금의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순회 전도사의 사명을 다한 후에도 그녀는 주일학교, 성경공부반 그리고 성경학원에서 열정적으로 여성을 가르쳤다. 이런 매티의 사역은 호남 지역 선교의 시초이며,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작성일:2017-06-27 13:27:24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