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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Moffett, Howard Fergus(1917-2013, NP) / Moffett, Margaret Mackenzie

닉네임
이화목
등록일
2017-06-27 15:22:57
조회수
2236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03_2011210050_이화목.hwp (378368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 Moffett, Howard Fergus / 마펫 / 한국명 : 마포화열(馬布和悅)
2. 생몰연도 : 1917. 8. 16 - 2013. 6. 2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1948 - 1992.
5. 연표
1917.8.16 한국 평양 출생
1923~1935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고등과 수료
1935~1939 미국 휘튼대학 졸업
1939~1943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 의과대학 졸업
1944~1947 미국 해군 군의관 근무 및 제대
1947 미북장로회 파송 선교사로 중국에 도착
1948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대구 동산병원에서 의료활동을 통한 선교사업
1950 한국전란 시 주한 미 5공군 군의관 근무
1950 9.28 수복시 평양에 입성하여 북한교회의 재건 노력
1953.9 제대 후 귀국하여 의학공부
1956 재내한,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
1959 동산병원장에 취임, 이후 이사장 역임. 1976년까지 대구동산 기독병원장 역할 수행
1976~1992 계명대학교 이사장 및 동산의료원 협동원장
1993 미국 카펜테리아로 아내와 함께 이주.
2013.6.2 카펜테리아에서 하워드 마펫 소천

6. 가족사항
부인 : Moffett, Margaret Mackenzie 1915-2010

Ⅱ. 선교사 소개 : 마포화열(Moffett, Howard Fergus)

1. 마포삼열의 아들 마포화열
마포화열의 아버지는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마포삼열 선교사이다. 마포화열은 마포삼열의 4남으로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평양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35년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갈 때까지 약 18년을 평양에서 성장했다.
마포삼열의 선교사역은 고난과 핍박 속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선교사였고, 7명의 수세자로 시작된 선교가 1천교회 10만 성도로 자라나는 부흥의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하여 조선 사람 사랑을 자연스럽게 배웠고 선교의 열정을 그대로 전수받아서 교육을 마친 후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학교를 통해 지도자를 키워내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 헌신했다면, 마포화열은 병원을 통해 환자를 사랑하고 섬기며 의료선교사로서의 일생을 살았다.

2. 6.25 전쟁에 참전한 마포화열 마포화열은 1948년 북 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펫은 참전하게 된다. 1953년 9월까지 복무한다. 유엔군이 1950년 10월 평양을 점령한 지 이틀 정도 안에 선교사들이 평양에 도착했다. 그 중 한 명이 당시 공군 소령으로 임명된, 마포화열이었다. 그는 이전에 해군으로 근무했던 적도 있었지만, 6.25 전쟁에 맞추어 자원하여 입대하고, 공군 소령. 군의관으로 임명된다. 그는 미 제 5 공군에 소속되었다. 그는 공군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플로리다 탬파에 있는 MacDill 공군 기지 병원에서 1952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이후에 그는 휴가 허가를 받고 선교사의 일원으로 더 심화한 의학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선교의 첫 멤버로, 1950년 10월과 11월에 UN군이 도시를 점령하였을 때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가 평양으로 와서 처음 한국인을 보고 무엇이라고 물었는가 하면 ‘당신은 기독교인 입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그 한국인이 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나는 마 목사에게 세례받았어요. 여기서 마 목사는 마포삼열,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그는 1952년 2월까지 군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는 대동강 너머의 가설 활주로에 착륙한 후에 도시 전체를 돌아보았다. 그가 그의 아버지를 기억하여 한국인이 세운 건물에 방문하였을 때, 그는 한 사람이 문 저편에서 사다리 위에 서서는 콘크리트 평판을 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남자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일본인들이 얼룩지게 만든 Moffett 기념비의 시멘트를 깨고 있다고 말하였다. 모펫은 그가 마포삼열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자 즉시 그 남자가 사다리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앞에 꿇어 엎드리고 그의 이마를 땅에 대면서 인사하였다고 한다.

3. 의료선교사 마포화열
대구 동산 기독병원의 최초의 이름은 제중원이었다. 동산 기독병원은 대구지역에서 처음으로 서양의술을 펼치며 근대화를 일으키고, 오랜 세월 대구에 서양문화를 보급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구 지역의 복음화의 중심 기지였다.
6.25 전쟁 이후 마포화열은 대한민국 땅에 수많은 고아와 과부들을 보게 된다. 마포화열은 밥 피어스가 희사한 5만 달러의 기부금에 ‘유엔 한국재건단’과 ‘주한미군 대한원조처’의 원조를 받아 1953년 10월 아동병원을 준공하였다. 그러면서 고아들을 무료 입원치료 하게 된다. 아동병원 설립 후 1955년 10월에 건평 655평의 3층 건물 외래진료소와 인턴 기숙사, 식당 및 부속건물 등을 신축하여 병원 재건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입원실이 200병상으로 확장되어 전문과를 모두 개설하여 비로소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의료 기관 및 협회에서 Roy K. Smith가 관리자로 지명되었고 유순애가 간호 훈련 학교의 관리자로 세워졌다. Miss Lawrence는 간호사의 관리자로 세워졌다. 마포화열은 1949년 병원 직원을 132명으로 늘렸다. 여기에는 14명의 의사와 7명의 인턴 의사, 22명의 졸업한 간호사, 17명의 학생 간호사가 포함되어 있다. 직원 모두는 기독교인 이었다.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1,246명의 입원 환자가 있었다. 18,153명의 외래환자가 총 61,979번의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정기적인 채플이 드려졌고 원목이 있었다.
마포화열의 의료 선교 특징을 보면 본인이 의료선교사로서 직접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보다는 병원장으로서 병원 경영을 통하여 선교했다는 것이다. 그의 공헌 중 단연 최고의 공헌은 병원을 현대화하고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병원 경영과 모금을 통하여 최신식 병원 건물과 의료장비의 최첨단화 하는 한편, 6.25 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난 환자 진료와 병원 발전을 위해, 의사와 직원들을 미국에 유학시켜 해외 선진의학과 경영을 배우도록 하였다.
특별히 마포화열은 교육에도 앞장섰는데, 그의 교육선교는 동산 기독병원 안에서 이루어졌다. 즉 병원이 필요로하는 의료진을 양성하고자 교육에 앞장선 것이다. 그는 우선적으로 동산 기독병원이 필요로하는 간호사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간호학교를 재건하였다. 그리고 1958년 임상병리기사 양성을 위해 병리기술학교를 세웠다. 마포화열의 교육선교의 정점은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계명대학교와 동산 기독병원을 병합하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재출발하면서 의과대학을 신설한 것이다.

4.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마포화열
마포화열은 6.25 이후 참혹한 한국 땅의 현실을 보며, 특별히 고통받는 어린아이들에게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도움과 모금으로, 아동병원을 짓고 고아들을 무료로 치료해준다. 그는 미국에 있는 후원자에게 선교편지나 동산 기독병원의 소식지인 ‘News Letter'를 통하여 도움이 필요한 고아들의 형편과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또한 돈이 없어서 치료 받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이 찾아오면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다.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고, 가난한 재활환자들을 위한 재활 호스텔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준 결과 마포화열의 자녀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무료로 치료를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찾아와서 감사를 표현하는 일도 있었다. 마포화열의 둘째 아들 찰스의 증언이다.

“5년 전(2010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60대 남자분이 절 찾아왔습니다. 전신 화상을 입고 치료비가 없을 때 아버지가 다섯 달 동안 무료로 치료해 주셨답니다. 당시 고마워서 사과 몇 개를 아버지께 드렸다면서 제게 제주의 생수를 감사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물 맛이 참 맛있었습니다.”

마포화열은 무의촌 무료진료도 실시하였고, 대구 지역의 여러 기독교 기관들을 여러모로 도왔다. 특별히 대구 YMCA를 도운 기록이 대구 YMCA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5. My home is Daegu. 대구는 내 고향, 나의 집
마포화열은 평소에 늘 ‘45년간 대구는 나의 고향이었고,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의 고향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나는 한국사람이며, 나는 영원히 대구에 잠들고 싶습니다.”라고 자주 말하였다고 한다.

6. 마포화열의 복음선교
마포화열에게 있어서 의료선교는 복음전도를 위한 한 수단이었고 도구였다. 마포화열은 전도회를 조직한 후 원내전도, 원외전도, 해외선교로 나누어 복음전도에 힘을 내었다.
먼저 존슨은 병원을 찾아온 환자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전도서적도 팔았다. 존슨 후임이었던 플레처는 남문안교회의 박덕일 장로를 전도사로 초빙하여, 입원환자, 내원환자를 상대로 전도하도록 하였다. 홍순화 부인도 섭외하여 여자를 상대로 전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환자들은 기독교에 호감을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복음이 대구지역에 확산되게 된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또한 마포화열은 동산 기독병원에 방송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모든 병실에 방송시설도 갖추었다. 동산 기독병원의 의료진들은 병원 내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하고, 동산교회라고 이름을 지어 교회를 시작하였다.
대구 동산 기독병원의 의료선교는 대구, 경북 지역민들에게 기독교의 이미지를 재고하게 하는 결정적 동인이 되었고, 외과술의 효능에 의한 치료는 서양 의사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이어졌고 그것은 결국 그들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심리적 저항을 사라지게 하였다. 대구 동산 기독병원 전도회는 각 전도대들을 조직하고 전도 활동에 힘썼다. 또한 이 전도회는 해외로 선교를 파송하기도 하였다. 1958년 봄에 태국으로 두 선교를 파송하며 복음전도의 활동에도 큰 관심과 힘을 쏟았다. 1973년부터는 일본 선교도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일본 선교도 시작하였다.

7. 마포화열의 아내 Moffett, Margaret Mackenzie
마포화열은 1935년에 휘튼대학에 진학하였다. 마포화열은 휘튼대학 재학 중에 형 사무엘의 소개로 마가렛 매켄지를 만났다. 매켄지의 어머니는 휘튼대학의 설립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교육자였다. 두 사람은 사무엘 마펫의의 소개로 만나서 기독학생운동을 같이하였고, 그들은 장래 희망이 일치하고 취미가 같아서 금방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들은 1939년에 함께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마포화열은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했고, 매켄지는 휘튼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1년가량 YMCA의 소녀부 사업을 돕다가, 1940년부터 1943년 사이에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 분야의 책임자로 유명한 아이비 박사의 비서로 일을 하면서 마포화열이 의학 공부를 하도록 도왔다. 그들은 1941년 8월 2일 휘튼대학 교회에서 결혼하였다.
메켄지는 그의 남편 마포화열이 미 공군 군의관 장교로 한국에 있을 때에 Karuizawa에 1년간 거주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1952년 2월 마포화열의 휴가 때까지 나고야에서 지냈다.
메켄지는 마포화열의 최대의 후원자였고 조력자였다. 헌신적으로 옆에서 남편을 도우며, 함께 선교를 감당하였다. 메켄지는 마포화열에게 최고의 비서였다. 평소에도 마포화열은 아내 메켄지를 탁월한 비서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늘 꼼꼼하고 세심한 그녀는 사람들을 배려했고 특별히 내가 많은 일로 힘들었을 때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도록 충고해 주었고 무엇보다 병원과 여러 일에 대해서 빠뜨림 없이 체크해 주었다.”

마포화열과 메켄지는 한국의 모든 사역을 끝내고 1993년 1월 15일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 L.A 북쪽에 있는 카펜테리아에서 살았다.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다가 메켄지는 2010년 1월 20일 향년 94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났다.
작성일:2017-06-27 15:22:57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