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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Switzer, Martha(1880-1929, NP)

닉네임
남주영
등록일
2017-06-29 17:41:20
조회수
2243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50_2015210157_남주영.hwp (2263040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Switzer, Martha (스와이처 / 한국명: 성마리태(成馬利太) / 미국 / 미북장로회)

2. 생몰연도
1880년 8월 22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에서 출생
1929년 4월 3일 소천

3. 출신 소속
NP (미북 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911년 ~ 1929년, 총 18년

5. 연표
1911월 12월 11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대구선교부에 소속되어 교육 사업에 종사
1912년 대구여자성경학교 설립 및 교장으로 봉직
18년 동안 대구, 부산 등지의 개척선교에 헌신
1929년 4월 3일 과로로 소천

6. 가족사항 : 없음


Ⅱ. 선교사 소개

1.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를 위해 헌신한 사람
스와이처는 1880년 8월 22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뉴욕에서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했고, 시카고에서 무디 성경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스와이처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교의 비전이 그녀의 신앙심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해외선교사로 자원하여 선교사로 임명 받고 1911년 12월 11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대구 선교부에 소속되어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했고, 1915년부터 버그만(Miss Gerda O. Bergman)과 함께 짝이 되어 일하였다. 18년 동안 대구·부산 등지에서 개척선교에 헌신한 뒤 1929년 4월 3일 과로로 별세하였다.

스와이처는 분명 자신을 위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연고지도 없는 한국 땅에 복음 전도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스와이처가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 땅에 헌신할 수 있었기에 대구 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

2. 아낌없이 주는 나무
스와이처는 한국선교에 있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한국 선교를 위해 바쳤다. 자신은 자비량 선교사로서 아무 지원도 없이 사역을 감당했다. 대구-경북 지역 선교 활동 기간 중 자기 재산을 여성 교육 선교에 사용했다.

그녀는 여러 교회에 자신의 돈을 지원하여 그 교회로 하여금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왔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첫째, 1916년 아담스 선교사가 동사목사로 겸임으로 섬기고 있을 때 대구 범어, 침산 교회에 오르간을 구입하도록 헌금했다. 둘째, 1917년 대구 신정교회가 남녀연합전도회를 조직하고, 유년 주일학교 지부를 횡정구(橫町區)에 설립할 때, 교실로 사용하도록 집 한 채(3칸 초가집)를 사서 증여함으로서 신정교회의 복음 전도와 교육의 활성화에 이바지 하였다. 셋째, 1920년 상주 보성여자학원과 부인야학교 설립을 위해 헌금하였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尙州 西町敎會 普成女學校와 婦人 夜學을 爲하여 大邱 宣敎師 婦人 成 마르다가 金 200圓을 寄附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 넷째, 1926년 경북 달성군 범어동교회의 야학교 운영을 위하여 전도부인(송명숙)의 파송 비용을 부담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스와이처는 여자 고등 성경 학교를 위해 자신의 재산 중 천 달러를 기부했다. 이 기부에 4천 달러가 더해져, 5천 달러로 여자 성경 학교 설립 기금 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와이처는 자신의 재산을 한국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썼다. 스와이처의 아낌없는 사랑의 지불 때문에 대구 지역 가운데 복음의 은혜가 흘러갔다고 생각된다.

3. 대구에서 처음으로 순직한 처녀 선교사
스와이처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순직한 쳐녀 선교사이다. 자신의 삶을 복음 전도를 위해 드렸던 선교사였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49세의 나이로 밀알이 되어 대구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녀가 남긴 유증(遺贈) 재산은 대구. 경북 지방의 부인전도사업을 위하여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구체적 사례로 첫째, 대구 남산교회 안에 설립된 명도여자학원(冒女子學院) 설립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일본 나고야 한인교회를 위하여 선교사(전도부인 姜聖淑)를 파송하고 3년간의 체재비용을 지원하였다. 셋째, 1930년 평양 부인성경학교 운영을 위한 기금으로 1,000 $이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그의 유증 재산은 가난한 부인들을 위한 교회 내 야학교 설립 기금 등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서 선교사업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4. 탁월한 성경교사
1902년 자료는 말하길, “그 여자들의 교실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여섯 명의 여자와 두 명의 소녀가 70에서 100리와 20리(리는 3마일과 같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등에 아기를 업고 걸어와서 참석했다고 기록한다.

스와이처는 16개의 성경 수업을 가르쳤다. 스와이처는 무디 성경 학교를 수료하였기 때문에 성경을 잘 가르쳐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스와이처는 준비된 선교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스와이처를 미리 준비시키셨고, 그녀를 통해서 한국 땅에 성경의 진리가 전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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