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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Miller, Frederick Scheiblin(1866-1937, NP) / Miller, Anna Reinecke; Dean, M. Lillian; Doty,

닉네임
박상우
등록일
2017-06-30 04:05:45
조회수
3189
첨부파일
 M0027_2015210022_박상우.hwp (1355264 Byte)
Ⅰ. 기본사항

[밀러 선교사 / Miller, Frederick S.]
1. 이름: Miller, Frederick Scheiblin / 밀러 / 한국명: 민노아(閔老雅)
2. 생몰연도: 1866-1937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92.11.15-1937.
5. 연표
1866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출생
1889 피츠버그대학 졸업
1892 유니온신학교 졸업
1892.11.15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1893. 1 예수교학당(→경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노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방침대로 발전시킴
1894 도산 안창호가 학교에 입학하였고, 세례를 줌. 1897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냄.
1895 서울 연못골일대 전도하며 연동교회의 기초 마련
1897 선교부의 결의로 민노아 학당 문 닫음. 황해도로 갔다가 충청도 전도사업에 종사
1898 출산한 첫아들을 8개월 만에 잃음
1900 김흥경과 함께 청주의 시장어귀와 조치원에서 노방전도 실시 시작
1902 출산한 둘째아들을 하루 만에 잃음
1902 장로회 감리회 연합 찬송가 제정을 위한 통합공의회 찬송가 위원으로 위촉
1903. 6. 17. 부인 안나 사망
1904 연례모임에서 밀러가 충청지역 선교기지개설작업에 전적으로 착수토록 결의
1904 도티와 재혼
1905 3. 12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의 정례모임 시작으로 기초를 닦기 시작
1905. 6 모든 가족과 함께 청주 주역으로 이사
1905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작사
1906 탑동 야산을 구입하여 청주탑동양관(학교) 세움
1906 충북지역 큰 홍수발생, 청주탑동양관과 자신의 사택을 수재민을 위해 개방
1907. 8 청주읍교회 평균 200명 출석
1909 청주읍교회 평균350명 출석
1910 청주읍교회 예배당 증축
1911 장로교 경기․충청노회 초대 노회장 선임
1913 청주읍교회 새 예배당 건축
1931 부인 도티 사망
1931 디인과 세 번째 결혼
1932 청주읍교회 새 예배당, 목사관, 유치원, 책방, 집회실 건물 건축
1936 정년 은퇴후 필리핀, 중국 여행하고 청주로 다시 귀환
1937. 10. 6 사망
6. 가족사항
Miller, Anna Reinecke (부인)
Doty, Susan A.(부인)
Dean, M. Lillian (부인)
Miller, Fred(아들)
Miller, Frank(아들)
Miller, Lisette(딸)
Miller, William. N.(아들)
Miller, Ana E.(딸)

부인: [안나 선교사 / Miller, Anna R.]
1. 이름: Miller, Anna Reinecke / 안나
2. 생몰연도: 1865.1-1903.6.17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92.11.15-1903.6.17
5. 연표
1865 미국 출생
1892.11.15 북장로교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내한
1982 연동여학교(현 정신여고) 교사로 부임
1898 출산한 첫아들을 8개월 만에 잃음
1901 가을에 이질에 걸려 식사를 잘 하지 못함
1902 출산한 둘째아들을 하루 만에 잃음
1903.6.17 복막염으로 사망
6. 가족사항
Miller, Frederick Scheiblin (남편)
Miller, Fred(아들)
Miller, Frank(아들)

부인: [도티 선교사 / Doty, Susan A.]
1. 이름: Doty, Susan A. / 수잔
2. 생몰연도: 1861-1931.11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90.1-1931.11
5. 연표
1890.1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1890 정동여학당(→정신여고) 3대 교장으로 13년간 재직, 정규 중등학교로 발전시킴.
근대한국여성교육의 기초 다짐
1904 밀러와 결혼 후 청주로 옮겨 충청도지역의 선교확장
1907 13명의 여학생과 함께 여학교를 시작함
1908 안나 도리스와 함께 사역함
1909 목요일반에 평균 35명이 됨
1909 안나 도리스가 사임함, 그레이스 데이비스와 함께 사역함
1915 그레이스 데이비스가 사임함
1918 간호사 엘라 레이너와 페이 에드거컨과 함께 사역함
1919 엘라 레이너가 사임함
1920 페이 에드거턴이 사임함
1921 릴리언 딘과 올가 존스와 함께 사역함
1922 릴리언 딘과 올가 존스가 사임함
1930 북장로교선교회가 40년 사역에 대한 경의를 표함
1931.11 사망
6. 가족사항
Miller, Frederick Scheiblin (남편)
Miller, Lisette(딸)
Miller, William. N.(아들)
Miller, Ana E.(딸)

부인: [딘 선교사 / Dean, M. Lillian]
1. 이름: Dean, M. Lillian. / 딘 / 한국명: 천미예(千美禮)
2. 생몰연도: 1886-?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6-1952
5. 연표
1916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1916-20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사업에 몰두
1919 3.1운동 적극지원, 애국부인회 집회장소 제공
1921-22 청주지역 도티의 여학교에 교사로 제직
1931 밀러와 결혼
1932 청주여자성경학원 교장으로 부임
1937.10.6 남편 밀러 사망
1938 본국으로 귀국
1939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활동
1952 은퇴후 귀국
6. 가족사항: Miller, Frederick Scheiblin (남편)


Ⅱ. 선교사 소개: 밀러(Frederick S. Miller, 1866-1937)

1. 한국으로의 준비
밀러(Frederick S. Miller)는 1966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에서 의사인 아버지 W. M. Miller와 어머니 Susan Walker사이에서 태어났다. 모두 7남매(4남3녀)였는데 2명이 의사 2명이 목사가 되는 등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피츠버그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체육관에서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디의 영향으로 발생한 세계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VM: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을 받았다. 1889년에 피츠버그대학을 졸업하고, 1892년에 유니온신학교(뉴욕)를 졸업하였다. 그는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오기로 결정하였고 졸업한 바로 그 해인 11월 15일 26살 젊은 나이에 아내 안나(Anna Reinecke, 당시 27세)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내한한다.

2. 민로아 학당 운영
밀러는 2달 정도 마펫과 언더우드과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 후 언더우드가 설립하고, 마펫(S.A.Moffett)이 운영하고 있던 예수교학당(현 경신학교)의 책임자로 1983년 1월에 부임하게 된다. 그 후 밀러는 학교이름을 “민노아 학당”으로 고친다. 그리고 학급 편성을 보통반과 특별반으로 나누는 등 자신만의 교육방침으로 학교 교육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여 나간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 선교정책이 교회설립을 통한 복음전도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히 밀러의 교육사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소홀해지게 된다. 이에 그는 강력하게 선교본부에 강력한 건의문을 보내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임자 마펫이 계획했었던 직업교육을 구체화하여 경영학을 비롯한 제재(製材), 공예(바구니 제작)등의 실업교육을 실시, 학생들 스스로 학비를 마련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던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전쟁에 승리하게 된다. 이것은 청나라를 일본보다 월등히 강국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국 청년들은 일본의 승리가 서양식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서양학문에 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에 민노아학당의 학생 수는 15명에서 46명으로 급증하게 되었고 그중 15명이 기숙사생활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도산 안창호도 16세의 나이로 자발적으로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지내며 3년간 공부하고, 반년간 조교로 근무하며 밀러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안창호는 이 학교에서 한글, 서양학문, 성경을 배웠고, 학교에 입학한지 10일 만에 밀러에게 세례를 받는다. 또한 밀러의 총애를 받아 그의 주선으로 1897년에 미국 유학을 하게 되고,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날 밀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 10월에 선교회의 결의로 학교는 폐쇄된다.
밀러의 헌신적인 교육사업은 한국의 독립과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안창호와 같은 인물을 길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국 밀러는 한국의 독립과 교육을 비롯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3. 연동교회의 기초를 닦다
밀러는 이러한 교육사업과 동시에 1895년 이후부터 조사 김흥경과 함께 서울 연못골 일대에서 협력전도를 펼친다. 이로 인해 신도들이 점차로 일어나게 되어 연동교회가 설립되게 된다. 결국 밀러는 연동교회의 설립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연동교회는 게일이 담임하여 목회를 하였지만 밀러가 청주지역에서 올라왔을 때, 게일과 교회 업무를 나누어 맡기도 하며 연동교회의 사역에 협력하곤 하였다.

4. 충청지역 선교의 아버지, 밀러
1897년 민노아 학당이 선교부의 결의(교육등한정책)에 따라 문을 닫게 됨으로 밀러는 황해도 지역 선교목사로 잠시 전임되었다가 다시 당시 복음전파의 사각 지대였던 경기 동남쪽과 청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일대의 전도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1900년에 김흥경(金興京)과 함께 청주의 시장어귀와 조치원에서 노방전도를 실시하였고, 많은 결신자가 발생한다. 이에 청주에 선교부를 설정해야 함을 건의하였고 이것이 관철되었다. 1902년, 미북장로교선교부는 충청북도에 선교기지를 개설하기 위한 본격적 노력을 시작한다. 1904년에 연례모임에서 밀러가 경기도 사역에서 벗어나 새 선교기지개설(충청지역) 작업을 맡을 것을 결의했다. (이때 밀러의 상황은 1903년에 아내 안나와 사별 한 후, 다시 1904년에 연동여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도티 재혼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밀러는 아내 도티와 딸 리제트(Lisette)와 함께 1905년 6월에 청주지역으로 완전 이주한다. 이때 밀러와 함께 충청지역에 복음을 전했던 김흥경(金興京) 장로도 함께 청주로 이주하였다. 밀러가 초기 선교기지를 개척할 당시 자금이 부족하여 밀러와 초기 선교기지 회원들은 개인 돈으로 초기 부지의 절반과 교회 및 학교 부지를 구입했다. 후에 미국에서 온 기금으로 상환 받았다.
1905년 3월 12일에 청주 땅에 최초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의 기초를 닦기 시작한다. 남자10명 여자 4명, 그리고 몇몇 소년들과 정규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1907년 8월에 평균 200명의 출석했고, 2년 후에는 350명이 모여 예배하였다. 1910년 예배당을 500석으로 증축하였고, 1913년 교인 중 신씨부인과 부도지사의 기부와 세브란스의 건축비 기부로 새 예배당 건축한다. 1932년에는 젊고 부유한 비기독교인 민씨의 500달러를 기부, 교회 청년회 회원들과 선교기지의 250달러를 기부함으로 새 예배당, 목사관, 유치원, 책방, 집회실 등을 짓게 된다. 이 교회는 청주지역 선교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밀러는 청주 외에 시골지역으로 들어가서 순회전도를 하며 선교활동을 펼친다. 특히, 그는 홍주의 최초의 선교사로서 박씨 형제 집에 머물며 전도하고, 단기 성경반을 진행하여 복음을 전한다. 뿐만아니라 홍주를 오는 길에 온양이라는 마을에서 전도하고 전도책자를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한다. 이렇게 밀러는 충청도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펼쳤고, 그의 노력으로 홍주 최초 교회인 간동장로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1909년에 지역분할 선교정책으로 밀러의 선교지역은 북부지역이 된다. 이에 간동장로교회는 공주에 선교부를 두고 활동하던 감리교 스웨어러 선교사에게 이양되어 오늘날 홍성제일감리교회가 된다. 밀러가 설립하였거나 시무한 교회가 청주신대교회, 청원북일의, 묵방리교회, 북일 화죽리교회(1921), 송파교회(1922) 등이 있다.
밀러는 충청지역에서 교육사업도 활발히 진행한다. 1904년 처음 밀러가 청주에 도착했을 때 읍에서는 이미 가장 유능한 젊은 남자들이 남학교를 운영되고 있었다. 밀러는 보부상 조합에게서 기와집을 구입하였는데, 그 청년들이 그것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그것이 보통학교로 발전하였다. 학교를 개설한 이 청년들 중에 일부는 훌륭한 가문의 출신으로서 기독교인들이 되었다. 1906년부터는 카긴(E. Kagin)선교사와 함께 탑동 야산을 당시 26원에 사들여 그곳의 나무를 베어 당시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와 의료, 교육활동, 거주를 위한 건물을 지었다. 청주 탑동 일신여고 안에 있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청주탑동양관(충북유형문화제 133호)이 바로 그때 지어진 건물이다. 1906년에 충북지역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밀러 선교사는 학교 건물과 자신의 집을 개방해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위로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 모습을 본 많은 주민들은 복음에 마음을 열게 되어, 믿음을 갖게 된다. 밀러는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청서학교, 청북학교 일신학교, 민노아성경학교 등 청주지역에만 6개의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실시했다. 1909년에 시골지역 교회들에도 7개의 보통학교에 총118명이 등록, 2년 후에는 6개의 보통학교에 총140명이 등록하였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밀러는 소민병원을 설립하는 등 청주지역의 의료선교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1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노회장으로도 활동함으로 충청지역의 노회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1936년 충청지역의 선교에 착수한지 44년 만에 정년 은퇴를 한다. 밀러 부부는 은퇴를 기념하여 필리핀과 중국의 남부 지역을 여행하고 다시 노후를 바쳐 선교사업을 돕기 위해 청주로 돌아온다. 그러나 밀러는 이듬해 1937년 10월6일 71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밀러는 충청지역 선교의 개척자로서,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지역의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는 일 뿐만 아니라 교육사업과 서양문화 보급에 평생을 바치고 자신이 사랑한 청주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한국 충청지역을 사랑한 충청지역 선교의 아버지라고 평가 할 수 있다. 그의 묘비는 일신여고 양관 앞에 세워져 있다.

5. 찬송가 제정을 위한 노력
1902년에 장로회 감리회 연합의 찬송가 제정을 위한 통합공의회 찬송가 위원회의 위원으로 사역한다. 그의 음악적 재능으로 찬송가 편집위원으로서 많은 찬송가를 번역하고 작사하였다. 그는 초기에 한국교회가 부르는 찬송가를 약 40편의 곡을 다듬어 번역하였고, 그 중 23편이 초기 찬송가에 수록될 정도로 큰 활약을 하였다. 또한 현재 찬송가에 실린 “예수님은 누구신가”(96장), “주의 말씀 듣고서”(204장), “맘 가난한 사람” (427장), “예수 영광 버리사”(451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588장)등 5개 곡은 청주에서 밀러가 작사한 것이다. 또한 그가 작사한 찬송은 어린이 찬송가에도 실려 있다. 그는 이렇게 한국 기독교 찬송가 초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여 한국교회음악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6. 문서사역
도티의 편지를 보면, 밀러가 그리스도신문과 관련된 업무와 소책자『기도에서 고려해야 할 것』, 『주의 만찬』, 『포도주마시기』, 『기대코너』, 『등대지기의 딸』등의 책을 번역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문학작품에 관한 수업을 했고, 환자들도 돌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밀러는 문학적 재능도 가지고 있어 꾸준하게 번역과 글을 남겼다. 그는 어느 선교사보다도 많은 복음서를 번역하였고, 금주와 금연에 관한 소책자도 배포하는 등 “소책자의 사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밀러는 나이가 들면서 많은 시간 동안 건강이 좋지 못했을 때,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문서사역에 전념하였다. 전도지, 한국소설, 미국교회 간행물의 기사들을 쓰고 잡지(Korean Broadcasts of the Mission) 등을 편집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에 한국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을 알리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저서 “Our Korean Friends", "Korean Young People" 등이 뉴욕 레벨(Revell)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밖에 밀러의 서적 목록에는 40여 편의 제목들이 기록되어 있고, 30여 편의 비평서 성경연구 논문이 있으며, 일찍이 장로교에서 가장 정평이 있는 잡지인 “신학지남”에도 “이사야 강해”, “가정교육 방책” 등 다수의 글들이 게제 되어 있다.
이렇게 밀러는 문서사역을 통해 한국을 미국에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좋은 책을 읽음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신앙 성장할 수 있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작성일:2017-06-30 04:05:45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