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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Ross, Lilian(1900-1993, NP)

닉네임
신영준
등록일
2017-06-30 08:13:30
조회수
2405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37_2015210032_신영준.hwp (16896 Byte)
Ⅰ.기본사항
1. 이름: Ross, Lillian / 로스 / 한국명: 노일연
2. 생몰연도: 1900.11.30.- 1993 부산에서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NP
4. 한국선교기간: 1926.9.28. - 1980년대 초(1966년 은퇴 이후 사역 지속)
5. 연표
1900.11.30. 부산에서 출생
1903. 4 선천으로 이사
1917 평양외국인학교 졸업
1922 파크대학 졸업
1924 휴론대학 졸업, 가정학 학사학위 취득
1926 미국장로회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 성서 연구
1926.9.28.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1932까지 황해도 재령, 평북 강계에서 활동
1934-40 성경학교 교사로 재직
1940 평양에서 활동
1941.9 기도문사건
1941.10.6. 기도문사건으로 강제 출국
1941.11.17 중국 상해를 거쳐 필리핀에 도착
1945. ? 해방 후 재내한, 대구지역에서 구제사업에 주력, 한 때 일본 교토 부근의 한국인
교포를 위한 선교사업
1950.10.28. 평양 방문하여 평양교회 복구사업
1951.3 노모의 병환으로 일시 귀국
1954. 6.16 노모 별세
1954 대구에 귀임, 경북고등성경학교 교장
1966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임기 완료, 은퇴 후에도 병원선교, 농어촌교회,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
1980(?) 년대 초반 귀국
1993 양로원에서 별세
6.가족사항: Ross, Cyrill(부), Ross, Susan Shank(모)


Ⅱ.선교사 소개
1. 선교사 2세로 부모님의 선교사역을 이어감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사 릴리안 로스(Lillian Ross, 노일연)는 1900년 11월 30일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초대 평북노회장을 지낸 아버지 시릴 로스(Cyril Ross, 노세영)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산을 거쳐 선천과 강계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으로 파견된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만주에서 전도활동을 하며 부인성경반을 조직하기도 했다.
의사인 어머니(Ross, Susan Shank)는 1902년에 대구에서 잠시 의료선교를 하다가 남편이 평북지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선천으로 이주함에 따라 이듬해에 딸과 함께 선천으로 이주하여 서양의술을 소개하였고 많은 환자를 돌보며 복음전파에 기여하였다.
1917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릴리안 로스는 그 후 미국에서 대학과 신학교를 마친 후 1926년 9월 선교사로 파송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 일제 치하 사역 초기
릴리안 로스 선교사는 황해도 재령과 평북 강계, 그리고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에 종사하였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평북 강계에서 여전도회를 조직해 2대 회장(1928~1929)을 역임했다. 또한 경북연합회의 고문으로도 5~6년간 봉사했으며 이에 대한 공로로 여전도회전국연합회 50주년 기념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녀는 황해도 재령에서 5년간, 평양과 강계에서도 10년간 선교 활동을 했다. 그녀가 강계에서 1934~40년에 성경학교 교사로 있는 동안 그 학교의 평균 출석 인원은 남자 50명, 여자 60명이었다.

3. 일제에 말기 강제추방, 해방이후 사역
세계 제2차 대전 당시에 일제에 의해 한국에 있는 선교사 추방이 목적이 된 1941년 「세계기도의 날 사건」에 연류 되어 필리핀에 있는 일본군 수용소에 감금됐는데 그녀는 그 안에서도 3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했던 릴리안 로스 선교사는 해방 이후 다시 돌아와 대구에서 박우만 선교사가 설립한 성경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농어촌 교회 사경회를 인도했다.

4. 6.25 이후 사역
그녀는 특별히 가난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구제사업에 주력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 잠시 평양이 수복되었을 때는 그곳에 머물며 평양교회의 복구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6.25 후에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전쟁미망인을 위해서는 모자원을 경영했다.

1951년 어머니(Ross, Susan Shank)의 병환으로 잠시 귀국한 후에 1954년에 대구로 귀임하여 경북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대구에서 사역하였고, 1966년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임기를 끝낸 후에는 동산병원에서 병원선교에 힘썼다. 그녀는 계속해서 대구와 농어촌교회를 돌보며 고아원, 양로원 등에서 사회사업을 펼치다가 1980년대 초반 미국으로 돌아가 1993년 양로원에서 그 일생을 마쳤다.

5. 릴리안 로스의 업적
릴리안 로스는 평생을 선교사업과 구제사업에 바친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는 일제의 가혹한 시련을 겪고, 해방과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고를 다 겪을 정도로 한국인들과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이연옥 명예회장은 1954년 노일연선교사를 대구 피난 시절에 가깝게 지낸 적이 있는데 '여전도회100년사'를 통해서 그녀를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지만 강하게 결단을 잘 내리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 선교사의 딸로 태어나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한국인들과 역사적인 아픔을 함께 했었기 때문에 그녀의 정체성의 절반은 한국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은퇴 이후에도 계속하여 병원선교와 구제 사업에 힘썼다는 것은 릴리안 로스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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