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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ill, Harry James(미상, NP)

닉네임
유재민
등록일
2017-06-30 09:57:43
조회수
2391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65_2015210174_유재민.pdf (1654112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 Harry J. Hill / 힐 / 한국명 : 허일(許一)
2. 생몰연도 : 알 수 없음
3. 출신 및 소속 : 미국 , 북장로교
4. 학력: 1881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신학부 졸업
1883 마이애미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 취득후, 결혼
5. 한국선교기간 : 1917. 9. 27 – 1961.
6. 연표
1917. 9. 27 부인과 함께 내한, 서울에서 선교활동 시작
1920 정식으로 북장로회 선교부에 편입
1919-41 22년간 평양, 평남지역 선교에 헌신
평양 남자성경학원 원장, 평양장로회신학교 강사로 활동
1941 신사참배 반대교인들 지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송환
이후 유카탄주의 한국인 대상으로 목회
1947.7 재내한, 경북 안동에서 4개월간 활동
청주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사업 재개
1950.8 대구, 부산에서 공산군 포로 대산으로 전도활동
평양 수복때 방문하여 많은 목회자, 교인 피난 추진, 전재민 구호 위해 활약
청주성경학원 원장으로 봉직, 청주맹아학교 지원, 맹인선교
부인은 서울, 평양, 청주에서 여성중심의 선교사업 추진, 평양여자성경학원, 청주여자성경학원 교수로 활동
1961 정년으로 은퇴하고 귀국
7. 가족사항
(1)부인 : Hill, Mary Rose (생몰연도 알 수 없음)


Ⅱ. 선교사 소개: 힐(Harry J. Hill, 생몰연도 알 수 없음)

생애Hill, Harry James (허일)선교사의 생몰연도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는 1881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 후 결혼(Hill, Mary Rose)하여 그의 아내와 함께 1917년 내한하여 1961년 정년으로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2. 한국선교에 헌신을 보여준 허일선교사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한국명 허일(許一), 1917년 9월 27일 부인(Mary Rose)과 함께 내한하여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정식 북장로회 선교부에 편입된 것은 1920년이었다. 1919년부터 평양에 배속되어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까지 22년을 평양과 평남지역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는 평양 남자성경학원 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평양장로회신학교 강사로도 활약하였다. 1938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이것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할 선교사들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결국 1941년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3. 포로선교
이 후 해방되기까지 해방 후 1947년 7월 다시 내한하여 경북 안동에서 4개월 동안 활약한 후 청주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사업을 재개하였다. 1950년 6.25 사변이 나자 잠시 일본으로 피했다가 다시 전쟁중인 한국으로 나와 1950년 8월경부터 대구 및 부산에서 공산군 포로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공산군 포로들 사이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어 포로수용소 안에 자치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는데, 그는 디캠프(O. DeCamp)⦁보켈(F. Voelkel) 등과 함께 포로수용소 안의 교인 등을 방문하고 그들이 세운 수용소 안의 교회를 지원하면서 포로선교를 전개해 나간 것이다.

그는 또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 그해 10월 아담스(E. Adams)⦁캠벨(A. Campbell)⦁킨슬러(F. Kinsler) 등과 함께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고 피난 길에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4. 다방면의 선교를 보여준 허일선교사
그는 또 전제민 구호를 위해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휴전후 청주에 머물면서 청주성경학원 원장으로 봉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맹인선교에도 관심과 협력을 아끼지 않아 청주 맹아학교를 적극 지원했으며 양정신을 개인적으로 도와 그가 후에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한편 부인은 남편을 도와 서울⦁평양⦁청주에서 여성 중심의 선교사업을 추진했으며 평양 여자성경학원, 청주 여자성경학원 교수로 활약하였다. 이들 부부는 1961년 정년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Hill, Harry James (허일) 선교사 부부는 세상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얼마든지 성공하고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결코 쉬운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기록들을 보면 일제의 여러 가지 선교의 방해로 인해 다시 본국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와 동시 얼마든지 한국을 향한 선교를 포기할 수 있고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 돌아갈 수 있었지만 한국을 향한 사랑과 하니님으로부터 받은 선교사명을 그는 결코 포기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으며 마침내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열정을 보였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텐데 말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해 다방면에서 뛰어난 역할을 잘 감당한다.

4. 기타 기록사항
1) 기타 기록사항
1941년 허일선교사 국내 사역 당시, 선교사멤버(남자 4명, 여자 16명)은 경찰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Dr. J. Leon Hooper, Dr. J. LeRoy Dodds 그리고 Dr. Cahrles T. Lever는 일본 대사관과 관련된 두 개의 사건으로 워싱턴에 갔다고 외신을 이사회에 보내어 졌다.

그리고 최종 답변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이룸 붙여진 11명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즉시 떠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소당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사회는 1941년 8월 6일 11명의 선교사들(Harry J. Hill포함)가 가능한 빨리 귀국할 것으로 결정내렸으며 이를 일본에 통보했다. 집행위원회는 이 11명이 10월 1일 상하이로 갈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당시 자국으로 돌아갔던 Harry J. Hill은 Yucatan에서 한국일들과 일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2) 경상노회
1912년 12월 19일에 경상노회 제5회가 대구 남성정예배당에 회집하니 선교사 14인, 목사 3인, 장로 10인이더라, 신학검사위원의 청원에 의하여 재적생 정덕생, 김기원, 서정오, 박영조, 김성삼, 박성애, 이문주, 이만집, 최일영, 정재순, 김웅진, 박승명과 신입생 박영숙, 문덕인, 강석진, 권중해, 김인옥, 허일(許一, [Harry James Hill]), 이동태, 권경도 제군에게 천서를 사하다.

1914년 12월 30일에 경상노회 제 9회가 부산진 일신여학교에 회집하니 선교사, 목사 4인, 장로 19인이 출석 하더라. 신학생 서성오, 정재순, 박영조, 이희봉, 허일(許一, [Harry James Hill]), 임종하, 유선장, 권영해, 박덕일, 이만집, 이문주, 김충한, 박성애, 박영숙, 김응진, 정덕생, 김인옥, 방영화, 김원휘, 엄응삼, 권주백, 강석진, 전기석과 신학지원자 최경호, 조계환, 박문찬, 김복출 제군을 시취허락 하다.1915년 7월 13일 경상노회가 영주동예배당에 특별회로 회집하다. 신학생 이문주, 권영해, 임종하, 허일(許一, [Harry James Hill]), 김충한, 조기환, 박문찬, 유진성 제군은 계속공부하고 신학지원자 염봉남, 최재교, 배은휘는 시취취학하다.

위의 경상노회에 관련된 1912, 1914, 1915년 허일(許一, [Harry James Hill]에 대한 언급을 보면 앞서 기술한 연표에서 1917. 9. 27 부인과 함께 내한, 서울에서 선교활동 시작했다는 내용에 앞서 한국에 와서 신학생으로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허일(許一, [Harry James Hill 선교사를 조사 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음을 그의 여정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의 부인과 정식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 전 이미 한국에 와서 신학생의 신분으로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과 1917년 내한 하였고 중간에 일본 정부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방해로 인해 자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한 선교사역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거기서 그만 두지 않고 다시 한국에와서 더욱 풍성한 선교사역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정년까지 선교사역을 하고 다시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세한 사역의 내용은 다 알수 없지만 그의 여정만 보더라도 얼마나 한국땅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가득했는지를 이번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작성일:2017-06-30 09:57:43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