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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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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 M0045/ William M. Jun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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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하
등록일
2017-06-30 12:45:44
조회수
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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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_M0045_William M. Junkin_2015210044_이재하.hwp (1064960 Byte)
Ⅱ 선교사 소개: 윌리엄 맥클레이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1865-1908)

윌리엄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는 1892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1896년 4월에 호남지역 전임 사역을 하기 전까지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호남지역 사역을 위한 선교 지역을 살피는 일과 서울의 서소문 사역을 하였다. 그 후 그는 1896년 4월 호남 지역을 선교하다가 1908년 1월 2일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는 특별히 한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한국인들과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남 장로교 선교부가 파송한 7인 중에서 부부 선교사로 한국에 온 선교사였다. 그는 의료선교사 드루와 함께 전라도 호남 지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윌리엄 전킨의 성장 배경과 한국 선교 준비 과정
국외 선교사의 꿈과 한국 선교사와의 만남
전킨은 1865년 12월 13일 미국 버지니아 크리스천벅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부는 목사였고, 부친은 판사였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 남부 장로교회의 신앙을 부모와 교회로부터 물려받아 성장하였다. 전킨은 1885년 버지니아주 렉싱턴에 있는 워싱턴앤리 대학 영문를 졸업했으며 대학에 다니는 동안, 국외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889년 9월 남 장로교 소속의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를 위한 준비를 했다. 그는 ‘학생자원운동’(SVM)의 참가했으며 자연스럽게 같은 생각을 가진 학우들(레이놀즈, 카메론 존슨)과 교제하였고 1891년 ‘신학교선교동맹’ 연례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는 이런 활동과 학우들과의 교류 속에서 선교사로 준비되어 갔다.
그때 북 장로교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언더우드와 당시 밴더빌트 대학 신학과 학생이었던 윤치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들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전킨과 레이놀즈, 테이트는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여 남 장로교 선교부에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당하자 The Missionary 1892년 2월호에 ‘왜 우리는 한국에 가고 싶은가’라는 글을 써서 한국행을 호소하면서 매일 기도를 한 결과 선교본부는 그들의 한국 선교를 허락하였다.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9.
한국 선교를 결정한 전킨은 아내 매리 레이번과 1892년 결혼식을 올린 후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2. 한국 입국과 호남 선교를 위한 예비 활동과 서소문 선교 사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의료 선교사 드루 선교사와의 만남’
전킨 일행은 딕시에 살면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1892년에 남 장로교 한국 선교부가 조직 되었고, 1893년에는 장로교선교부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남 장로교는 한국 선교 현장 중 충청도와 전라도 등 2개 지역을 맡기로 했다.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14.
1893년 6월 선교부는 호남 선교에 앞서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전주에서 26달러에 은송리의 집 한 채를 매입하여 초가집에서 예배를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서문교회의 출발이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Ⅰ」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4), 744-745.
그해 9월 전킨은 호남 선교를 위해서 테이트와 전주 순회에 나섰으나 장마로 인해 개울물이 불어나서 물에 빠져서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어떤 한국인이 구해 주었다. 전킨은 테이트와 호남 선교를 위해 2주 정도 전주를 순회 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1894년 2월 13일 남 장로교 선교사들은 딕시에서 제2회 남 장로교 선교회의를 통해 본격적인 호남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동학혁명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고 서울로 올라 와야 했다.
1894년 4월말 전킨은 경기도 남부를 전도 여행 중이었으나 동학으로 인해 서울로 옮겨 6월부터는 서소문 사역에 전념하였다.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18.
그해 테이트 남매는 전주에 정착했고, 이어서 전킨과 드루는 계속해서 군산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펼치다가 가족과 함께 군산으로 완전히 내려갔다.
서소문 사역은 의료선교사 드루의 가담으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전킨은 환자들의 진료 때, 통역을 하면서 일대일로 전도를 하였는데 그들에 의해 신앙 공동체가 형상되었고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이후 두 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23-24.
이것은 남 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베풀어진 최초의 세례식이다. 이렇듯 전킨은 의료 선교사 드루와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으며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공동체가 되었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여 많은 세례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3. 전킨의 군산 선교 활동
연약한 자를 통해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군산에서의 선교, 최초의 세례자
1896년 4월 전킨은 드루와 함께 군산으로 내려가서, 그들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3개월에 걸친 교육 후 세 사람 중 송영도와 김봉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호남 최초의 세례였을 뿐만 아니라 군산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1896년 남 장로교 선교회의에서는 군산선교부를 폐쇄하고 전라남도 나주에 새로운 선교부를 설치하려고 하였다.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26.
이에 대하여 드루와 군산 교우들이 완강히 반대하여, 군산과 나주 양쪽을 모두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김수진, 「호남기독교 100년사」, 57.;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Ⅰ」, 751-752에 재인용.
그 후 전킨과 드루는 군산에서 열심히 전도하였고 군산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98년 군산이 개항장으로 결정되어 군산 선교부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군산 선교부를 구암(궁말)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1898년 하반기 전킨은 자신의 질병과 시드니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선교부 이전으로 인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군산 선교는 꾸준히 확장되고 있었다. 세례를 받은 교인 수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1896년 두 명에게 세례를 준 후 전킨은 1897년 7명, 1898년 14명, 1899년 상반기에 30명, 하반기에 56명에게 세례를 주면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전킨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을 떠나기 전인 1900년 4월에는 5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때 군산선교부는 모두 네 곳, 즉 만자산, 남차문, 송지동, 통사동에 신앙공동체가 세워져 있었다. 또한 군산 지역은 전킨과 의료선교사 드루에 의해서 1899~1900년에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전킨은 1900년 봄부터 1901년 가을까지 안식년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지역 교회들을 돌면서 한국 선교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하고 도움을 호소했다. 안식년 후에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03년 4월 23일 사랑하는 아들 프란시스를 폐렴으로 잃었고 그의 건강은 쉽게 나아지지 않아서 군산에서 전주로 옮기게 되었다. 1903년 말부터 1904년 초까지 그의 가족은 레이놀즈의 집에 있으면서 질병을 치료한 후 1904년 3월 전킨은 다시 군산으로 돌아왔다.

4. 전주 선교 활동과 전킨의 사망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1904년 남 장로교 한국 선교회의에서 군산 선교사 전킨을 전주로 전임시키고 건강을 염려하여 사역지를 전주 3마일 이내로 제한하였다. 전킨의 담당 구역인 전주 시내는 전주교회의 정기적인 예배와 함께 시장 및 거리에서의 전도, 그리고 방문객들과의 대화가 주된 사역의 방식이었다.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58.
전킨의 전주교회 사역은 그가 온 이후 큰 성장을 이루었다. 특별히 교회가 작아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어려워서 교회를 짓기로 하고, 1906년 전주 서문밖에 780평의 대지위에 57평 건평의 한양절충식의 교회를 지었다.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60.
1904년 이후 1907년 12월까지 전킨의 사역은 모두 4개 영역(전주사역, 지방사역, 전주남학교, 평양신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1905년 9월부터-1906년 8월까지 그의 사역은 전주 반경 20리 이내로 제한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전과 비슷하다.
그 외에 전주 북서쪽 구역 순회가 추가되었고, 조사로는 김필수 외에 김병식이 덧붙여졌다. 1907년에도 전킨은 전주교회 당회장, 전주 반경 20리 순회, 금구와 김제 순회 사역, 성경반 지원, 조사 김필수와 교사 김명식 관리, 선교부 조사 훈련반 기획 및 운영 등의 선교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남식, “남장로교 서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72.
전주교회는 1907년 부흥운동의 열풍이 몰아닥쳤다. 그러면서 교인 수가 꾸준히 늘어나 가을에는 세례교인이 20명이 되었다. 1907년 그의 관할구역인 금구와 김제에는 8개의 교회가 있었다.
1908년 1월 2일 전킨은 전주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8일전 1907년 12월 25일 성탄절까지는 잘 보냈으나 밤부터 이상이 있었다. 다음 날 오한이 발생했고, 그것이 주일에는 장티푸스로 발전하였다. 화요일 밤에 군산의 의료선교사 다니엘이 급히 도착했지만 1월1일 그의 병은 폐렴으로 발전되었고, 1월 2일 수요일 오전 9시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전킨은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직감하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죽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지금 갑니다. 그리고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3), 362.
또한 그의 비문에는 “여기 전킨 목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했노라.”고 기록되어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362.


5. 평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14)
윌리엄 전킨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선교사이다. 대학의 영문학과를 다닐 때 받은 비전을 가슴에 품었을 뿐 아니라 신학교를 가고 국외 선교사를 지망하여 선교사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다가 한국으로 왔다. 우리는 꿈을 꾸지만 꿈을 위해서 댓가를 지불하고 실천에 옮기기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킨에게 언더우드와 윤치호를 만나게 하신 것처럼 꿈꾸는 사람에게 사람을 붙여주신다. 의료선교사 드루도 붙여주셨다. 그리고 길을 열어주신다. 전킨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국 사람들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였다. 그의 아내 레이번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다. 우리는 뭔가 자신이 잘 할 수 있을 때 쓰임 받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구한말 일제치하의 어려움 속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는 한국인들, 특히 전라도의 군산과 전주지역에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주었다. 자신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다가 43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헌신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전수되어 자녀들과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했다.
전킨은 16년간의 사역을 통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순수하게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워서, 학생들과 성도들을 가르쳐 진리 위에 그들을 세우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하나님 곁으로 간 위대한 선교사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우리 모두가 그의 정신을 본 받아서 그와 같은 신실한 일꾼이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전적으로 헌신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붙여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다양한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건강한 공동체가 이 땅 곳곳에, 세계 곳곳에 세워지는데 쓰임 받기를 기도해본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주님, 제가 지금 갑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행복합니다.”
작성일:2017-06-30 12:45:44 211.178.120.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