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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Vinton, C. C.(1856-1936, NP) / Vinton, Lefitia Coulter

닉네임
김효진 김효진
등록일
2017-06-30 13:47:43
조회수
2345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24_2015210019_김효진.hwp (34304 Byte)
I. 기본사항

출처: “Vinton, C.C.” 김승태, 박혜진 엮음,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513-514.

Vinton, C.C. (빈턴/賓頓 /미국/ NP)
1.생물연도: 1856-1936.6.26. 미국에서 출생

2.학력:

3.경력
1891.4.3.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서울의 국립병원 제중원의 의사로 활동, 원장에 취임
1893.11 제중원 원장 사직, 개인 진료소에서 치료, 복음전도 평양, 의주, 만주에 이르는 전도여행
1897.4.1.의 편집주간으로 실제 책임
1901부터 부정기 간행물로 발간
1905 와 병합, 월간 정기간행물
1904 나병환자 실태조사위원으로 선임, 부산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
1903.12 4 부인소천, 1908 딸 소천
1908 선교사직 사임하고 귀국
1936.6.26. 뉴욕에서 소천

4. 가족사항: Vinton, Lefitia Coulter(부인), Vinton, Mary Blanchard(딸)

5. 논저: [논문] Slavery and Feudalism in Korea, KRP, vol.Ⅱ, 1985;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6:671, 1893; Missionary Review of the Year (with W.B. Scranton), KRP, vol.Ⅱ, 1895; Statistics of the Protestant Churches in Korea, KRP, vol.Ⅱ, 1895; Literary Need of Korea (with A.Kenmure) , KRP, vol.Ⅳ, 1897; Latest Advance in Korea, Missionary Review, 23:367-69, 1900; Today in Korea Mission, Missionary Review, 29:571-74, 1906; A Surgeon's Experience, church at Home and Abroad, 1891; Transportation in Korea, Railroad Men, vol ⅩⅢ, No.9, 1900; Obstacles to Missionary Success in Korea, Mission Review of the World, vol.7, No11, 1894.


Ⅱ. 선교사 소개: 빈턴 씨씨 선교사(Vinton, C. C. 1856-1936.6.26.)

빈턴 Vinton, C.C 1856--1936.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의사(醫師,) 한국명 빈돈(賓頓) 미국 출신. 1891년 4월 3일 부인 (Lefitia Coulter)과 함꼐 내한하였다. 서울 도착 즉시 북장로회가 관리하던 국립병원 제중원의 의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헤론( J.W. Heron; )의 별세로 공석 중이던 원장에 곧 취임하였다. 그러나 정부 경영의 국립병원인 관계로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제한받자 제중원 원장을 사직하고 1893년 11월부터 자신의 처소에 개인진료소를 설치하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복음전도를 병행하였다. 불과 14개월 동안에 2천 여명의 환자를 치료하였고 그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 한편 빈턴 의사는 전도여행에 흥미를 지녀 182년에는 마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 일대를 순회하는 전도여행에 동행하였고, 이후 평양을 북장로회의 선교 근거지로 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에도 평양 의주에 이르는 전도여행과 만주의 우장 지역까지의 순회전도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여행후 특별히 개신교 선교사업에 있어서 큰 저해요인의 하나로 대두되었던 천주교회의 방해활동을 보고 이에 대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후 선교사 공의회의 회계로 선임되어 재정 전반을 관할하였고 조선성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의 창설에 공헌하고 초대 재정부 서기를 맡아보았다. 특히 재임시에 전국 교회에 「조선성교서회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게 하는 등 기독교서회 사업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이 일은 1907년 그가 한국에서 퇴임할 때까지 계속하였고 그 사무를 구세군 사관인 본윅(G. Bonwick)에게 인계한 바 있다. 또한 1895년 11월에는 재경 외국인 인사들을 초청하여 <기독교문학의 실정과 요구를 고려하기 위하여>라는 주제로 집회를 열고 한국 독서계에 기독교문학을 보급시키는 데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1897년 4월 1일 언더우드 목사를 사장으로 하여 장로교 최초의 신문인 <그리스도 신문> (The Korea Field)를 부정기 간행물로 발간하기 시작하였는데 1905년에는 감리교회의 존스(G.H. Jones)가 발행하던 와 병합하고 월간 정기간행물로 발행하였다. 이를 통해서 보면, 빈턴은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으나 실제로 그 활동 분야에 있어서는 기독교 문서사업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 될 수 있다. 그밖에도 구라사업에도 전력하여 1904년 선교사연합공의회에서 어빈(C. H. Irvin), 스미스 등과 함께 나병환자 실태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그해 부산에 나병환자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그 후에는 이 수용소를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에서 관리하였다. 특히 빈턴은 인도의 나환자 선교사인 베일리(Baily)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회사 받아 수용소의 시설을 확장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1903년 12월 4일 부인이 한국에서 별세하였고, 1908년에는 딸(Mary Blanchard) 마저 잃은 뒤 1908년 한국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귀환했으며 1936년 6월 26일 뉴욕에서 별세했다.
작성일:2017-06-30 13:47:43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