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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Covington, Hallie(미상, NP)

닉네임
이민상
등록일
2017-06-30 14:05:59
조회수
2299
첨부파일
 M0167_2015210177_이민상.hwp (1429504 Byte)
I. 기본사항

출처: 김승태, 박혜진 엮음,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183

Covington, Hallie (코빙턴/ 高娉敦/ 미국/ 미북장로회)

1. 생몰연도
정보없음

2. 학력
정보없음

3. 경력
1917.10.30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안동에서 1년간 활동
1918 평북 선천선교부에 부임, 여성 중심의 복음전도사업
1933 황해도 재령선교부로 전임하여 활동
1941.2 장·감 여선교사들의 세계평화기도문 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강제 송환
1952 은퇴

4. 가족사항
정보없음

5. 논저
정보없음


Ⅱ. 선교사 소개

미국 북장로회 여선교사로서 한국명은 고빙돈이다. 1917년 10월 30일 내한하여 안동에서 1년간 있다가 1918년 평북 선천 선교부에 부임하여 여성을 중심으로 복음 전도사업에 종사하였다. 1933년 귀국하였다가 다시 내한하여, 황해도 재령 선교부로 전임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1941년 2월 장·감 여선교사들이 세계기도일을 맞아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밝힌 『세계평화기도문』 내용이 일제 당국의 시책에 거슬린다 하여 압력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녀는 일본의 진주만 습격 직전 강제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그녀는 다시 선교지에 복귀하지 못한 채 1952년 은퇴하였다.

Ⅲ. 선천에서의 활동(1918-33)

1. 선교지로 지정된 경유
선천은 성벽이 둘러져 있지 않은 마을로서 서울에서 목단과 북경으로 가는 간선도로 상에 있다. 초기 선교사들이 의주의 기독교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모두 선천을 지나갔지만,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을 남긴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언더우드 박사가 일찍이 1887년에 그 마을을 통과했었으며, 그 외에도 아펜젤러, 게일, 마펫, 스크랜턴 등 다른 여러 선교사들도 그 길을 간 것임이 틀림없으나, 그 마을에 관심을 끌어들일 기독교인이 없어 아무런 언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마을 인구가 3천 명의 인구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교기지가 세워진 후에 주민이 5천명으로 증가했고 현재는 1만 3천 명에 이르고 있다. 휘트모어가 그 지방을 여행하기 시작하면서 선천을 더 바람직한 장소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강계가 평안북도 북부의 중앙에 있듯이 선천이 평안북도 남부의 중앙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부지로 선택할 뜻을 품은 마펫과 휘트모어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 했고, 그리하여 새 선교기지가 선천에 들어서게 되었다.

2. 독신 여선교사들의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은 커빙턴
선천 선교기지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성 회원들의 일부는 통상적으로 이 읍의 여자주일학교에서 일하였다. 그 대부분의 기간에 선교기지의 두 여선교사들이 남교회와 북교회의 여자 주일학교들을 감독하였다. 다른 형태의 사역들, 곧 한국인 가정방문, 사경회와 성경학원 교육, 여학교와 병원 협력 사역등도 수행하였다. 이 선교기지 설립자의 한 명인 루이스 체이스 양은 10년이 지난 1911년에 건강문제로 인해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간호사 에스더 실즈양은 1902년부터 2년간 그녀와 함께 사역했으며, 1903년에는 제인 사무엘 양이 함께 사역하였다. 사무엘 양은 한 세기의 사사분기를 거의 내리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일꾼으로 선교기지 내의 독신여성 사역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오래 있었다. 힐다 헬스트롬양은 1909년에 와서 일하다가 1920년에 페이 에드거턴 양에게 넘겨주었다. 에드거턴 양은 건강상의 이유로 3년 후에 사임하였다.
다른 독신 여성 회원들 중에서 핼리 커빙턴(Hallie Covington)양은 1918년에 이 선교기지로 와서 1933년에 사임하였으며, 메조리 핸슨 양은 1930년에 왔다. 1932년까지 모두 7명의 독신여성 사역자들이 직접적인 복음전도 사역에 종사하였는데, 총 66년 동안 사역하였으며, 이는 선교기지 역사 전체를 통해 두 명의 사역자가 행하는 것에 상당하는 기록이었다.


3. 선교지에서의 여성사역

① 여자성경학원
커빙턴은 여자 성경학원에서 3대 교장을 맡아 사역하였다. 여자성경학원 사업은 1912년에 시작되었다. 교장은 사무엘 양, 헬스트롬 양, 커빙턴 양, 핸슨 양이 차례대로 맡았다. 여러 해 동안 평균 35명 정도가 출석하였으며, 1930년까지 60명이 졸업하였다. 10주 동안의 학기가 남자성경학원과 다른 시간에 개최되었는데, 이는 두 학교가 같은 건물을 쓰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평양 이외의 거의 모든 선교기지들에서 일상적인 실상이었다.
성경학원은 대체로 평신도 교육기관이었다. 학생들은 규칙에 따라 스스로 학비를 냈고, 소수의 학생들은 그들이 다니는 교회나 개별 선교사들로부터 보조를 받았다. 하루 두세 시간씩의 정규 성경과목 외에 다른 과목들도 가르쳤는데, 그것은 성경지리, 개인사역, 요리문답, 설교, 교회사, 선교, 주일학교 인도법, 음악 등이었고 여자성경학원에서는 위생과 산수 등도 가르쳤다. 이러한 성경학교가 선천을 포함하여 16개가 있었으며, 1930년의 선교회 보고회 따르며 남녀 각각 500명 이상이 출석하였고 1929년의 보고서에 다르면 매년 5천 달러를 쓴 것으로 보고 있다.

② 사경회의 여성참여
1910년에 선천에서 가장 큰 사경회의 하나에 1,300명의 여자들이 참석하였다.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 여자들이 한 반에 모이는 것을 보는 것은 대단한 광경이었다.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머리를 하얗게 두르고 있었다. 당시 선교기지 관할지역에 1만 3천 명의 기독교인 여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커빙턴이 머물던 시기에 사경회의 여자 참석자가 계속적으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아, 선천에 있을 동안 여성들을 가르치고 사경회 참여를 독려한 것의 결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911년 부터 1931년 까지 매 5년마다 산정하는 통계수치에 근거하면 선교기지의 사경회 참석자는 20년 동안 매해 평균 남성이 8천명, 여성이 9천 명이었다. 1930-1931년 사이의 남녀 참석자를 합하면 2만 2천명을 상회하였는데, 이 숫자는 교인 총수의 절반 이상에 상당하였다. 1917년에는 사경회 참석자가 교인 총수의 62퍼펜트에 이르렀다.


4. 선교결실
선천에서 진행된 기독교 운동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과장될 필요가 없다. 1896년에 휘트모어가 한국에 도착하여 평안북도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그가 베어드와 함께 이곳을 방문했을 때, 6개 집단을 이룬 60명의 기독교인들을 발견했다. 이 선교기지에서 작성한 1902년도와 1917년도의 보고서를 비교하면, 그 25년 동안에 평안북도의 전도, 교육, 의료 사역이 4,000퍼센트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1년도의 교인수 43,000명은 휘트모어가 그 현장에 온 이후 35년간(1896-1931), 매년 평균 1,200명이 증가한 사실을 보여준다. 1933년에는 선교기지 관할 지역의 전체 교인들이 62.604명이었고, 헌금 액수는 총 10만달러 이상이었다. 커빙턴이 선천지역에 머물던 기간이 15년(1918-1933)이나 되었기에, 여성의 교육과 이로 인한 인권신장 등 여러 가지로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본다.
작성일:2017-06-30 14:05:59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