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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McLellan, Edna A.(1883-1975, CP)

닉네임
오성진
등록일
2017-06-30 14:09:13
조회수
2535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243_2012210102_오성진.hwp (28672 Byte)
I. 기본사항

이름 : Miss Edna A. McLellan
생몰연도 : 1883년 4월 12일 - 1975년
출신 및 소속 : 노바스코시아주 노엘 쇼어(Noel Shore)/캐나다 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 파송
한국선교 기간 : 1913-1947년
연표
1913년 한국 도착
1913-1941년, 회령 성서학교와 함흥 선교사업
1940년 원산에서 선교사업과 마르다 윌슨 기념학교사업(Wonsan Martha Wilson Memorial Women’s Bible Training School)
1941년 벤쿠버에서 병원 방문 사역
1942년 브리티쉬 콜롬비아주 프린스 루퍼트(Prince Rupert) 지역 선교사업
1945년 알버타주 캘거리(Calgary)에서 병원방문 사역
1946년 벤쿠버에서 병원방문 사역
1952년 3월 은퇴
가족사항
확인 불가


II. 선교사 소개 : 맥릴런(McLellan, E. A, 1883-1975)

캐나다 장로교 한국 여선교사. 한국명 마일란(馬日蘭). 1913년 내한하여 함남, 함흥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캐나다 선교부는 1987년 12월 원산에 도착한 이후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한국인 교회지도력을 중심으로 활발히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후 1913년에 맥릴런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였다. 캐나다장로회는 여자선교사 비중이 높았는데, 여성을 위한 선교에 중점을 두었고, 사회봉사에 앞장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맥릴런 선교사가 어떤 사역을 하였는지 자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구글에도 도서에도 기본적인 인적사항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III. 기타자료

“나의 고향 두메 산골에도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단칸방에서 예배를 드리고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도하던 내 아버지의 소박한 형편은 그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됐다. 비록 당회가 조직된 교회는 아니지만 조직 교회로 가는 준비과정의 교회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걸어 다닐 수만 있었다면 당연히 장로가 되었겠지만, 항상 방에 누워만 계신 아버지로서는 장로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작은 건물이지만 예배당을 따로 지은 후부터는 아버지가 예배를 인도할 수 없었고 또 유급 교역자를 단독으로 모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배의 인도나 설교는 아버지의 전도를 받은 마을 남자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수행했다.   그렇게 되니 예배는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가 인도하여 드리던 예배보다 생동감이 떨어졌고 어색한 경우도 있었다. 어색한 경우라는 것은 예배 인도를 맡은 집사가 설교를 하다가 말문이 막혀 예배가 중단되는 경우였다. 그럴 때는 할 수 없이 열네 살밖에 안된 내가 나가 그 집사가 시작했던 성경이야기를 마무리해 준 일도 여러 차례가 있었다.   그렇게나마 예배드리는 곳이 우리 마을 이외에도 군내에 열 곳도 더 세워졌다. 노회와 시찰회는 군내에 세워진 여러 교회를 돌보기 위해 순회 전도사 한 분을 세워 1년에 몇 차례씩 순방하게 했다. 새 교인들에 대한 세례나 성찬 예식 등 교회의 전례 집행과 교인 관리는 읍내의 목사 한 분이 전담했다. 그 목사님은 1년에 한 번 정도 우리 교회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읍내에 목사가 없을 때는 1, 2년을 지나도 목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선교 지역을 지원하기 위하여 당시 함경도와 동북부 만주지역을 담당했던 캐나다 선교부는 우리 지역을 담당할 선교사를 한 사람 두어 3년에 한 번 정도 순방하게 했다. 거의 여선교사가 왔다. 그 서양 여선교사가 방문할 때면 모든 신도들은 큰 잔치가 벌어지는 것 같이 흥분하고 기뻐했다.   당시 우리 교회를 방문했던 여선교사는 한국 이름으로 마일란이라 했다. 그는 통역을 겸하여 그를 보조하는 한국인 여전도사를 대동하고 왔다. 여전도사는 송몽은 선생으로 과거 평양 축구단 주장선수였고 후에 함흥 축구단에서 선수로 뛰었던 송희도 선수의 큰 누님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회 목사였다. 선교사 일행이 교회와 신도를 방문하러 올 때에는 마차나 소달구지를 타고 왔다. 당시 우리 마을까지는 버스는 물론 없었지만 트럭 다니는 길까지 와서도 다시 3, 40리 길을 걸어와야 했다. 본래, 그 지역에는 평상시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마차나 소달구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무를 실어 나르거나 곡식을 운반하는 달구지나 마차를 임시로 개조하여 여선교사와 여전도사 2, 3명을 타게 했다. 남자 교역자들은 그 뒤를 따라 걸어왔다. 두메 산골은 편한 숙소가 따로 없었다. 우리 집이 숙소가 되었다. 며칠 전부터 집을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가 선교사 일행이 오는 날, 단칸방 집 안을 모두 비워놓고 우리 식구는 마을의 다른 교인들 집에 가서 잤다.   선교사는 야전 침대 같은 나무로 접은 침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방에 펴놓고 가지고 온 담요로 간이 침상을 만들었다. 다른 수행원들은 다른 교인 집에 방을 얻어 쉬었다. 나는 그 때 산골 집에 빈대나 벼룩이 많았는데 그들이 어떻게 잤을까 늘 궁금했다. 서양인의 피는 쓴 약물 같아서 빈대나 벼룩이 한 번 피의 맛을 보고는 다시 덤벼들지 못한다고 동네 아이들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에 머물렀던 여선교사 마일란 씨는 30대 초반의 미인이었다. 나는 저렇게도 예쁜 서양 여자가 어떻게 이런 두메산골에 사는 우리를 찾아와 주는가 크게 감격했다.”
작성일:2017-06-30 14:09:13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