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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arrett, Mary B.(1875-1957, NP)

닉네임
황현승
등록일
2017-07-07 15:52:29
조회수
2259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66_2015210069_황현승.hwp (1782784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Barrett, Belle Barrett / 바레트
2. 생몰연도: 1875.-1957.6.2.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 선교기간: 1901.9.10.-1908.4.15.
5. 연표
1901.9.10. 북장로교 선교사로 5명과 함께 내한, 주로 교육사업에 헌신
1902.1. 정신여학교에서 음악 수업 시작
1902.8. 평양에서 일시적인 사역
1903.10. 주일학교 사역 시작
1904-05. 정신여학교 제4대 교장을 역임
1906. 일반 교사 사역
1907.8. 일본 가루이자와 방문
1907.9. 평양 방문
1908.4.15. 퇴임하고 귀국
1957.6.2. 플로리다 파나머시에서 사망
6. 가족사항: 독신


II. 선교사 소개: 바레트(Mary B. Barrett, 1875-1957)

1. 독신으로 한국 여성교육에 헌신한 여선교사
바레트(Mary B. Barrett, 1875-1957)는 한국의 근대여성교육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녀가 사역을 준비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은 한국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매우 엄격한 차별을 받았고 자유가 억압되었다. 여성 선교사들이 낮에는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한국 여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가 한국에 입국한 1901년 이전까지는 여성의 삶의 질은 최악으로 떨어졌었고,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1986년 5월에 감리교 여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톤(Mary F. Scranton)에 의해 세워진 이화학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이었을 정도로 여자들에게는 교육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7년 6월에 바레트의 선교사역의 터전이었던 정신여학교가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에 의해 세워지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한국 장로교 최초의 여학교이다.
이러한 한국에 상황에서 바레트는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헌신하였다. 당시의 한국의 선교지의 상황은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여성 선교사들을 필요로 하였는데, 특히 독신의 여성 선교사들을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레트는 그에 대한 적임자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한국 여성들의 복음화와 여성근대교육에 자신을 독신으로 기꺼이 내던지는 헌신적인 여선교사이었다.

2. 독신의 여성 선교사
19세기에 개신교 부흥운동이 북아메리카를 휩쓸면서 미국에서 복음주의가 형성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에 따라 복음주의자들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려는 거룩한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하였고, 19세기 말은 그러한 열정이 미국의 해외선교로 이어져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였다. 이러한 선교에 대한 참여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동일했다. 한국에 파송된 남녀 선교사들은 그 시대의 선교 열정에 고무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초만 해도 여성이 선교사가 되기 어려웠고, 기껏해야 선교사의 아내로 해외 사역지에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여성 선교사 협회와 선교부들이 많이 생겨나자 북장로교도 독신의 여성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레트도 독신 여성으로서의 한국 선교에 대한 희망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말에 한국 선교지에도 독신의 여성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그 수가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신여학교 3대 교장(4대 교장은 바레트)이었던 수잔 도티(Susan A. Doty)의 선교보고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다음의 편지는 1899년과 1900년의 여학교의 상황에 대해 도티가 선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지금 학교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독신 여성 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선교회가 진지하게 고려해 주시고 이와 관련지어 학교에서 쓸 교과서 확보가 긴급하다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 주시길 원합니다”

바레트는 독신 여성선교사로서 한국의 여학교 선교사업에 꼭 필요한 적임자였다. 그녀는 1901년 9월 10일 한국 땅을 밟았다. 26세의 아리따운 나이로 자신의 젊음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헌신한 것이다. 그녀는 한국의 여성 교육사업에 헌신한 독신의 여선교사였다.

3. 한국 여성교육에 대한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여성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에는 여자들을 위한 학교는 없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으며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고 순종해야만 했다. 여성들은 불의한 환경에서 경멸을 당하며 살았고 숱한 고난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갔던 모습들이 바레트가 처음 한국에 발을 디뎠을 때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레트와 같은 여성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부터 한국의 여성에 대한 교육 부분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예를 들면, 1886년부터 바레트가 퇴임 후 미국으로 돌아간 1908년까지의 기간 동안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25개의 학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학교였다. 이러한 상황들은 바레트와 같은 여성 선교사들이 얼마만큼 한국의 여성들의 교육에 힘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바레트는 여성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한국어 습득에 몰두하였고, 음악에 재능이 있어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바레트가 한국어 공부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1902년 1월 31일의 도티가 엘린우드(Dr. Ellinwood)에게 보낸 편지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레트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그녀는 ‘내 평생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어요’라고 한국어 공부에 대해 말했습니다. 지금 여학교에서 한 주에 두 시간씩 음악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제게 큰 도움이 되고, 그녀도 만족감을 느끼고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바레트가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서 한국의 여성들을 교육하는 목적은 이러한 학교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많이 증가시켜서 복음의 진리가 인간 생활에서 가장 완벽한 지침임을 알게 하여 결국 그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다수의 한국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한국 여성들을 사랑한 헌신적인 선교사였다.

4. 정신여학교의 4대 교장
장로교 최초의 여학교인 정신여학교는 1887년 6월에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정동 28번지 주택에서 시작하였다. 1888년 9월에 헤이든(M. E. Hayden)이 한국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2대 교장에 취임하였고, 1890년에는 도티가 3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어서 1904년부터 바레트는 정신여학교 4대 교장에 취임하여 2년 동안 학교의 대표로 사역하였다. 바레트가 교장으로 있던 1904년에 전체 여학생이 26명이었는데, 모두 교회의 세례교인들이었고 그 해에 중급반에서 8명의 여학생들이 최초로 졸업하였다. 학교의 명칭은 1887년에 정동여학교로 설립하여, 1895년에 연지동으로 이전함으로써 연동여학교로 개칭되었고, 1905년에는 구한국정부로부터 정신여학교로 개칭되어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05년 바레트는 선교회에 정신여학교의 선교사업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또한 1899년과 1900년의 정신여학교에 대한 도티의 보고서를 보면 학교수업과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학생들은 반나절은 공부하고 다른 반나절은 일을 하고 저녁에는 복습을 하였다. 자기들이 사는 방을 치우고 주문이 들어오는 바느질과 뜨개질 따위를 하였다”
“학교 수업은 8시에서 12시까지고 저녁 공부 시간이 있습니다. 일주일 중 엿새는 수업하며, 공부 시간과 함께 가사일, 빨래, 다림질 등 매일의 일과를 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 교실 수업은 소책자를 읽고 성경 구절 암송, 한국어 쓰기, 책 필사하기, 산술 공부, 그림을 이용한 생리학 기본 과정 복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바레트가 정신여학교의 교장으로 사역하던 하루의 일과는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효율적이고 유용하게 시간을 사용하도록 가르쳤다. 또한 성경 구절 암송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고, 실생활에 유용한 산술과 생리학을 교육하여 그들의 생활이 향상되도록 노력하였으며, 한국어를 배움으로써 서구적인 사람보다는 한국의 전통을 강조하는 양식 있는 한국인의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바레트는 정신여학교의 4대 교장으로서 한국 여성들의 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다.

5. 한국 여성 교육의 공헌자
한국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사회, 의료, 교육 사역이 필요하다 것이 여성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는 실질적인 동기였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교육사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바레트도 한국에 있는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갈망이 컸다. 그녀는 독신의 여성 선교사를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사역이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육하는 사역임을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레트가 보낸 여러 편지들과 보고서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국 근대 여성교육에서 바레트의 공헌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재,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한국인들에게 복음은 남녀 모두의 것임을 가르쳤다. 둘째, 교육에 있어서 소외받아왔던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여성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셋째, 교육을 통해 의식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넷째, 서구적인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의식 있는 여성들을 키워내려고 하였다. 이는 한국어 공부를 지독하게 강조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바레트의 노력은 한국의 근대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고 평가받아야만 한다. 바레트는 자신을 희생하여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육하였다는 점에서 헌신적인 여성 선교사의 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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