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 선교사 연구

닉네임
서범석
등록일
2007-12-01 12:58:14
조회수
1951
< 내한 선교사 연구 > 3학년 4반 2005210312 서범석
Kinsler, Francis
미북장로회 선교사. 한국명 권세열(權世烈)은 190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으며, 1925년 메리빌대학과 1928년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1928년 한국에 도착을 하였다. 킨슬러는 평양 선교부로 발령을 받고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중,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한국 소년들을 보고 13명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1929년 성경구락부(Bible Club)를 시작했다. 이 성경구락부에 수용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도 입학할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킨슬러는 이들에게 무료로 교육을 시켰으며,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자신의 제자들인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야간에 수업을 하였고 이들의 노력의 대가는 근로 장학금으로 지급을 하였다. 그의 부인(D. Woodfool Kinsler, 권도희)선교사는 1930년에 내한하여 평양에서 함께 성경구락부를 운영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다. 해가 갈수록 아동들이 모여들었고 이러한 소식이 미국 북장로교회에 알려지자 성경구락부를 운영하는 재정적인 지원이 생기게 되었다. 킨슬러 선교사가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출강하자, 자연히 신학생들에게도 성경구락부 교사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이들에게도 근로 장학금을 지급하여 학교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점점 학생 수가 많아지자 교육이념을 누가복음 2장 52절에 근거하여 학생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게 하는 믿음. 봉사. 지육. 체육을 심어주었다. 이 성경구락부를 평양에만 설치하지 않고 평양을 중심한 인근에까지 확장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모두 실시하였는데, 이 숫자가 무려 5천여 명이나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결의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폐교하자, 자연히 성경구락부도 문을 닫게 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킨슬러 부부는 1948년 대구에 도착하여, 대구에서 성경구락부를 재개 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시 신학생들이 야간으로 수업을 실시하여 역시 이들에게도 근로 장학금을 지원하였고 신학교를 졸업한 많은 목사 제자들을 두어 킨슬러는 존경받는 교수가 됐다. 성경구락부 출신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목사가 되어 킨슬러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70년 정년퇴임을 하고 부인과 함께 귀국한 후 킨슬러는 1992년 사망을 하였으며, 부인은 2001년에 사망하자 그의 소원대로 한국 땅 양화진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가 설립했던 성경구락부는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대한청소년구락부’라 명칭을 고치고, 현재 킨슬러(권오덕) 선교사가 이사장으로 있다.

Kinsler, Helen C.
미북장로회 여선교사, 한국명 권수량(權壽良). 1923년 8월 22일 내한, 대구에 배속되어 지방 여선교사업을 주관하였으며 1929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가 귀임하지 못하고 1933년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Kinsler, Marian
미북장로회 여선교사, 922년 8월 22일 내한하여 서울 선교부에 배속되었다. 그녀는 미국 남 감리회. 감리회. 북장로회의 3개 선교부가 여성을 위해 공동으로 운영하는 서울의 태화기독교사회관에 북장로회 대표로 파견되어 실무를 담당하면서 교육. 사회봉사. 가정 복지사업 등을 추진했다. 1949년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작성일:2007-12-01 12:58:14 222.115.180.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