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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lack, Donald M.(1896- , UCC) / Black, R. Lucy(미상, UCC)

닉네임
강성일, 조주영
등록일
2019-07-02 19:23:47
조회수
1258
첨부파일
 내한 선교사 조사과제(강성일, 조주영).hwp (5101056 Byte)
블랙 선교사 / Black, Donald M.(1896-, UCC)

Ⅰ. 기본사항

1. 이름: Black, Donald M / 블랙 / 한국명: 육장안(陸長安)
2. 생몰연도: 1896.10.21. - ?
3. 출신 및 소속: 캐나다, 캐나다장로회선교회(후에 캐나다연합교회선교회로 명칭과 조직이 변경됨)
4. 한국 선교기간: 1927. – 1940.
5. 연표
1896.10.21. 캐나다 밴쿠버에서 출생
1919. 위니펙 마니토바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의학과 외과학을 전공
1924. 위니펙 마니토바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취득(M.D.)
1927. 마틴(S. F. Martin)의사의 후임으로 만주 간도에 설립된 제창병원 원장으로 취임
1927.-1940. 제창병원에서 의료 선교에 전력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간도에서 강제 출국
1952-1963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지방의 공중위생 책임자로 활동
1953-1955 토론토대학교에서 공중위생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

Ⅱ. 선교사 소개: 블랙(Black, Donald M, 1896-?)

1. 의학기술을 갖추다.
블랙은 1919년 만 23세의 나이에 위니펙 마니토바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5년 만에 동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Times Higher Education’s World University Rankings 2019”에 따르면, 마니토바대학교는 캐나다 내의 대학에서 17위의 순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블랙 선교사가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있는 학교에서 수학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만 56세의 나이에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지방의 공중위생 책임자를 맡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그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얻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2. 선교에 대한 뜻을 품다.
블랙은 위니펙 마니토바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1924) 선교에 대한 뜻을 품게 된다. 그는 처음에 캐나다연합장로회의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북경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북경 진출로 인해 추방당한다. 추방으로 인해 많은 낙심과 절망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 번 한국에 대한 선교의 뜻을 가지게 된다.
1890년, 중국 선교사였던 존 네비우스가 분할정책을 입안하여 당시 선교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입국하여 중복 선교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 정책에 따라 미국은 평안남북도를 포함한 서부지역을 담당하였고 캐나다는 상대적으로 오지가 많고 험준한 지역인 함경남북도 지역을 선교지로 삼게 되었다. 성진에 그리어슨, 함흥에 맥래, 원산에 푸트가 각각 선교부를 설립했고 이들은 회령과 북간도(북만주) 일대의 용정지역, 연해주 지역까지 선교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블랙은 마틴(S. F. Martin)을 이어 용정에 있는 제창병원 제 2대 원장으로 부임한다.

3. 제창병원 2대 원장으로 부임하다.
블랙은 제2대 용정 제창병원장을 맡았다. 1927년 마틴(Stanley H.Marin)의 후임으로 중국에서 사역하던 블랙이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사역하였다. 1935-1936년 제창병원의 환자들 중 가장 많은 것은 폐결핵 환자였다. 비록 폐결핵 환자를 위한 독립병동은 없었으나, 치료에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블랙이 원장으로 있던 1930년대 중반 제창병원의 병상은 25개였고, 병원직원은 21명이었는데, 선교사로서 의사 1명, 간호사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한국인이었다. 환자들도 80%가 한국인이었고, 나머지는 중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환자였다. 1936년에는 400명의 입원 환자와 9,229명의 외래 환자를 치료하였다. 1940년에 간도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면서 제창병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4. 한국인에 대한 마틴의 우호적 태도
캐나다장로회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한 선교활동은 다른 선교부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선교와 교육선교‧의료선교였다. 그러나 같은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세속 권력 내지 일제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한국인들에 대한 태도에서 다른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과는 다른 특성을 보여주었다. 즉 선교 대상국에 대한 침략 세력인 일제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한국인에 대해서 대단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미 선교사들에 비해 캐나다장로회선교회의 선교사들은 제국의 정치적‧문화적 확장에 관심이 적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 신자들에게 미국적 모델로 개혁하려 했다면, 캐나다장로회선교회의 선교사들은 거의 그런 압력을 가하거나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에 파송된 어느 선교사들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을 생각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였다. 선교 초기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함경도 지역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여 교세가 급격히 성장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성향 때문에 한국을 침략 지배하는 일제 당국과는 대립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용정의 제창병원은 한국독립운동에 우호적인 마틴이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을 전후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해주고 치료해주었다. 또한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 침공 때는 일제의 학살 만행을 조사하여 폭로하고 항의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5. 제창병원의 위기 및 마틴의 귀국
1938년 4월 제창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간호부 9명이 식비수당 2원의 증액을 요구했는데 병원장 마틴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파업하고 총사직하는 일이 발생했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물가가 폭등하여 일어난 일이었지만, 제창병원도 그 무렵 선교비 감소로 재정이 원활하지 못하여 그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더욱이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선교사 적대정책으로 교육선교는 물론 복음선교와 의료선교도 타격을 입었다.
1939년 제2차 대전의 발발로 미‧일 간의 전운이 감돌자 1940년 가을 영‧미 영사관에서도 선교사들의 철수를 권고하였고, 이에 캐나다 선교부는 선교지역에 그대로 남을 것을 청원한 프레이저, 스코트, 머레이, 번즈 선교사를 제외한 나머지 캐나다 선교사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 때 마틴은 제창병원에 그대로 남을 것을 청원하지 않고 본국으로 귀환한다. 선교사들의 철수로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기관들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이에 대한 인수 운동이 일어났으며, 용정에 있던 캐나다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병원도 마찬가지였다.

6. 본국으로 귀국한 이후
블랙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간도에서 강제로 출국 당하게 된다. 이후 그는 캐나다에 귀국하여 개업의사로 활동하였고, 1952년에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지방의 공중위생 책임자의 역할을 맡아 11년간 근무한다. 한편 그는 1953년부터 2년 동안 토론토대학교에서 공중위생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도 하였다. 후에 그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주 켈로우나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성일:2019-07-02 19:23:47 121.133.210.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