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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all, Ada Bear(미상, M)

닉네임
노성진
등록일
2019-07-02 21:13:59
조회수
1230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3학년3반_090_노성진_전유신.hwp (665600 Byte)
1. 기본 사항

1. 이름 : Hall, Ada Bear / 홀 / 한국명: 허을녀 (許乙女)
2. 생몰연도: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Cincinnati Branch Ohio)
4. 한국선교기간: 1921-1933, 1934-1940, 1946-1948
3. 연표
1921. 미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
1922. 미감리회 여자해외선교회 한국선교부 회계직 맡음
1923. 이화학당 부속학교의 교장으로 재직
1930. 남북감리회 합동때 총리원, 중앙협의회, 중부연회 회계
1933-34. 안식년 휴가로 귀국
1935-40. 이화여자전문학교 회계로 학교 재정 담당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1946. 재내한 - 선교부 재정일을 보다가
1948. 귀국


Ⅱ. 선교사 소개

미감리회 여선교사, 교육가.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Cincinnati Branch Ohio 소속이었다. 1940년 Year Book을 보면 그녀가 1921년 한국으로 항해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Year Book(1940),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Boston, 1940, p93
1921년 내한하여 서울에서 한국어를 익힌 후 1923년부터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 부속학교들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또 1922년부터 미감리회 여자해외선교회 한국선교부 회계직을 맡아 선교부 살림을 꾸려나갔으며 1930년 남·북 감리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형성될 때 총리원, 중앙협의회 및 중부연회 회계로 활약하였다. 1933-34년 안식년 휴가로 본국을 다녀온 후 1935년부터는 이화여자전문학교 회계로 학교 재정을 담당하였는데 이 일은 1940년 강제 추방되기까지 계속하였다. 해방 후 1946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다시 한국에 나와 선교부 재정일을 보다가 1948년 귀국하였다. 기록된 모든 자료에 Miss로 기록된 것 미루어보아 결혼은 하지 않은채 독신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 같다.

이화가 창립되었을 당시에는 미국감리교 해외여선교부로부터 직접 지월을 받았으나 1889년 감리교 주한여선교회(Korea Woman’s conference)가 조직되어 스크랜튼부인이 초대 회장이 된 후에는 미국 여선교부가 경영하던 한국 내 모든 기관이 비로소 감리교 주한여선교회의 주관하에 놓이게 되었다. 감리교 주한여선교회가 법인체로 등록한 이름이 ‘미국감리료 조선부인 선교부 유지재단’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이 재단법인에 소속되어 있었고 설립자는 유지재단 이사인 미스 홀(Miss Ada Bear Hall)의 명의로 되어있었다. Year Book(1921)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Boston, 1921, p146
따라서 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된 유지대단 관할하에 이화의 경영권 역시 선교사 손에 있었다. 『이화 100년사』,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269-270

이화학당은 1925년 3월 1일 제단법인 미국감리서 조선부인선교부 유지재단이사 Ada B. Hall 명의로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인가 신청을 내고, 이 해 4월 23일 전문학교로서 인가를 받았다. 신편한국사 45권, I. 근대 교육운동, 국사편찬위원회 p.110

1943년 8월 7일 마침내 이화학당 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냈다. 학교는 그동안 세 차례나 재단설립 인가원을 제출하였으나 그때마다 무슨 꼬투리든지 들추어 허가를 내주지 않던 총독부로서도 더 이상 미룰 명분을 잃게 되었다. 1943년 당시 명칭 <재단법인 이화학당 기부행위>의 이사진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김활란
이 사 : 신홍우, 유억겸, 양주삼, 윤치호, 김성수, 서은숙, 박영균, 김상필,
강세형, Ada B. Hall, Miss Appenzeller
감 사: Mrs. A. Chaffin, Dr. Florence J. Murray 『이화 100년사』, p275

이와 같이 Ada B. Hall 선교사는 항상 이화의 움직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맞아 활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Ada B. Hall의 중요사역 중 하나는 매일학교(Day School)이였다. 이화학당이 기숙사제 였지만 매일학교는 통학하는 학교였다. 그렇기에 이름도 매일 통학한다하여 매일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1895년 이후 많은 이화 졸업생들의 교육 동참과 함께 이루어 졌는데. 너무 적은 수만 교육받는 것이 안타까워 교회를 중심으로 여학교를 개설하였다. 『이화 100년사』, p82
그전 1892년에 로드 와일러는 “기숙사제 학교(이화학당)에 들어 갈 기회가 없는 더 많은 소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매일학교를 계획하였으나 여학생을 구하는 문제와 교사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아직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The Gospell in All Lands, 1893, p106-107

그러다 1895년 10월에 여자매일학교가 상동에 생긴 후, 수가 늘어갔다. 1890년대부터 1900년대에 걸쳐 매일하교근 사립교육기관으로서 우리나라의 초등교육에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9년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남대문 근처의 공옥 여학교를 비롯하여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연화봉여학교, 마포여학교, 아현여학교, 공덕리여학교, 서강여학교, 용두리여학교 등이 있다. 이들의 학교가 서울지역에 설립된 대표적인 이화부속매일학교로서 일제침략 이후의 사립학교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어린 소녀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화 100년사』, p83
이 중 Ada B. Hall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었던 곳이 서강여학교이다. 서강여학교는 1927년에 이화학당의 로이스(Edith Royce) 선교사가 맡아 가르쳤으며, 1928년에는 아다 홀(Ada B. Hall) 선교사가 교장으로 봉직하며 가르쳤다. 아다 홀 선교사는 여선교부의 회계였으며, 이화전문학교 교수였고 이사(理事)로서 서강여학교를 1937년까지 10년 동안 맡아 교육선교를 담당하였다. 1932년까지 졸업생 수는 144명이며 재학생 97명에 교사는 3명이었다. 기독교조선감리교회요람, 총리원 발행,1936. 중부연회록,1937년. p8

Ada Bear Hall 선교사가 아직 서강여학교의 교장으로 취임전의 일이다. 1925년 7월 조선(한국)에 크게 피해를 입힌 대홍수가 일어난다. 을축년홍수(乙丑年洪水)로 지금도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의 대홍수였다. 7월 7일부터 시작한 1차 홍수부터 9월초 4차 홍수까지 이어졌다. 4번에 걸친 호우로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붕괴 1만 7405호, 침수 4만 6813호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논 3만 2183단보, 밭 6만 7554단보등이 유실되어 피해액은 무려 1억 300만원에 달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약 58%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였다. 을축년홍수는 한강유역에서 발생한 사상 최고의 대홍수로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김연옥,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977#
1925 Year Book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The summer brought Seoul the worst floods in recorded history. Fortytwo
feet above normal level, the river rose, carrying people and their houses
by the hundreds to destruction. Six of our day schools were in the flooded
region and for these Miss Hall needs added funds.’ Year Book(1925),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Boston, 1925, p.83


6개의 매일학교(Day School)이 침수되어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추가재정이 아주 많이 필요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가정과학대학 인간생활환경 연구소에서 출판한 가정과학대학 70년사에서 1994년에 지급되고 있는 항목 중 Ada Hall 선교사의 이름도 찾을 수 있었다. (뒤에 사진에 표를 첨부하였다)
작성일:2019-07-02 21:13:59 121.133.210.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