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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aines, Paul E.(1895-1973, OMS) / Haines, P. E.(1891-1960, OMS)

닉네임
강태호, 김충일
등록일
2019-07-03 00:04:25
조회수
1387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3-3_089_강태호_김충일.hwp (1868288 Byte)
Haines. Paul. E. (1895- , OMS)

1. Ⅰ. 기본사항

1.1. 이름: Haines. Paul. E. / 헤인즈 / 한국명: 허인수(許仁守)
1.2. 생몰년도: 1895.6.22. - 1973.5.1.
1.3. 출신 및 소속: 미국(Pennsylvania Ohio), 동양선교회(OMS)
1.4. 한국선교기간: 1921. - ?
1.5. 경력: 1918년 미국에서 목사 안수1921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1928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 교수로 목회자 양성1929 이사장으로 활약1931-39 성결교 기관지 <활천>의 발행인으로 활약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선교부 재산->재단이사회해방 후 재내한, 성결교회 자립운동 전개로 몇 달 후 귀국
1.6. 가족사항: 부인: Haines. Myrtle (1891.6.30.-1960.3.10.)아들: ?딸: ?


Ⅱ. 선교사 소개

1.헤인스 선교사 약력

헤인스 선교사는 동양선교회의 선교사로 목사이며, 또한 교육자였다. 한국명은 허인수(許仁守)다. 1918년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21년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이후 1940년 말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기까지 20년을 동양선교회 및 성결교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하였다. 동양선교회 이사의 한 사람으로, 1929년부터는 이사장으로 활약하였고 1928년부터는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 교수로 목회자 양성에 주력하였으며 1931-39년 성결교 기관지 <활천>의 발행인으로 활약하였다. 일제말기 마지막까지 남아 동양선교회 포교관리자로 활동하다가 결국 1940년 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당하면서 선교부 재산을 이명직, 박현명, 최석모 등에게 잠시 맡기고, 다시 귀환하여 선교 사업을 재개하려 하였으나 당시 한국의 성결교회가 선교사 도움 없이 자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몇 달 머물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2. 문서 선교의 일익을 담당한 헤인스 부부

당시의 한국교회 문서선교운동은 극히 미약했다. 그 가운데 성결교회는 문서운동에 일찍 눈을 떠서 총회 산하에 출판부를 두고 각종 기독교 서적을 출판, 보급하는 일을 감당했다. 이 때 성결교단의 월간지, 「활천」의 발행인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허인수 선교사였다.
「활천」은 성결교단의 기관지로, 1922년 11월 25일에 창간 되었다. 선교사 길보른이 사장을, 이명직이 주필, 이상철이 편집을 담당했고, 허인수 선교사가 발행을 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 인용하여 「활천」이란 제호를 사용했으며, 편집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한문 혹은 한글로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활천」은 성경강해, 설교, 신앙 간증, 주일학교의 성경공과 등을 실었다. 편집 강령은 성결교회의 '전도요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사상으로 삼아 복음의 메시지와 성결의 아름다움을 전하려 하였으며, 교파의 구별 없이 구독되었다.
허인수 선교사의 부인 머틀 헤인스(Myrtle Haines)는 초기 한국 교회의 부흥 성가의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청교도 자손에서 세계선교까지 데이튼과 풀러 666 자손 카우만 킬보른 헤인스교수 묘지", 다들보아해럴드 블로그, 2018.09.30.
성결교단 출판부에서는 1907년 「복음가」를 발행하였는데, 머틀 헤인스가 이를 편집하고 보충하여 재구성하여 「신중 곡조 복음가」를 발행했다. 1930년 「신중 복음가」에 30여장을 더하여 발행된 「부흥성가」의 서문에서는, 「신중 복음가」가 그동안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 많은 성도들에게 큰 감동과 심령에 부흥을 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머틀 헤인스는 이후로도 45년 간 서울신대의 음악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교회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인수 선교사는 「활천」의 발행인으로 문서 선교의 일익을 감당했고, 그의 부인은 「신중 복음가」를 저술하며, 기독교 음악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3. 선교사의 가문, 헤인스 가와 올크니 가

허인수의 아내 머틀 헤인스(Myrtle Haines)는 만국성결교회 하나님의성경대를 1916년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와서(이미 그 오빠 올크니의 순교에도) 1917년 성결교회 [신증 복음가](한국 부흥 복음성가들의 대부분을 구성하였고, 만국성결교회 부흥복음가들을 종합 편성한 것)를 만든 45년간 최장수 서울신대 음악교수다.
그녀는 1960년대 노환으로 미국으로 귀국해서, 지금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허인수 부인(원명 올크니) 가정의 세 형제자매들은 한국에서 이방 풍토병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순교한 귀중한 집안이다.
그녀의 아들 폴 헤인스 2세도 서울신대 교수와 한국 성결교회 순회 전도자로 1980년대까지 일하다1990년대 미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 소재 외삼촌인 올크니가 담임한 교회로 돌아갔고 포틀랜드에서 성결교회 전도사 임용근 의원(미 한국인최초 상하 양원 의원)을 당선시키는데 일조하였다.
하나님의성서학교는 한국 선교사들의 인생형성기와 한국성결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머틀 올크니 헤인스 부인의 언니, 올크니는 1913년 하나님의성서학교에 입학, 신학생시절 한국선교실습에 동참하였다가, 질고로 하늘의 예수 품에 안기며 소천하였다. 그 남동생(올크니)도 이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활동에 나갔다가 같은 일로 소천하였다. 그 다음에 머틀 올크니 헤인스도 이 신학교에 입학하여 폴 헤인스를 만났고, 7년 동안 미국 국내 목회와 선교사역에 참여하였다가 한국선교사업에 뛰어 들었다. 하나님의성서학교 10명의 신학생들은 일본 마을복음화 대회에, 또 거기에 참여했던 4명은 다시 한국 마을 복음화대회에 선교실습에 나갔다. 만국성결교회 총회장이 담임한 임마누엘성결교회 출신의 폴 헤인스 가족들은 부모와 두 형제, 두 자매가 하나님의성서학교를 졸업했다.
머틀 올크니 헤인스가 학교를 마친후 그 자매 비트리스와 그 남편, 동생 로렌스와 그 아내, 동생 윌리엄도 이 신학교 수련생이 되었고, 그 당시 모두 주의 사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하나님의성서학교의 동기생 16명이 신학교의 성결복음 원칙들과 진리들로 철저히 무장받고 당시 주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학교의 원래 목적과 기획인 온 족속들에게 순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기를 항상 기도했다.
폴 헤인스의 다른 처남 로렌스 올크니는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부흥자 지역에서 시일, 밀러, 라센, 해리 우드스, 윌리엄 헤슬롭, 한국인 교역자들과 더불어 팀을 이루어, 예배인도, 전도, 천마집회, 마을 복음화, 전진운동, 센터 교회개척과 확장의 대열에 서 있었다. 이들의 팀 선교사역으로 1년 동안 30,000명이 예배에 참석하였고, 710,000명이 복음을 들었고, 135,000명의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참석하였고, 10개의 새 센터 교회들이 세워졌다. 특히 부흥자 지방의 여자들의 집회들에서는 박해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신유역사를 통한 큰 승리가 있었고, 즉시 여자 중심 구역회들이 열리는 일이 있었다.


4. 해방 후

해방 후 헤인스는 1946년 6월에서 한국입국을 허락받고 10월-1월간 입국해 있었다. 그 때에 OMS주한총재였던 그는 사역의 기회를 살펴보기도 했지만 당시 일어난 성결교회의 자립 운동이 전개되자 몇 달후 귀국하였다.
『활천』 중간 제4호에는 그가 입국 전 상하이에 머물러 있을 때 당시 한국 성결교회 상황을 피력했던 그의 글이 실려있다. 그 글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 있다는 헤인즈의 기대감과 성결교회의 자립, 자치적인 움직임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 재입국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여러 달을 기다린 후인데도 한국 땅에 즉각 들어가는 길은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셨고 조용한 아침의 땅에서 우리의 보배롭고 놀라운 한국지도자를 통하여 이루시고 계시는 일의 ‘정사’를 얻기 위해 한국에 일찍 들어가기 위한 길이 열릴 것을 믿고 있다. 선교사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땅에서 자신이 OMS를 전쟁이전에 거기에 세우게 할 수 있게 하신 자국교회를 통하여 역사를 이뤄 오시고 계셨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했을지라도 해방일 후에 교회가 모이고 한국쪽의 복음전도집회를 시작하는 첫교회가 있었음을 기뻐한다. 이것은 실로 가장 고동이 뛰는 소식이었고 “주를 대항해 만들어진다면 어떤 무기도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약속이 다시 분명히 입증되었다.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아는 그 때까지 우리 마음은 여기 중국인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한다. … 한국 형제들이 자립과 자치를 확립할 단체로서 감당할 수 있음을 볼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있는 그것 때문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OMST 〔June, 1946〕 : 9)


5. 헤인스선교사의 아들 Paul W. Haines

헤인스 선교사의 아들 Paul W. Haines 또한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사역했다. 그는 1921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서울 외국인 학교에 다녔으며 1941년에 헐리우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전학하였다. 이후 1945년 Asbury College과 1949년 Asbury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였다. 그는 1946년에 Florence Alice Hall과 결혼했고 그 때 이후로 평생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함께 했다. 그는 1949년 Florida Conference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에서 안수를 받고, OMS(Oriental Missionary Society)에 들어가 1950년에 2세대 내한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사역했다. 휴가기간에는 항상 귀국하여 Winona Lake의 집에 돌아와 지냈으며, 1990년에 사역을 마쳤다.

또 헤인스 2세는 훌륭한 인품과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무장되었기에 한국에서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1950년에서 1953년 한국전쟁 당시 통역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한국교회, 신대원 학생들 그리고 목사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그의 뛰어난 사역과 한국성결교회를 섬긴 것을 인정받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수상을 하였다. 또 크리스천으로서의 그의 일생의 헌신을 인정받아 Asbury Theological Seminary에서 Distinguished Alumni Award을 수상하였다.
일가가 대를 이어 선교사로서 한국교회를 섬긴 것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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