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B001/Peerman, Ernst Leslie. Batey, Martha Ivey

닉네임
유제홍
등록일
2019-11-27 10:20:15
조회수
729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5_B001_유제홍.pdf (148243 Byte)
<샘플 보고서> 피어만 선교사 / Peerman, Ernst Leslie (-)
베이티 선교사 / Batey, Martha Ivey
I. 기본사항

1. 이름: Peerman, Ernst Leslie / 피어만 / 한국명: 배여만(裵如萬)
2. 생몰연도: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07. 06. .- 1913.
5. 연표
1907. 6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강원도 회양지방에 파송되어 활동
1908 원산서지방 장로사(현 감리사)가 되어 회양, 중리, 안변, 고미탄 등지의 교회 를 지도하며 복음전도
1911 동료 베이티와 결혼
1913 건강 악화로 귀국, 버지니아에서 목회활동
6. 가족사항
부인: Batey, Martha Ivey (아내)

참고문헌: 기백 15권; 남감리교사; 구미인조사록; 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Minute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08-1913.


1. 이름: Batey, Martha Ivey / 베티
2. 생몰연도: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07 - 1913
5. 연표
1907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원산지방에서 선교활동
1911 동료 피어만과 결혼
1913 남편의 건강 악화로 귀국, 버지니아에 거주
6. 가족사항: Peerman, E. L.(남편)

참고문헌: 기백 7권; 한국구세군사, 1975; 구미인조사록; 구세군사관기록부; 구세신문; 구세군역군.

II-1. 선교사 소개: 피어만(Peerman, Ernst Leslie, -)

피어만은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목사. 한국명 배여만(裵如萬)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07년 6월부터 활동했다고 하는데,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5월18일 부산항을 통해서 입국했다. 그러니까 그는 5월18일에 입국하고 6월부터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서울과 송도에 있는 몇 교회를 방문했고, 일주일 동안 그 지역을 여행했다. 이 여행 도중 그는 예배와 선교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그가 1907년에 입국한 것은 아마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여파로 기독교인의 수가 급증하여, 이에 따라 사역자의 필요성에 따른 것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강원도 회양지방에 파송되어 활동하다가 1908년 원산서지방의 장로사(현 감리사)가 된 것을 봤을 때 적절한 해석인 듯하다. 그가 1911에 동료 선교사 베이티와 결혼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그녀가 원산에서 활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원산서지방 장로사(長老師, 현 감리사)가 되어 회양·중리(中里)·안변(安邊)·고미탄(苦味灘) 등지의 교회들을 지도하며 복음전도에 헌신하였다. 그가 회양지방에서 원산서지방로 가서 장로사가 된 것은 1905년 남감리교는 5개 구역에서 13개 구역으로 확대 조직되었고, 1906년 제12차 선교연회에서 원산구역은 원산지방으로 확대되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3년 건강 악화로 아내와 함께 귀국하여 버지니아에서 목회활동을 하기 전까지 다른 감리사들과 함께 원산서지방의 복음전도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들의 인도 아래 원산서지방은 꾸준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II-2. 선교사 소개: 베이티(Batey, Martha Ivey, - )

베이티는 미국 남감리교 소속 선교사로서 1907년 내한하여 원산지방에서 사역하였다.
남감리회의 한국 여성 선교를 개척한 리드 부인이 건강이 악화되어 1899년에 귀국했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1901년 별세하고, 1901년 2월 콜리어 부인도 건강 악화로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윤치호의 부인도 1905년 2월에 병으로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베이티(M. I. Batey)는 다른 많은 미혼의 20대 젊은 여성들과 함께 내한함으로서 여선교부가 크게 확장되었다.
베이티는 서울 잣골교회와 남자매일학교사업으로 활동하였는데, 잣골교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원산부흥운동의 불시를 당시 하디 선교사는 원산 이외의 지역에서 기도회와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부흥운동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즉 1903년 원산지방 부흥회를 거쳐 1904년 1~2월 개성지방 사경회와 김화 새술막 부흥회, 개성 남부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부흥운동의 열기를 한 것 고조시킨 후 4월에 서울로 올라와 부흥회를 인도하였으니, 바로 자골 부흥회였다. 자골 부흥운동은 1905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05년 2월,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에서 배화학당 학생들과 자골교회 교인들이 참여한 부흥회가 열렸다. 1903~6년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자골교회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룩했다. 교인 수가 30명에서 1백 명 수준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남성 교인들이 늘어났고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는 인가귀도 현상이 나타났다. 자골교회의 부흥은 1907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이티가 1907년에 한국에 들어온 것은 부흥하는 잣골교회가 일꾼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1911년 동료 선교사 피어만과 결혼하였고, 1913년 남편의 건강 악화로 귀국하여 버지니아에 거주하였다.
작성일:2019-11-27 10:20:15 125.143.161.122